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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⑨ - 마음의 행로

기사승인 2018.11.11  09:4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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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⑨ - 마음의 행로
 
 
  - 제작 : 1942년, 미국
  - 감독 : 마빈 르로이
  - 배우 : 로널드 콜맨, 그리어 가슨, 수잔 피터스
  - 필름 : 흑백
  - 상영시간 : 126분
  - 수상 :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 감독, 남우주연, 여우조연, 각색, 
          음악, 미술상 노미네이트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빛바랜 흑백 멜로영화 한 편이 있다. 주인공이 기억상실증에 걸려 사랑하던 여인을 몰라보게 되고, 그 여인은 남자의 곁에 머물며 그의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헌신적 사랑을 쏟는 얘기이다.
 
요즘 들어 ‘마음의 행로’를 처음 본 사람이 있다면 조금은 황당해하고 맥 빠져 할지 모른다. 지금 세상에 기억상실증이라니 말이다. ‘기억상실증’은 식상한 소재가 돼 버린 지 오래다. 그러나 1940~50년대만 해도 이런 소재는 그리 진부한 것이 아니었다. 이 영화는 기억상실로 인한 사건과 갈등, 그리고 기억회복을 계기로 맞는 또 다른 반전의 등장이라는 매우 도식적인 구도를 가졌다. 이런 전형적인 내러티브는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수없이 만들어진 아류(亞流) 멜로영화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그 원조 격에 해당하는 작품이 ‘마음의 행로’다. 지금부터 그 오래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망각의 세월을 찾아가는 긴 여정
 
 깊어가는 1918년의 가을. 영국 미들랜드의 외딴 곳에 위치한 멜버리지 카운티 정신병원에 존 스미스(로널드 콜맨)라 불리는 군인이 수감 돼 있다. 1년 전 부상당해 반쯤 죽은 상태로 발견된 그는 독일과 스위스를 거쳐 6개월 전 이곳으로 이송된 상태. 그때의 후유증으로 그는 실제 이름과 가족사항 등 자신과 관련된 과거의 그 어떤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벗어나길 희망하지만 찾아오는 가족이 없어 수감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신세다.
 
안개가 짙게 낀 어느 날. 제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스미스는 정원을 산책하던 도중 종전소식을 듣는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고 시가지는 온통 축제 분위기에 빠진다. 그 혼란한 틈을 이용해 스미스는 슬며시 정신병원을 빠져나와 바깥세상으로 향한다.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루는 거리에서 스미스는 얼떨결에 담뱃가게로 들어선다. 가게 여주인은 어눌하고 어딘가 행색이 수상한 스미스를 신고하려고 한다. 그때 이를 지켜보던 한 여인이 스미스를 도와 위기를 모면케 해준다.
 
스미스는 거리에서 그 여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녀는 폴라 리지웨이(그리어 가슨)라는 예명으로 극장 쇼에서 노래하는 무희다. 폴라는 스미스를 자신이 일하는 바의 숙소로 데려와 재워준다. 폴라는 이 불우한 사내를 ‘스미시’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친근감을 표시한다. 폴라는 미지의 이 남자에 대해 이것저것 묻지만 스미스는 자신이 기억상실증에 걸렸음을 토로한다. 동정심 많은 폴라는 스미스의 사연을 듣고 눈물짓는다. 폴라와 가까운 동료들은 스미스를 병원으로 돌려보낼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폴라는 재수감을 두려워하는 스미스를 향해 절대 되돌려 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폴라는 자신의 일도 포기하고 스미스와 함께 외딴 시골의 한 여인숙으로 도피한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날아온다. 평소 글쓰기 소질이 있었던 스미스가 리버풀 머큐리 신문사에 보낸 글이 채택되어 원고료를 받게 된 것. 여전히 기억되지 않는 과거에서 헤어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던 스미스는 작가로 새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스미스는 폴라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청혼한다.
 
앞에 개울이 흐르고 마당에 아름다운 꽃나무와 작은 문, 흰색 울타리가 둘러진 예쁜 신혼집의 문을 열쇠로 열면서 스미스와 폴라의 행복한 나날은 시작된다. 아들이 태어나고, 스미스는 아내의 눈빛을 닮은 값싼 목걸이를 선물한다. 그때 둘의 결혼식을 주례한 목사가 나타나 머큐리 신문사의 채용 면접 소식을 알리는 전보를 전달한다. 스미스는 “내일 밤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길을 떠난다. 폴라는 떠나는 스미스에게 옷가지와 함께 현관 열쇠를 챙겨준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리버풀에 도착한 스미스는 신문사를 찾아 길을 건너던 중 그만 달려오던 택시에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다. 얼마 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스미스는 큰 부상 없이 깨어난다. 그런데 스미스는 이 사고를 계기로 전쟁 전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게 된다. 자신의 본명이 찰스 레이니어라는 사실과 집 주소까지 모두 기억해낸 스미스. 대신 그는 폴라와 함께했던 지난 3년의 세월은 새까맣게 잊게 된다. 자신의 집을 찾아간 스미스는 하루아침에 명문가의 상속자로 변신하고 대저택의 주인이 되어 새 인생을 살게 된다.
 
예전의 자리로 돌아왔지만 스미스의 마음 한구석은 늘 허전하다. 주머니에 남아있는 열쇠를 만지작거리며 지난 3년의 일을 생각해 보려 애쓰지만 번번이 허사에 그친다. 그럴 즈음 조카뻘인 키티(수잔 피터스)가 그에게 연모의 감정을 드러낸다. 아직 어린 키티는 대학을 졸업하고 어른이 되면 자신을 여자로 받아달라고 청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스미스는 사업가로서 수완을 발휘하여 산업계의 거물로 성장한다. 대학을 졸업하고 성숙한 여인이 된 키티의 사랑도 받아들인다. 그런 와중에도 스미스는 언제나 주머니 속의 열쇠가 지닌 의미를 떠올리려 애를 쓴다.
 
스미스의 사무실. 산적한 업무 처리로 바쁜 스미스가 유능한 비서 마거릿 헨슨 양을 호출한다. 스미스의 방으로 들어오는 헨슨.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헨슨은 다름 아닌 스미스의 아내 폴라였다. 스미스가 행방불명된 사이 병으로 아들을 잃은 폴라는 생계를 위해 타자기술을 익혀 일반회사 사무직원으로 취직했었다. 어느 날 신문에 실린 스미스의 기사를 본 폴라는 마음먹은 바가 있어 2년 전 스미스의 사무실로 옮겨왔다. 폴라의 정체를 까맣게 모르는 스미스의 곁에서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그가 기억을 되찾기를 바라며 보필해 온 것이다. 그녀는 인수합병 중인 멜버리지(정신병원이 있던 곳) 케이블회사 사진을 보여주며 브리핑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 하지만 아무것도 스미스의 기억을 되돌릴 단서가 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스미스는 키티와의 결혼을 발표하여 폴라의 마음만 더욱 아프게 한다.
 
한편 키티가 선택한 결혼 축가를 듣던 스미스는 몹시 혼란스러워 한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폴라와 결혼할 때 연주된 것과 똑같은 곡이었다. 스미스의 낯선 표정을 읽은 키티는 스미스에게 뭔가 말 못 할 과거가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 키티는 울음을 터뜨리며 스미스의 곁을 떠난다. 그날 이후 스미스는 과거를 찾는 일에 몰두한다. 하지만 스미스의 과거 찾기는 계속 실패로 돌아간다.
 
스미스는 의원이 되어 정계에 입문한다. 더 바빠진 업무를 처리하는데 있어 폴라의 도움은 절대적이다. 항상 폴라를 주의 깊게 지켜보아 온 스미스는 “우리는 둘 다 과거의 감옥에 있소.”라고 말하며 조심스럽게 청혼한다. 두 번의 기억상실과 두 번의 결혼이라는 기구한 운명 앞에 선 두 사람은 그렇게 또 다른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결혼 후에도 자신을 여전히 몰라보고 열쇠만 만지작거리는 스미스를 바라보는 폴라의 마음은 너무나 아프다. 그런 폴라에게 스미스는 결혼 3주년 기념 선물로 비싼 에메랄드 목걸이를 선물한다. 혼자 방으로 돌아온 폴라는 과거 스미스가 선물했던 값싼 목걸이를 꺼내 들고 울음을 터뜨린다.
 
지칠 대로 지친 폴라는 홀로 긴 여행을 떠난다. 그녀는 여행길에 과거 스미스와 묶었던 시골 여인숙에 잠시 들러볼 생각이다. 그 시각, 인수 합병한 케이블회사의 파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미스는 멜버리지로 향한다. 파업문제를 해결한 스미스는 비서와 함께 위스키 한 잔 하러 바에 들른다. 어딘가 낯익은 바의 분위기에 스미스는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그곳은 폴라가 정신병원에서 나온 스미스를 데려와 처음 재워준 숙소가 있던 바였다. 바를 나와 기차역으로 향하던 스미스는 담배를 사자며 비서에게 “저 모퉁이를 돌면 담뱃가게가 있네.”라고 말한다. 비서는 “멜버리지는 초행인데 코너에 담뱃가게가 있다는 걸 어찌 아세요?”라고 묻는다. 스미스는 깜짝 놀란다. “맞아! 어떻게 알았을까. 멜버리지․․․, 멜버리지․․․.” 드디어 스미스는 퍼즐을 짜 맞춘다. 정신병원을 찾아가고 거기서부터 잃어버린 기억의 흔적을 더듬어 가던 스미스. 그는 종전되던 날의 혼란스러운 시가지 모습과 폴라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마침내 과거의 기억을 되찾게 된다.
 
시골 여인숙에 들른 폴라는 그곳 직원으로부터 두 사람이 살던 신혼집에 대해 묻고 간 신사분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뭔가를 직감한 폴라는 황급히 여인숙을 나선다. 장면이 바뀌고․․․․․․. 앞에 개울이 흐르고 작은 정원에 아름다운 꽃나무와 작은 문, 흰색 울타리가 둘러진 옛날 신혼집 앞에 스미스가 서 있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이 살던 집까지 찾아온 스미스는 울타리를 지나 천천히 현관문으로 다가간다. 주머니에서 늘 만지작거리던 열쇠를 꺼내든 스미스. 구멍에 열쇠를 꼽는 순간 현관문이 스르르 열린다. 그때 막 뒤쫓아 온 폴라가 “스미시~”하고 부른다. 뒤를 돌아본 스미스도 “폴라!”하고 외친다. 감격에 겨워 와락 끌어안는 두 사람. 둘의 볼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애수’의 마빈 르로이 연타석 홈런 날리다
 
기억을 잃어버린 남자 스미스를 연기한 로널드 콜맨(1891~1958)은 1920년대 초반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까지 활발히 활동한 배우다. 영국신사 특유의 신사적 매너와 귀족적 풍모를 지닌 그의 트레이드마크는 콧수염. 일명 ‘콜맨 수염’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을 만큼 그의 콧수염은 큰 인기였다. 그의 외모가 자주 클라크 케이블과 비교되는 것도 아마 콧수염 때문 아닐까 싶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그는 폭탄가스에 노출되어 전투신경증을 앓았고 몇 달 후 훈장을 받고 제대한 경험이 있다. 영화 출연 당시 그의 나이는 오십이었다. 상대적으로 젊은 극 중 두 여배우와 로맨스를 펼치는 그가 좀 늙어 보였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 지나친 중후함도 이럴 때는 약점이 된다.
 
자상함, 온화함, 우아함, 고귀함과 정숙, 공작부인. 이런 말들은 그리어 가슨(1906~1999)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다. 그녀는 런던대학과 프랑스 그로노블대학에서 수학한 재원이다. 지적이며 정제된 연기스타일로 많은 영화에서 고귀한 여성상, 구원의 여성상, 이상적인 어머니상을 제시한 배우로 기억된다. 1942년 작 ‘미니버 부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굿바이 미스터 칩스(1939)’ ‘오만과 편견(1940)’ ‘퀴리부인(1943)’ 등에 출연했으며 생애 통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일곱 차례 노미네이트된 실력파다. 그리스 여신을 떠올리게 하는 조각 같은 미모의 소유자다. 영화에 비쳐진 모습과 달리 그녀의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치 못했다. 두 번의 이혼 뒤에 텍사스 석유재벌 바디 포겔슨과 재혼했으며 1999년 9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마음의 행로’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또 한 명 있다. 극 중에서 스미스를 연모하는 키티 역할을 맡은 수잔 피터스(1921~1952)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그리 긴 분량을 출연하지 않았음에도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었다. 19세의 나이에 할리우드에 입성해 불과 2년 뒤 주연배우로 발돋움할 만큼 연기자로서 타고난 소질을 보였지만 그녀는 매우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인물이기도 하다. 앞날이 창창할 것만 같았던 이 여배우는 1945년 영화배우였던 남편 리처드 퀸, 가족들과 샌디에이고 인근 쿠야마카산에서 오리사냥을 즐기던 중 총기오발 사고를 겪는다. 척추에 총알을 맞은 그녀는 다리가 마비되어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해 살게 된다. 그녀 나이 불과 스물넷에 당한 이 사고로 이후 그녀의 삶은 휠체어 전문 배우로 제한된다. 비운의 운명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탓일까. 그녀는 서른 살이 되던 1952년 신경성 식욕부진(거식증)과 신장질환 및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원더 보이’ 마빈 르로이 감독(1900~1987)은 극히 통속적인 소재를 가지고 뜻밖의 감동을 이끌어 내는데 독보적 재능을 지닌 인물이 아닐까 싶다. 1940년 발표한 ‘애수(비비안 리 주연)’는 올드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만큼 큰 사랑을 받은 그의 대표작이다. ‘애수’ 역시 후대 싸구려 멜로영화들의 교본이 될 정도로 뻔한 소재를 다뤘지만 르로이는 이 영화를 그저 그런 멜로드라마의 한계를 넘어 선 불멸의 흑백 고전으로 남겨놓았다. 베스트셀러 작가 제임스 힐튼의 소설 ‘랜덤 하비스트(Random Harvest)’를 각색한 ‘마음의 행로’ 또한 그의 연출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눈물 콧물 짜내는 삼류드라마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애수’와 ‘마음의 행로’ 흥행에 연거푸 성공함으로써 순수 멜로의 거장으로 불리게 되지만 1951년에는 ‘벤허’에 필적할 만한 대작 시대극 ‘쿼바디스’를 연출하여 또 한 번 주목을 받았다.
 
추억을 소환하는 한 편의 동화
 
세월이 지날수록 구식냄새 폴폴 나고 촌스럽게만 느껴지는 영화가 있다. 반면에 세월의 흐름 속에서 더욱 견고해지는 영화도 있다. ‘마음의 행로’는 당연히 후자에 속하는 영화라 하고 싶다. 지고지순한 사랑보다는 일회적이고 즉흥적인 로맨스가 판치는 요즘이다. 최근 나오는 영화들은 폭력, 섹스, 배신, 음모, 오락 일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극적인 판타지가 없는 영화는 대접받지 못한다. 그런 영화를 반기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행로’는 여전히 유치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각박한 시대에 이처럼 훈훈한 작품을 감상할 기회마저 없다면 그것은 곧 불행이다. 깊어가는 가을.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쓸쓸해질 때 당신의 잃어버린 추억을 소환해 줄 동화 같은 한 편의 영화가 곁에 있다는 것은 더없는 위안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영화, 이름도 멋진 ‘마음의 행로(行路)’다.
 
 

silverinews 진고개 신사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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