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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⑱ - 400번의 구타

기사승인 2019.02.11  13: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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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⑱ - 400번의 구타
 
 
  - 제작 : 1959년, 프랑스
  - 감독 : 프랑수아 트뤼포
  - 배우 : 장 피에르 레오, 알베르 레뮈, 질베르트 드와넬 외
  - 필름 : 흑백
  - 상영시간 : 98분
  - 수상 : 칸영화제 감독상
          뉴욕평론가협회 최우수 외국어영화상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가 사실주의를 추구하며 ‘네오리얼리즘(Neorealism)’이란 이름으로 영화의 한 흐름을 주도해 나갔다면 프랑스는 전통적인 영화 내레이션에 반기를 드는 ‘누벨바그(Neuvelle Vague)’운동을 통해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새롭게 써내려갔다.
 
‘누벨바그’는 ‘새로운 물결’ 즉, 뉴웨이브를 뜻하는 프랑스 단어다. 1957년경 신진 감독들이 중심이 되어 기존의 영화관습에 저항하는 한편 새로운 경향의 영화 만들기를 주창하며 태동했다. 그것은 감독이 작가로서, 영화에 적극 개입하여 주제의식을 불어넣어야 한다는 ‘작가주의 영화’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 중심에 섰던 인물들이 프랑수아 트뤼포를 비롯해 ‘네 멋대로 해라’의 장 뤽 고다르, ‘내 사랑 히로시마’의 알랭 레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의 루이 말 감독 등이다.
 
‘누벨바그’ 세대는 스토리보다는 표현에 중점을 두고 현실과 카메라의 직접적인 접촉을 중시했다. 사실적인 영상을 만들기 위해 당연히 스튜디오보다는 로케이션 촬영을 선호했고 솔직하고 독창적이며 혁명적인 영화언어들을 구사했다. 자연광, 즉흥적인 연출, 손에 들거나 어깨에 메는 핸드헬드 카메라를 활용한 트래킹촬영, 비약적인 전개,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와 감각적인 영상 등은 이전 아버지 세대의 영화에서는 볼 수 없던 참신한 것들이었다. 독립영화가 전무했던 시절, 자신의 개인사를 스크린에 옮기는 형식의 영화가 출현한 것도 이 즈음이다.
 
트뤼포의 ‘영적인 자서전’
 
‘400번의 구타(The 400 Blows)'는 같은 해 개봉한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와 더불어 ‘누벨바그’의 첫 번째 작품으로 인식되는 영화다. 감독의 ‘영적 자서전’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만큼 트뤼포 감독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 에피소드가 솔직하게 투영돼 있다. 따라서 ‘400번의 구타’를 이해하려면 먼저 트뤼포의 유년시절 삶부터 들여다보는 게 순서일 듯 싶다.
 
트뤼포는 1932년 파리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출생과 동시에 유모에게 맡겨졌고 여덟 살이 될 때까지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할머니가 죽자 그의 부모(아버지는 계부)는 마지못해 그를 데려오게 된다. 트뤼포는 학교를 자주 빼먹는 것이 일상이었고 거짓말도 잘했다. 열한 살에 가출한 뒤 공습대피소에서 잠을 자고 자잘한 도둑질로 연명했으며 소년원을 들락거렸다.
 
학교에 가는 대신 트뤼포는 도서관에서 발자크를 탐독했고 심부름꾼, 가게종업원, 창고지기, 공장용접공 등 그저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려운 삶을 유지했다. 그런 트뤼포에게 위안이 된 유일한 친구는 ‘영화’였다. 학교와 가정으로부터 소외된 소년 트뤼포는 틈날 때마다 극장을 찾았다. 암울한 현실의 그에게 영화는 유일한 탈출구이자 해방구였다. ‘시네마천국’의 어린 주인공 토토처럼 트뤼포 역시 영화의 세계에 흠뻑 매료되어 하루하루를 보냈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트뤼포는 계부의 타자기를 훔쳐서 마련한 돈으로 ‘영화중독자들’이라는 클럽을 조직한다. 그리고 그는 이 절도사건으로 소년원에 보내진다.
 
트뤼포가 수용된 빌지프 소년원은 교정시설이었지만 반은 정신병동이나 마찬가지일 만큼 열악한 곳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절망적인 곳에서 트뤼포는 미래 자신의 인생을 바꿔 줄 운명적인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당대 최고의 평론가 앙드레 바쟁이다.
 
지인의 소개로 트뤼포를 만난 바쟁은 기꺼이 트뤼포의 정신적인 아버지가 되어 주기로 하고 그를 소년원에서 꺼내준다. 바쟁은 트뤼포의 감춰진 재능을 알아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바쟁은 트뤼포에게 영화에 대한 깊은 이론을 가르치고 그가 평론가를 거쳐 감독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다. 훗날 트뤼포의 회고대로 바쟁은 트뤼포의 ‘유일하고 진정한 아버지’였다.
 
스물 셋이 되던 해 평단에 데뷔한 트뤼포는 줄곧 비타협적이고 철저하며 혹평을 일삼는 영화평론가로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언론은 그를 가리켜 ‘저널리즘의 젊은 깡패’ ‘말을 지저분하게 하고 참을 수 없는 자부심을 지닌 증오에 찬 악동’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수년간 영화제라는 관념 자체를 거부하기도 했으며 그 결과 트뤼포는 1958년 칸영화제로부터 추방당했다.
 
트뤼포는 1년 뒤 영화연출가로 변신하여 당당하게 컴백한다. 때 묻지 않은 감수성을 지닌 스물여덟 살 신예 감독의 데뷔작은 저예산 영화 ‘400번의 구타’였다. 위선과 거짓, 편견과 권위주의에 물든 어른들의 세계와 상처받은 어린 영혼의 아픔을 솔직하게 드러낸 ‘400번의 구타’는 즉각적으로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그동안 트뤼포에 대해 냉담한 시선을 보여 왔던 칸영화제조차 비평과 상업적 측면 모두에서 성공한 이 영화를 마냥 외면하진 못했다. 그해 칸영화제 감독상은 트뤼포의 것이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트뤼포가 잃어버린 자신의 유년시절을 찾는 작업의 ‘레디-고’를 외치던 촬영 첫날, 평생의 멘토이자 영원한 아버지였던 앙드레 바쟁이 40세 한창 나이에 백혈병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하루 세 편의 영화, 일주일에 세 권의 책, 위대한 음악을 담은 레코드판만 있으면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던 트뤼포. 영화적 낭만과 매혹으로 충만했던 이 천재는 ‘피아니스트를 쏴라(1960)’ ‘줄 앤 짐(1961)’ ‘화씨 451(1966)’ ‘아델 H 이야기(1975)’ 등 20여 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채 1984년 뇌종양에 걸려 52세 나이로 영면했다.
 
소외된 유년의 초상
 
이제는 ‘이 영화를 앙드레 바쟁에게 바칩니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하는 ‘400번의 구타’ 줄거리를 훑어보자.
 
열네 살의 앙뜨완 드와넬(장 피에르 레오)은 부모의 사랑과 이해를 받지 못하는 아이다. 학교에서는 문제아로 찍혀 늘 선생님의 구박을 받는다. 어느 날, 앙뜨완은 친구 르네(패트릭 오페이)와 함께 수업을 빼먹고 거리를 쏘다닌다. 그러다 앙뜨완은 엄마의 불륜현장과 맞닥뜨린다.
 
결석 이유를 묻는 선생님에게 앙뜨완은 엄마가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여 오히려 위로를 받는다. 그러나 고자질쟁이 친구 모리셰 때문에 거짓이 들통 난 앙뜨완은 교실로 찾아온 아버지로부터 뺨을 얻어맞는다.
 
그날 밤 앙뜨완은 ‘내 자신의 삶을 살겠다.’는 편지를 써놓고 가출한다. 그러나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앙뜨완은 밤새 거리를 배회하고 이른 새벽 우유 한 병을 훔쳐 허기와 갈증을 채운다. 다음 날 엄마가 학교로 찾아와 앙뜨완을 데려가고 모처럼 따뜻한 애정을 표현하지만 앙뜨완의 표정은 뜨악하기만 하다.
 
발자크의 소설에 심취한 앙뜨완은 발자크의 글을 인용하여 작문숙제를 제출했다가 표절했다는 수모만 당하고 낙제점수를 받는다. 게다가 발자크를 기리는 사물함에 켜 두었던 촛불로 인해 집에 큰 불이 번질 뻔 한다. 아버지로부터 야단을 맞은 앙뜨완은 다시 거리로 나온다. 앙뜨완은 절친 르네에게 “이젠 정말 집에 갈 수가 없어. 아버지는 날 군사학교로 보내버리려고 해.”라고 말한다. 앙뜨완은 르네의 집에 머물면서 시간을 보낸다. 둘은 극장에 가기도 하고 작은 도둑질도 한다.
 
돈이 필요해진 앙뜨완은 아버지 사무실에서 타자기를 훔치기로 한다. 르네가 망을 보는 사이 앙뜨완은 몰래 사무실에 들어가 타자기를 가지고 나온다. 하지만 이를 마땅히 처분할 방도가 없자 다시 타자기를 돌려주기 위해 사무실에 들어갔다가 앙뜨완은 관리인에게 들키고 만다.
 
매정한 아버지는 끝까지 자식을 용서하지 않고 앙뜨완을 경찰에게 넘겨버린다. 엄마 역시 아들을 포기한다. 절도 조서를 꾸민 앙뜨완은 결국 소년원으로 보내진다. 호송차에 실려가는 앙뜨완의 마른 얼굴 위로 한 줄기 굵은 눈물이 흘러내린다.
 
높고 어두운 소년원 건물로 들어선 앙뜨완은 수감절차를 거쳐 낯선 곳에서의 첫날밤을 보낸다. 그리고 앙뜨완은 문제아들만 모아 별도로 수감하는 소년원 보호관찰소로 다시 보내진다. 극도의 통제가 이뤄지는 그곳에서 아이들은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떤 아이는 시설을 탈출했다가 다시 잡혀오고, 앙뜨완은 식사시간에 빵을 먼저 뜯어먹었다는 이유로 귀싸대기를 얻어맞기도 한다.
 
앙뜨완은 진실을 말해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는 부모 때문에 아예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고 심리상담사에게 털어놓는다. 유아 시절 자신을 버린 일 때문에 엄마를 싫어하게 되었으며 엄마 역시 그런 자신을 성가신 존재로 여긴다고 말한다. 얼마 후, 엄마가 면회를 온다. 몇 마디 대화 중에도 엄마는 앙뜨완의 말은 일체 믿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엄마는 비웃음 서린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너 일하고 싶어 했지? 이젠 작업장으로 보내질 거다.” 비로소 앙뜨완은 자신이 완전히 버려졌음을 깨닫는다.
 
흙밭 위에서 소년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앙뜨완은 이 틈에 보호소를 탈출한다. 마구 내달리는 앙뜨완의 뒤로 그를 쫓는 호각소리가 울린다. 감시자를 따돌린 앙뜨완은 숲과 벌판을 가로질러 뛰고 또 뛴다. 얼마나 달렸을까. 호각소리는 멀어지고 쉼 없이 달려온 소년은 더는 갈 수 없는 바다와 마주친다. 소년은 모래해변을 계속 달려나간다. 그러나 물속에서 몇 걸음을 내딛던 소년은 이내 체념한 듯 발길을 돌린다. 그리고 카메라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소년. 표정 없는 그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히 채우며 영화는 끝난다.
 
‘누벨바그의 아이’ 장 피에르 레오
 
비행 청소년의 낙인이 찍힌 한 소년의 자유를 박탈하는 사회의 폭력성을 여과 없이 고발한 ‘400번의 구타’는 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의 존재를 영화계에 뚜렷이 각인시킨 작품이다. 프랑스 영화계에서 유년기의 삶을 주제로 다루는 것은 하나의 전통처럼 받아들여졌다. 트뤼포 자신이 존경했으며 ‘400번의 구타’를 통해 오마주를 바친 장 비고 감독의 ‘품행제로(1933)’ 멜빌 콕토의 ‘앙팡테리블(1949)’ 모리스 피알라의 ‘벌거벗은 유년기(1968)’를 비롯한 그 밖의 여러 작품들이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들로 사랑받았다. ‘400번의 구타’는 그 가운데서도 가장 도발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앙뜨완을 연기한 장 피에르 레오(1944~ )는 누벨바그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다. ‘400번의 구타’를 통해 영화에 데뷔한 레오는 이후 트뤼포는 물론이고 장 뤽 고다르, 자크 리베트 등 누벨바그의 여러 거장들과 호흡을 맞췄다. 트뤼포는 ‘400번의 구타’ 촬영 전 캐스팅을 통해 당시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던 14세의 문제아 레오를 발굴했다. 단 5분의 오디션 끝에 트뤼포는 주저 없이 자신의 어린 시절을 빼닮은 레오에게 배역을 맡길 것을 결정했다. 트뤼포는 문제소년 레오를 자신의 아파트에 데려와 숙식을 함께 하면서 영화작업을 했으며 결국 그의 멘토가 된다. 마치 지난 날 바쟁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레오는 ‘400번의 구타’ 성공 이후 앙뜨완을 주인공으로 한 일련의 영화에 계속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앙뜨완과 콜레트(1962)’ ‘도둑맞은 키스(1968)’ ‘부부의 거처(1970)’ ‘사랑의 도피(1979)’가 그것이다. 모두 트뤼포의 분신인 앙뜨완 드와넬이 영화의 주인공이었으며 소년원 생활 이후의 삶을 이야기하는 연작물이다. 일생동안 트뤼포가 만든 일곱 편의 영화에 출연한 레오는 트뤼포의 진정한 페르소나(Persona)였다. 누벨바그의 태동과 함께 출현하여 현존하는 누벨바그의 분신인 그는 2016년 칸으로부터 명예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고, 2017년에는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관객들과 만나기도 했다.
 
슬프고도 도전적인 라스트신
 
좋은 영화들이 그렇듯 ‘400번의 구타’ 엔딩 역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트뤼포는 소년원을 탈출하는 소년의 모습을 긴 호흡의 롱테이크로 잡아낸다. 가쁜 숨을 내쉬며 달리고 또 달리는 소년의 모습이 침묵 속에 1분 넘도록 이어진다. 그리고 더이상 갈 수 없는 바닷가에서 멈춰선 소년의 얼굴은 정지된 프레임 속으로 '줌-인(Zoom-In)'하여 들어오다 갑자기 멈춰 선다.
 
비정한 어른들에 의해 막다른 길로 내몰려진 앙뜨완. 밀려오는 파도에 떠밀리듯 되돌아서는 소년의 얼굴에는 복잡한 심경이 묻어난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년의 표정이 정면으로 클로즈업되는 순간 객석에서는 희미한 탄식이 터진다.
 
탈출구 없는 세상의 끝에서 무언의 웅변이라도 하는 듯한 소년의 무표정한 얼굴로 영화는 끝나지만 이 슬프고도 도전적인 라스트가 주는 충격과 깊은 울림에 누구도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한다. 마치 둔기에라도 맞은 것처럼.
 
 
▶ 덧붙이기 ------------------------------------------------------------------------------
 
제목 ‘400번의 구타(les 400 coups/the 400 blows)’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다. 프랑스어 ‘coup’의 의미가 ‘충격’ 또는 ‘타격’이라는 뜻을 가진 영어의 ‘blow’와 유사해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직역해 갖다 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coup’는 ‘갑작스런 행동’ ‘일이 닥치다’ ‘소동을 겪다’는 뜻도 있다. 영화에서 매를 단 세 대만 때리는 것을 감안하면 ‘400번의 구타’는 좀 무시무시한 표현이다. 따라서 ‘les 400 coups'는 ‘너무 많은 일이 닥치다’ 또는 ‘정신없이 많은 소동을 겪다’ ‘어리석은 짓으로 엉망진창이 되다’ 등의 관용적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게 중론이다. 참고로 일본은 이 영화 제목을 ‘어른들은 알아주지 않는다’로 달았다고 하니 나름 멋지지 않은가.
 

silverinews 진고개 신사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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