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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㉛ - 밤의 열기 속에서

기사승인 2019.06.21  10: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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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㉛ - 밤의 열기 속에서
 
 
  - 제작 : 1967년, 미국
  - 감독 : 노먼 주이슨
  - 배우 : 시드니 포이티어, 로드 스타이거 외
  - 필름 : 컬러
  - 상영시간 : 109분
  - 수상 :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남우주연․각색․음향․편집상
 
 
 
 2016년 제88회 아카데미 영화제의 화두는 ‘화이트오스카’, 즉 흑백 인종갈등이었다. 아카데미 위원회가 그해 남녀 주․조연상 후보를 지명하면서 단 한 명의 흑인배우도 명단에 올리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것도 2년 연속으로. 흑인사회는 술렁였다. 윌 스미스, 덴젤 워싱턴, 스파이크 리 등 유명 영화인들은 영화제 보이콧을 시사했다. 파문은 크게 확산됐다.
 
한참 거슬러 올라간 1964년의 제36회 아카데미 시상식. 대놓고 흑인을 차별하고 멸시하던 그 시절, 배우 시드니 포이티어가 흑인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다. 백인 주류사회에서, 그것도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엄혹한 시기에 스스로 차별과 편견의 높은 담을 허문 포이티어는 할리우드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입지전적 인물로 기록된다.
 
1927년생으로 올해 92세가 된 포이티어는 할리우드의 전설이자 흑인배우들의 진정한 멘토다. 포이티어 이전에 할리우드에서 주연을 맡은 흑인배우는 없었다. ‘들의 백합(Lilies Of The Field)'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그는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의 히어로로 우뚝 서며 흑인사회의 상징적 인물이 됐다. 에디 머피, 윌 스미스, 덴젤 워싱턴, 모건 프리만, 사무엘 잭슨, 포레스트 휘테커, 제이미 폭스 등 오늘날의 쟁쟁한 흑인 스타들은 포이티어의 발자국을 따라온 후계자들이다.
 
오늘 ‘이야기로 감상할’ 영화는 포이티어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밤의 열기 속에서(In The Heat Of The Night)’다. 한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놓고 백인 경찰과 흑인 형사가 첨예하게 대립하지만 사건을 해결해 가는 과정 속에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우정을 나누게 된다는 스토리다. 인종차별의 광풍이 채 사그라지지 않은 당시로선 꽤나 파격적인 설정과 충격적 영상으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낯선 마을에 나타난 흑인 형사
 
1960년대 초 미시시피주의 작은 마을. 한낮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새벽 3시 무렵, 마을을 순찰 중이던 경관 샘(워렌 오츠)은 피를 흘린 채 죽어있는 시신 한 구를 발견한다. 사망자의 신원은 마을 외곽에 공장을 짓기 위해 이곳에 와 있던 외지인 콜버트. 그는 두개골이 함몰된 상태로 죽었으며 소지품이 털린 상태다. 목격자는 없다.
 
샘은 기차역에 홀로 앉아 있는 흑인 남자를 살인용의자로 체포한다. 반듯한 정장차림에 여행 가방 하나를 소지한 남자는 어디를 봐도 범죄자의 용모가 아니지만 2백달러 가량의 현금을 지녔으며 그의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강제 연행된다.
 
잡혀 온 사내의 이름은 버질 팁스(시드니 포이티어). 그는 어머니를 만나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새벽 기차를 기다리던 중 때아닌 봉변을 당하게 된 것. 마을 치안책임자인 길레스피(로드 스타이거)는 대뜸 “어떤 흉기를 사용했느냐.”며 팁스를 아예 범인 취급한다.
 
길레스피는 팁스가 지닌 현금을 문제 삼는다. 흑인은 많은 현금을 지닐 수 없다며 깔보는 길레스피에게 팁스는 “내가 번 돈”이라고 대꾸한다. 그러자 길레스피는 “이건 내가 벌어들이는 것보다도 많은 돈이야, 어디서 생겼나!”라고 다그친다. 팁스는 그제야 자신의 신분을 밝힌다. “나는 경찰이요.”
 
팁스의 신분증을 보고도 길레스피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팁스는 자신의 상관에게 전화를 걸어보라며 장거리 전화비를 지불하겠다고 말한다. 길레스피는 어이가 없는지 “당신이 비용을 낸다고? 얼마나 벌길래?”라며 역성을 낸다. “주급 162달러 39센트요.” 그것은 시골 경찰서 우두머리인 길레스피의 주급보다도 많은 액수. 백인인 자신보다 돈을 더 많이 버는 팁스의 존재에 부아가 치민 길레스피는 더 화를 낸다.
 
통화 결과 확인된 팁스의 정확한 신분은 필라델피아 경찰국 소속 살인사건 전담형사. 필라델피아 경찰국은 살인사건 전문가인 팁스의 도움을 받을 것을 조언하지만 배알이 뒤틀린 길레스피는 거절한다.
 
호기롭게 거절은 했지만 정작 사건 해결에 자신이 없는 길레스피는 은근히 팁스에게 시체를 한번 살펴보지 않겠냐는 말을 건넨다. 그러나 팁스는 단칼에 거절한다. “왜!” “난 기차를 타야 하오.” “기차는 정오까지는 출발하지 않아. 왜 안 된다는 거야!” “당신이 직접 보면 되잖소.” “난 전문가가 아니니까․․․.” 길레스피는 결국 자존심을 굽히고 만다.
 
사체검안을 위해 시신안치소로 들어가는 두 사람. 길레스피는 시신을 살펴보지만 뭐 아는 게 있나, 곧바로 팁스에게 공을 넘긴다. 시신을 살핀 팁스는 놀라운 추리력으로 사망시각을 추정해낸다. 팁스의 과학적 논리에 할 말이 없어진 길레스피는 팁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지원해 주기로 마음먹는다.
 
그 무렵. 용의자로 추정되는 한 사내가 숲으로 도주한다. 경찰의 추격을 뿌리친 용의자는 산을 내려와 미시시피강 다리 위를 질주하지만 길목을 지키고 있던 길레스피에 의해 체포된다. 검거된 백인 용의자의 이름은 하비. 그는 죽은 콜버트의 지갑을 소지하고 있었다.
 
한편 사망자의 아내 콜버트 부인이 경찰서를 찾는다. 때마침 용의자를 잡아 돌아온 길레스피는 득의양양해 한다. 팁스는 검시결과 서류를 내놓지만 길레스피는 이제 그런 것은 볼 필요도 없어졌다며 거드름을 피운다.
 
반면 체포된 하비의 신체 특징을 살핀 팁스는 그가 범인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콜버트는 오른쪽 두부를 강타당해 사망했으나 하비는 왼손잡이였기 때문. 하비는 콜버트의 지갑을 주웠을 뿐이며 경찰에게 잡히면 살인죄를 뒤집어쓸까 봐 겁이 나 도주한 것이라고 진술한다.
 
머쓱해진 길레스피는 검시결과 서류를 다시 달라고 요구하지만 이번에는 팁스가 거절한다. 길레스피는 팁스를 유치장에 가두고, 그 안에서 하비를 만난 팁스는 ‘돌로어’라는 여자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 뒤 풀려난 팁스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역으로 향한다.
 
길레스피와 팁스의 다툼을 지켜본 콜버트 부인은 팁스를 더 신뢰하게 된다. 부인은 시장을 찾아가 팁스에게 사건을 맡기지 않으면 시장과 길레스피를 해고하도록 압력을 넣겠다고 말한다. 시장의 종용을 받은 길레스피는 하는 수없이 역으로 달려간다. 부글거리는 속내를 감추고 팁스에게 더 머물러 줄 것을 부탁하는 길레스피. 그러나 마음에 상처를 받은 팁스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똥줄이 탄 길레스피는 “콜버트의 공장이 완공되면 직원의 절반이 흑인으로 채용될 거야. 범인을 못 잡으면 공장은 세워질 수 없어. 공장은 흑인들을 위해서 꼭 필요해.”라는 말로 팁스의 마음을 돌려놓는다.
 
탐문수사를 펼치던 팁스는 콜버트 공장이 완공될 경우 목화농장을 경영하는 ‘엔디 코트’라는 자가 가장 큰 불이익을 당하게 될 거란 사실을 알게 된다. 흑인 인부들이 공장으로 옮겨가면 엔디 코트의 농장은 노동력 손실로 타격을 받기 때문이다. 팁스는 그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다.
 
팁스와 길레스피는 목화농장을 방문한다. 흑인을 노예처럼 부리는 엔디 코트는 뼛속 깊이 흑인에 대한 편견을 지닌 인물. 그는 팁스의 존재 자체를 깔본다. 엔디 코트는 간밤의 알리바이를 묻는 ‘건방진 흑인’ 팁스의 뺨을 후려갈긴다. 이에  질세라 팁스도 엔디 코트의 뺨을 힘껏 갈긴다. 난생처음 흑인에게 뺨을 맞은 엔디 코트는 황당하다는 듯 길레스피를 바라보며 “뭔가 조치하라.”고 소리치지만 어느덧 팁스와 한통속이 된 길레스피는 묵살한다. 분노로 부들거리는 엔디 코트를 뒤로하고 둘은 농장을 벗어난다.
 
이날의 일은 큰 파장을 몰고 와 길레스피의 지위까지 위협하게 된다. 팁스를 마을에서 몰아내자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시장은 그 자리에서 팁스를 사살하지 않은 길레스피를 꾸짖는다. 길레스피는 팁스의 안전을 우려해 마을을 떠나라고 충고하지만 팁스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 백인들은 자경단을 결성해 팁스를 죽이려하고 길레스피는 사지에 몰린 팁스를 구해낸다.
 
그런 와중에 길레스피는 샘 경관의 계좌에 6백 달러가 넘는 돈이 입금된 사실을 알게 되고 이번에는 그를 용의자로 체포해 유치장에 가둔다. 팁스는 헛다리를 짚었다고 말하지만 길레스피는 요지부동이다.
 
그런데 마침 돌로어라는 여자(팁스는 유치장에서 그녀에 관한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의 오빠가 그녀와 함께 경찰서로 들이닥친다. 그녀의 오빠는 샘 경관이 자신의 여동생을 유혹해 임신시켰다며 난리를 피우고 돌아간다. 이 사태를 계기로 사건의 실마리는 엉뚱한 곳에서 풀린다.
 
팁스는 마을에서 불법 중절수술 영업을 하는 노파의 집을 방문한다. 마침 돌로어도 오빠 몰래 중절수술을 하기 위해 산파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마을 샌드위치 가게 점원 랄프가 있다. 팁스는 마침내 살인사건의 전모를 알아내게 된다. 사연인즉, 돌로어를 임신시킨 랄프가 중절수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콜버트를 살해한 뒤 돈을 강탈했으며 그 죄를 경관인 샘에게 덮어씌우려 했던 것이다.
 
한편 돌로어의 오빠 퍼디는 여동생의 치부를 알고 있는 흑인을 처단하기 위해 혈안이 된 상태. 퍼디와 그의 친구들은 팁스의 뒤를 밟아 산파의 집까지 온다. 그곳에서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 퍼디는 랄프를 죽이려고 덤벼들다가 오히려 랄프가 쏜 총을 맞고 즉사한다. 그 사이 팁스는 랄프를 체포한다.
 
다음날. 기차역으로 들어서는 팁스와 길레스피. 처음 팁스를 보았을 때 ‘보이(boy)’라고 부르며 그를 조롱했던 길레스피가 이번에는 친절하게도 팁스의 가방을 들어주며 배웅하고 있다. “고맙네. 잘 가게,” “잘 계시오.” 두 사내는 짧은 인사로 작별한다.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며 팁스의 건강을 당부하는 길레스피. 팁스가 미소로 화답하자 길레스피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진다. 잠시 후 팁스를 태운 열차는 미끄러지듯 역을 빠져나간다.
 
인종을 초월한 두 남자의 우정
 
‘밤의 열기 속에서’는 미스터리 추리물 성격의 범죄수사 드라마이지만 그보다는 변화의 시대를 거부하는 백인들의 인종차별 의식과 그 벽을 뛰어넘어 신뢰를 쌓아 가는 남자들의 이야기다. 차별과 갈등으로 시작한 두 남자의 사이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티격태격하다 서서히 화해와 우정의 관계로 바뀐다.
 
영화는 1960년대 초반의 흑인 차별정책, 그중에서도 그 정도가 가장 심했던 미국 남부 백인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964년 미국에서 민권법이 통과된 이후에도 흑인에 대한 차별은 공공연히 저질러졌다. 흑인과 백인은 같은 학교를 다닐 수 없었고 열차, 식당, 호텔 등의 출입을 제한 받았다. 화장실도 분리되었고 심지어 수도꼭지, 커피포트를 같이 쓸 수 없었다. 그런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밤의 열기 속에서’는 상당히 혁명적인 영화가 아닐 수 없다.
 
반듯하고 지적이며 냉철한 흑인 형사의 등장은 그 자체만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시추에이션이다. 반면 삐딱한 모자, 채신없이 씹어대는 추잉검, 튀어나온 배, 개기름이 흐르는 얼굴, 논리도 빈약하고 비과학적인 추리로 일관하는 백인 경찰 우두머리의 대비는 백인들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기에 충분했다. 과감한 표현을 불사한 노만 주이슨 감독에게 경의를.
 
인상적인 장면도 적지 않다. 가장 도발적인 신(scene)은 목화농장 주인 엔디 코트와 팁스가 상대의 뺨을 때리는 장면. 문제의 이 컷으로 시드니 포이티어는 한동안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밤의 열기 속에서’는 1968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졸업’ 등 쟁쟁한 후보를 물리치고 작품상, 각색상, 남우주연상, 음향상, 편집상 등 5개 부문을 휩쓸었다.
 
존 볼의 동명소설(1965년 발표)을 각색한 탄탄한 플롯과 빼어난 연기, 진보적인 주제, 감독의 파격적인 연출이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낸 것이다. 음악도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한몫 거들었다. 무더운 남부의 끈적이는 공기를 뚫고 나직이 흐르는 주제가는 리듬 앤 블루스 거장 퀸시 존스와 가수 레이 찰스의 합작품이다. 다만 영화 막판 갑작스럽게 범인이 드러나는 구조는 좀 허술해서 아쉬움으로 남는다.
 
남우주연상은 포이티어가 아닌 로드 스타이거 몫이었다. 자존심 센 백인 경찰 길레스피 역의 스타이거 연기는 충분히 상을 받을 만큼 훌륭하다. 흑인 앞에서 자존심을 굽히는 그의 연기는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그러나 포이티어가 주연상 후보로 거론조차 안 된 것은 두고두고 논란거리였다.
 
시드니 포이티어가 흑인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날(1964년)로부터 38년이 흐른 2002년.  제74회 아카데미 영화제의 남녀주연상은 덴젤 워싱턴과 할 베리의 차지가 된다. 덴젤 워싱턴은 포이티어 이후 첫 흑인 남우주연상 수상자이며, 할 베리는 사상 최초의 흑인 여우주연상 수상자다. 이날 객석에는 그들이 상을 받는 모습을 회한 어린 표정으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다름 아닌 시드니 포이티어였다. 그 또한 같은 날 아카데미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
 
시상대에 오른 노배우는 할리우드에서 유색인종으로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보다 먼저 활동했던 선배 흑인 배우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명한 뒤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앞서간 이들의 어깨에 올라앉은 것뿐입니다.” 겸손만큼 스스로를 존귀하게 만드는 게 또 있을까. 지적이며 품위 있는 언행, 절제된 연기로 한 시대를 풍미한 시드니 포이티어. 그는 진정 살아있는 전설이다.
 
 

silverinews 진고개 신사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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