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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㉚ - 무셰트

기사승인 2019.06.11  11: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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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㉚ - 무셰트
 
 
  - 제작 : 1967년, 프랑스
  - 감독 : 로베르 브레송
  - 배우 : 나딘 노르티에, 마리아 카르디널 외
  - 필름 : 흑백
  - 상영시간 : 78분
 
 
 
 “내가 없으면 그들은 어떻게 될까? 마음이 너무 아파. 돌이라도 든 것처럼”- 어두운 성당에 힘없이 기대어 앉은 한 중년여인의 무거운 독백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무셰트(Mouchette)'는 프랑스의 한 시골마을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한 소녀의 일상과 비극적 종말을 그려낸 1960년대 걸작 중 한편이다. 독백을 하는 여인은 영화의 주인공 열네 살 소녀 무셰트의 엄마다. 독백을 끝낸 여자가 어두운 화면 속으로 사라지는 오프닝은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예감케 한다.
 
흔히 ‘가슴이 미어진다’는 표현을 쓰지 않나. 영화 ‘무셰트’가 딱 그렇다. ‘침묵의 미학’이 돋보이는 로베르 브레송 특유의 연출-짙은 아픔의 흔적을 새기되, 어떤 동요나 악악거림 없이-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절제된 영상과 사운드만으로 흑백영상 위에 프린트하듯 묵묵히 찍어내는 감독의 건조한 감성과 냉정한 시선은 관객의 심금을 울리다 못해 아예 가슴을 찢어놓는다.
 
영화는 어린 소녀의 너무나도 힘겨운 일상과 예기치 못한 사고, 엄마의 죽음, 그리고 자살이라는 암울한 주제를 다룬다. 그러나 감독은 억지로 관객의 눈물을 짜내려 애쓰지 않는다. 값싼 동정을 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주인공 소녀의 행동을 보면서 ‘뭐 저런 못된 것이 다 있나’ 욕하게도 만든다. 대신 곳곳에 파편처럼 배치한 시각적 이미지와 사운드의 메타포를 통해 비극의 서사를 극대화시킨다.
 
너무나 무거운 삶의 무게
 
프랑스 시골마을에 사는 열네 살 소녀 무셰트(나딘 노르티에). 그녀는 모두의 무관심과 가난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듯 힘겨운 삶을 살아간다.
 
무셰트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만큼 어린 나이이지만 집안 살림은 오로지 그녀의 몫이다. 태어난 지 6개월밖에 안 된 동생을 돌보고, 등잔불을 입으로 불어 끌 만한 힘조차 없이 병석에 누워 꼼짝 못 하는 엄마(마리아 카르디널)의 간호, 아버지와 오빠가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고단한 일상을 위로하는 사람은 없다.
 
사방이 벽인 듯, 숨 막히는 삶 속에 갇힌 무셰트의 얼굴에서 어린애다운 웃음은 사라진지 오래다. 술에 빠져 사는 아버지는 그런 무셰트를 늘 구박만 하고 하나밖에 없는 오빠 역시 투명인간처럼 가족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등교하는 무셰트. 그녀는 남루한 옷차림에 유난히 커 보이는 나막신을 신고 다닌다. 나막신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들리는 파열음은 언제나 조용한 교실을 진동시킨다. 친구들은 물론이고 선생님마저 그런 무셰트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음악시간. 아이들이 합창을 하는 중에도 무셰트만은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는다.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지만 늘 자신감이 없는 무셰트는 화음을 잘 맞추지 못한다. 선생님은 그런 무셰트를 떠밀듯 앞으로 데리고 나와 그녀의 머리를 피아노 건반 위에 처박으며 노래를 부르라고 강요한다. 이내 눈물이 터지고 소녀는 아이들의 놀림감이 된다.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무셰트는 비탈에 숨어 아이들을 골탕 먹인다. 그녀는 깨끗한 옷을 입었거나, 좋은 가방을 들었거나, 머리를 예쁘게 꾸민 친구들에게 진흙뭉치를 던져 마음의 상처를 달랜다.
 
마을의 밀렵감시원 마티유(장 비몽)와 밀렵꾼 아르센(장 끌로드 질베르)은 쫓고 쫓기는 관계로서 늘 사이가 좋지 않다. 더구나 두 인물은 선술집에서 일하는 여급 루이자(마린 트리쳇)를 사이에 두고 사랑싸움을 벌이는 형편. 마티유는 루이자를 향해 적극적으로 구애하지만 유부남인 그에 대해 루이자는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다.
 
무셰트는 선술집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나 번 돈은 고스란히 아버지에게 바쳐지고 그 돈은 아버지 술값으로 지불된다. 어느 날,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끝낸 무셰트는 모처럼 놀이공원에서 범퍼카를 탄다. 마침 그곳에서 범퍼카를 타고 있는 한 소년과 눈이 마주친 무셰트. 소년이 탄 범퍼카와 무셰트의 범퍼카가 유독(아니, 의도적으로) 자주 부딪치게 되고 그럴 때마다 둘은 마냥 재밌어하며 즐거워한다(무셰트가 해맑게 웃는 것은 영화 내내 이 장면 단 한 번뿐이다).
 
무셰트의 표정이 모처럼 또래 어린아이의 천진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도 잠시. 범퍼  카에서 내린 소년과 소녀가 계속 눈을 맞추려 애쓰는 찰나, 갑자기 나타난 무셰트의 아버지는 소년이 보는 앞에서 무셰트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긴 뒤 등을 떠밀어 자리로 보내버린다. 소년 앞에서 창피를 당한 무셰트의 얼굴에 다시 눈물이 번져난다.
 
한편, 같은 장소에서 밀렵꾼 아르센과 루이자도 놀이기구를 타며 데이트를 즐긴다. 이 모습을 목격한 마티유는 심한 질투감을 느낀다. 주변 사람들도 마티유와 아르센 사이를 이간질하며 은근히 싸움을 부추긴다. 무셰트는 어른들의 대화 속에서 이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을 하게 된다.
 
허름한 옷차림에 헝클어진 머리, 달그락거리는 나막신을 끌고 학교에 온 무셰트는 오늘도 비탈 아래 숨어 친구들에게 흙덩이를 던진다. 친구들은 그런 무셰트에게 크게 대거리를 하지 않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언제나 그렇듯 길에는 무셰트만 홀로 남겨진다.
 
오늘따라 큰길을 놔두고 숲길을 달려 집으로 향하는 무셰트. 그런데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몰려오는 바람에 그녀는 큰 나무 아래로 몸을 피한다. 비와 바람은 쉽게 멈추지 않고 시간은 흐른다. 진창이 된 땅에 나막신이 박혀 걷기 어려워진 무셰트는 신발 한 짝을 버려두고 길을 재촉하지만 어느덧 사방은 어둠으로 덮여버린다.
 
그 시각, 마티유는 숲에서 덫을 놓고 있던 아르센을 발견한다. 루이자와의 관계로 감정의 골이 깊었던 마티유는 아르센과 결투를 벌인다. 둘은 치고받는 싸움을 벌이지만 여자 하나를 두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우는 자신들의 꼴이 우스웠는지 껄껄거리며 그냥 화해한다.
 
마티유와 헤어져 돌아오던 아르센은 나무 아래서 젖은 양말을 쥐어짜고 있는 무셰트를 보게 된다. 아르센은 그녀를 숲속 오두막으로 데려간다. 무셰트에게 술을 권하고 난로를 피워주며 몸을 녹이라는 아르센. 무슨 일인지 그는 무셰트에게 숲에서 자신을 보았다는 말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런 뒤 친절하게도 그녀의 신발을 찾아오겠다며 오두막을 나간다. 그리고 잠시 뒤 두 발의 총성이 울린다.
 
무셰트는 아르센을 따라 한밤중이 되어 마을 선술집으로 내려온다. 그곳에서 아르센은 자신이 마티유를 죽였다고 고백하며 자신의 알리바이를 위해 거짓말을 해줄 것을 거듭 요구한다. 무셰트는 진실을 말하라고 권하지만 그 순간 아르센은 간질발작을 일으킨다.
 
피와 거품을 토하는 아르센을 지켜보는 무셰트. 고통스러워하는 아르센의 모습에 연민을 느꼈을까. 아니면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자신에게 잠시나마 친절을 베푼 그에게 호감이 들어서였을까. 그녀는 아르센의 얼굴을 닦아주고 학교에서도 부르지 않던 노래까지 불러주는 모성애를 발휘한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아르센. “정말로 사람을 죽였냐.”는 무셰트의 질문에 그는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협박한다. 무셰트는 그런 아르센을 밀쳐내고 탁자 아래로 숨지만 이내 발각되고, 아르센은 그녀를 덮친다. 무셰트는 몇 번 저항하지만 이내 알 수 없는 감정에 끌려 그를 받아들인다.
 
새벽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무셰트. 울며 보채는 아기를 끌어안고 우유를 먹이는 그녀의 손등 위로 눈물이 떨어진다. 눈물로 밤을 지새운 무셰트는 간밤에 있었던 일을 엄마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때 어린 동생이 자지러지게 우는 바람에 무셰트는 엄마에게 미처 말을 하지 못한다. 잠시 뒤, 아기를 달래놓고 엄마의 침대로 가지만 그사이 엄마는 운명하고 만다.
 
다음날. 성당에선 무셰트 엄마의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린다. 무셰트는 어린 동생에게 먹일 우유를 가지러 집 밖으로 나온다. 식료품점 여주인은 무셰트를 불러 커피와 빵을 대접하며 위로하는가 싶더니 이내 무셰트의 가슴에 생긴 상처만 뚫어지게 바라본다. 사실 간밤에 아르센과 있었던 일은 이미 알려질 대로 다 퍼져나간 상태. 더러운 계집이라며 욕하는 주인여자 앞에서 무셰트는 빵을 집어던지며 상점을 나온다.
 
그런데 무셰트는 마티유와 마주친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마티유가 눈앞에 나타나자 무셰트는 놀란다. 밀렵행위로 체포된 아르센을 통해 간밤에 무셰트와 아르센이 같이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된 마티유와 그의 아내는 자세한 내막을 추궁한다. 돈을 줄 테니 이실직고하라는 어른들. 무셰트는 아르센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그 집을 뛰쳐나온다.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가는 무셰트를 다시 불러 세운 사람은 마을 장의사 할망구. 노파는 수의용 천과 함께 무셰트가 입을만한 드레스 몇 벌을 챙겨주며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늘어놓는다. 그런 노파가 못마땅한 무셰트는 “구역질나는 못된 늙은이.”라 중얼거리며 신발에 묻은 흙을 문질러 카펫을 잔뜩 더럽혀 놓는다. 노파는 그런 무셰트를 향해 “네 눈은 악에 물들었다.”며 꾸짖는다.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던 무셰트는 총소리를 듣는다. 총소리를 따라간 무셰트는 사냥꾼들에게 쫓기는 토끼를 목격한다. 포위된 토끼는 필사적으로 도망을 쳐보지만 이내 총을 맞고 숨이 끊어진다. 발버둥 치며 죽어가는 토끼를 빤히 쳐다보는 무셰트. 순간 그녀는 가련한 토끼처럼 자신도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숲길 비탈아래 연못에 다다른 무셰트는 노파가 건넨 드레스를 몸에 가져다 대본 후 연못을 응시한다. 곧이어 드레스를 온몸에 두르고 비탈을 구르는 무셰트. 그러나 소녀의 구름은 비탈 중간에서 멈춰버린다. 그때 길 건너편으로 트랙터 한 대가 지나가고 소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트랙터를 향해 손을 흔들지만 트랙터를 몰던 농부는 무심히 지나치고 만다.
 
소녀는 다시 비탈 위에서 구르기를 시도한다. 그러나 연못가 작은 나뭇가지들에 걸린 소녀의 몸은 더 이상 구르지를 못하고 멈춘다. 다시 위로 올라가 구르는 소녀. 이윽고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수면에는 작은 소용돌이가 퍼지고 연못은 이내 고요해진다.
 
가슴을 찢어놓는 엔딩
 
이제 소녀는 돌아오지 않는다. 감옥 같은 집, 그를 무시하는 선생과 친구들이 있는 학교, 그리고 위선을 가장한 어른들로 넘쳐나는 마을 어느 곳으로도. 자기파괴를 통한 구원을 찾아 나선 소녀는 숨 막히는 세상의 끝에서 스스로 익사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영화의 엔딩은 처절하다. 소녀는 자살하기 위해 비탈에서 구른다. 그런데 소녀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한다. 구르다 멈추고, 다시 구르고, 또 멈춘다. 그 순간은 신조차 소녀의 죽음을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로베르 브레송(1907~1999)감독은 완벽한 리얼리즘을 추구한 인물이다. 영화 ‘무셰트'는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1937년)을 각색한 것이지만 사실적 표현을 위해 감독은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영화를 완성했다.
 
‘그만의 독특한 문체’란 '파편화'한 몽타주- 이를테면 커피를 타고 설거지를 하는 무셰트의 손, 나막신을 신고 물웅덩이의 흙탕물을 튀기는 그녀의 신경질적인 발, 어린 동생을 안고 우유를 먹이는 그녀의 슬픈 가슴언저리, 죽어가는 토끼를 응시하는 그녀의 무심한 눈동자, 트랙터를 향해 힘없이 뻗는 팔 등- 신체 일부분의 클로즈업 쇼트를 통해 인물이 지닌 감정의 깊이를 표현하는 테크닉을 말한다.
 
또 하나는 사운드, 즉 현장음이다. 영화는 시종 소녀의 신경질적인 나막신 소리와 트럭의 엔진소음, 간헐적으로 울리는 성당의 종소리, 사냥꾼의 총소리 등을 강조해서 들려준다. 대신 배우의 대사는 침묵에 가까울 정도로 절제한다. 쌓여있던 고요함을 종종 깨우는 사물의 사운드는 감정전달을 위한 효과적인 장치로 기능한다. 이것이 ‘브레송 스타일’이다.
 
브레송의 영화들은 대체로 우울하고 비관적이다. 그리고 매우 직설적이고 무자비하다. 그는 전문배우를 선호하지도 않으며 화려함이나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관객의 섣부른 감정이입도 차단한다. 억지로 관객을 감동시키려 구걸하지 않으며 불쌍한 주인공의 편이 되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주인공 무셰트의 눈빛을 보라. 그녀는 열네 살 어린이의 순수함을 지닌 소녀이지만 때론 ‘나도 알건 다 안다’는 식의 경멸을 담은 눈빛을 쏘아내는 당돌한 아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무셰트에게 쉽게 공감하지 못하지만 한편으로는 대놓고 못된 계집애라고 욕하지도 못한다. 이것 모두 브레송의 계산된 연출의 힘이다.
 
어른들은 비행 청소년이나 문제아를 보면 사랑으로 감싸 안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이 정작 내 자식과 가까이 지내거나 이웃으로 이사 오면 그땐 백팔십도 달라진다. 그게 곧 어른들의 위선이다. 무셰트는 그런 어른들의 위선에 익사했다.
 
영화는 무셰트의 자살로 끝나지만 그녀의 죽음 위로 흐르는 곡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성모의 노래’다. 그 음악을 통해 관객은 무셰트가 비로소 구원과 안식을 얻었으리라는 희망을 품는다. 과연 소녀는 따뜻한 세상을 찾았을까.
 
 

silverinews 진고개 신사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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