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가수 김성호의 노래 그리고 인생 이야기

기사승인 2019.01.11  15:46:33

공유
default_news_ad2

- - 3집 '내사랑 매화'로 인기를 얻고 있는 가수 김성호의 7전 8기 삶

 
가수 김성호의 노래 그리고 인생 이야기
- 3집 '내사랑 매화'로 인기를 얻고 있는 가수 김성호의 7전 8기 삶
 
[▲사진제공 : 실버아이TV]
 
 때는 바야흐로 1957년 음력 6월 24일 초여름, 날씨는 덥고 먹을 것은 없고 물로 배를 채우던 보릿고개 시절. 나는 전라북도 순창 ‘쌍치’라는 곳에서 논 한 뙈기, 밭 한 뙈기 없는 가난하지만 고지식하고 강직한 부모 밑에서 2남 4녀 6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물 맑고 공기 좋은 내고향 순창은 예로부터 된장, 고추장이 유명하고 지금은 복분자, 블루베리, 초코베리 등 베리류가 유명하다. 이곳 순창 첩첩 산골에서 태어나 초등・중학생 시절 상고머리 한번을 못하고 빡빡머리, 검은 고무신, 짚신을 신으며 십리 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다. 하루 세끼는 고사하고 물로 허기를 채우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고 나락이삭을 주워 고구마밥에 무, 꽁보리밥을 먹고도 건강하게 자랐다.
 
중학교를 겨우 마치고 빡빡머리에 책보, 내의 하나를 겨우 봇짐으로 싸들고 서울로 왔다. 하루에 두 번 다니는 버스에 몸을 싣고 정든 고향, 부모 형제를 뒤로하고 서울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잘 먹지도 못해서 차멀미에 구토・설사까지... 20여 시간에 걸쳐 겨우 도착한 나는 서울역 뒤 서부역 자동차정비공장에 취직을 했다.
 
그 당시에는 먹고 사는게 우선이라 서울가서 밥만 먹여줘도 최고의 취직자리였다. 그리고 자동차정비기술은 좋은 기술이라하여 자기밥을 먹고 다녀도 취직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였다. 때마침 이리에 사는 한 경찰관아저씨가 순창 고향땅을 사서 별장을 짓는 바람에 그 경찰아저씨의 도움으로 서부역에 있는 자동차정비공장에 취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숙식이 문제였다. 나는 초・중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잘했다. 다행히 내가 전교에서 1, 2등을 했다는 이야기 덕에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던 사장아들 가정교사를 하면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자동차정비일은 아침 8시에 시작해 오후 8~9시에 끝나고 3층 사장집에서 저녁도 먹지 못한 채 한 시간씩 가정교사를 하고 중국집 다락방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그 당시에는 쉬는 날도 마치는 시간도 정해진 것 없이 매일 오후 9시경 끝나고 주말도 없이 겨우 명절에만 쉬는 정도였다.
 
3년여 가정교사생활을 하다보니 월급이 조금 올라 가정교사를 그만두고 매일 야근 작업으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조금씩 모은 돈으로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땅을 사드리고 일찍이 20대에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에 소질이 있었는지 열심히 하다보니 돈도 조금씩 모아서 고향 형님도 도와주고 2남 4녀 형제들도 도와주기 시작했다. 나 역시 조금씩 저축한 돈으로 부동산에 투자를 해 꽤 많은 돈을 모았다. 20대 후반에는 노래가 하고 싶어 잡지책에 나오는 작곡가를 찾아가 노래를 배우기도 했다. 그때 가수증도 받았지만 워낙 사업이 바쁘다보니 가수생활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노래를 접어야했다.
 
그렇게 사업에만 열중하던 40대 시절 나는 큰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 만다.
그 사고로 요추수술을 했고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게 됐다. 2년여간의 병원생활과 약 20여 년간 여러 고난과 역경을 겪다보니 친구도 떠나고 사랑도 떠나고 모든 것이 자포자기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허송세월도 잠시 정신을 차려야겠다 생각한 후 오뚜기처럼 일어나 공부에 열중해 그 어렵다던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했다. 후에 중개사사무실을 열어 열심히 살았다. IMF도 겪었고 힘든 시절을 묵묵히 지내다 보니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듯 나에게도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공인중개사 사무실을 약 15년 가까이 하니 재산증식도 하게 되어 물질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렇게 제2의 고향인 고양시에 둥지를 틀고 자동차정비공장과 주유소를 하면서 호남인이 40만이 넘는 고양시 호남향우회 총연합회장도 역임하고 동문회, 동창회, 향우회, 라이온스, 도민회 등 여러 봉사단체 회장을 역임하는 등 열심히 살았다.
 
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더욱 겸손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업가 겸 신앙인이 된 것이다. 지금은 교회제직으로 충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히 삶에 접목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젊었을 때 너무도 잘나가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어 자녀로 삼아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작년에 환갑을 맞이한 내게 세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그토록 하고 싶었고 갈망하던 가수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환갑을 맞아 제2의 인생을 산다는 생각으로 음반을 제작했고 젊었을 때 이루지 못한 꿈이었던 가수가 됐다. 비록 몸이 불편해 오래 서 있지 못하기에 스텐드마이크대를 의지하여 노래를 하고 다니지만 얼마나 즐겁고 기쁜지 모르겠다.
 
1년 동안 차태일 작곡가와 함께 작업하며 내가 작사를 맡아 ‘천년배필’ 등 11곡을 만들어 1집 음반을 냈고, 바로 2집, 정원수선생을 만나 ‘너무 이쁜 당신’, ‘사나이 가는 길’을 발표하고 열정적으로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오영산 친구작곡가를 만나서 드디어 1년 사이에 제3집 ‘내사랑 매화’를 발표하게 됐다. 늦게 시작한 가수 생활에 몸은 힘들었지만 너무 행복했고 열정적으로 활동을 하다 보니 요즘 ‘내사랑 매화’의 인기가 뜨거워 상승곡선을 타고 있다. 많은 분들이 알아주고 힘과 용기를 주어 열심히 홍보를 하고 있다.
 
‘내사랑 매화’ 역시 가사를 직접 썼으며 역경을 딛고 사랑했던 여인과의 애틋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표현한 노래다. 3집 ‘내사랑 매화’를 부르는 지금의 나는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기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약 20여 년 신앙생활만 하다보니 노래방 한번 가볼 기회가 없었던지라 독학으로 터득한 노래지만 이제야 노래가 뭔지 알 것 같은 느낌이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오영산 작곡가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내사랑 매화’ 외에 오영산 작곡가가 다시 한번 나를 위해 만든 노래 ‘무정한 세월아’를 선물했다. 가는 세월이 아쉬운 나에게 딱 맞는 노래인 것 같다. 이 곡 역시 ‘내사랑 매화’ 못지않게 멋지게 노래하고 싶다.
 
연예계의 수십만의 쟁쟁한 가수들 사이에서 지연, 학연도 없이 혼자 당당하게 활동하는 나의 모습을 보고 격려와 박수를 아끼지 않고 응원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가수로서 활동할 수 있는 시기가 길어야 10여 년 정도겠지만 최선을 다해 이름 석자 남길 수 있는 7전 8기의 주인공 가수 김성호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활동할 생각이다.
 
또한 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데 앞장서고 많은 장애우들과 어려운 사람들에게 귀감을 줄 수 있는 가수 김성호. 나누고 베풀고 용기를 줄 수 있는 가수 김성호가 되겠다는 각오를 다시 한번 해본다.
 
 

silverinews 성혁 news1@silverinews.com

<저작권자 © 실버아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