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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㊼ - 정복자 펠레

기사승인 2019.12.01  11: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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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㊼ - 정복자 펠레
 
  
  - 제작: 1987년, 덴마크·스웨덴
  - 감독: 빌 어거스트
  - 배우: 막스 폰 시도우, 펠레 베네가르드 외
  - 필름: 컬러
  - 상영시간: 157분
  - 수상: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영화가 끝나면 왠지 모르게 터져 나오는 탄식. 가슴에 돌이 얹힌 듯 마음은 무겁지만, 그래도 희망의 한쪽 문을 열어주는 결말이 있기에 작은 위안을 얻는다.
 
‘정복자 펠레(Pelle The Conqueror)'는 총칼을 휘두르며 큰 땅덩어리를 차지하는 모험 활극이 아니다. 축구 이야기는 더더욱 아니다. 인간의 영혼을 울리는 북유럽의 동화 같은 이 이야기는 19세기 말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어린 나이에 이민선에 몸을 실은 한 소년의 눈물과 좌절, 고난과 도전의 행로를 기록한 자전적 성장영화다.
 
영화 ‘정복자 펠레’는 덴마크의 저명한 사회주의 작가 마르틴 안데르센 넥쇠(1894~1954)가 쓴 동명의 4부작 대하소설 중 ‘1부 유년시절’을 각색한 것으로, 작가가 실제 겪은 유년의 체험을 사실적인 영상으로 그려낸 명작이다.
 
감독은 덴마크가 낳은 세계적인 명장 빌 오거스트(1948~ ). 그는 대문호의 원작을 베이스로 한 탄탄한 시나리오와 보는 이의 눈을 마비시킬 만큼 아름다운 영상, 심금을 울리는 음악은 물론이고 명배우 막스 폰 시도우와 갓 데뷔한 소년 펠레 베네가르드의 탄성을 자아내는 연기 앙상블에 힘입어 인생의 역작을 탄생시켰다. 이 작품으로 빌 오거스트는 칸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 덴마크 영화제 8관왕 등 생애 최고의 업적을 달성한다.
 
19세기 말 북유럽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생생히 묘사한 이 작품은 식민지, 전쟁과 분단을 겪으며 고단하게 살아온 우리의 과거를 떠올리게 할 만큼 정서적으로 묘한 동질감을 보여준다. 무기력한 아버지, 어머니의 부재, 어린 나이로는 차마 극복하기 힘든 현실, 계급사회의 횡포, 그리고 청운의 꿈을 안고 집을 떠나기까지 여러 면에서 그렇다.
 
‘정복자 펠레’는 전체적으로 소년의 성장과정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지만 이 이야기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수많은 이 시대의 어른들을 위한 성장드라마라고 할 수도 있겠다.
 
희망 없는 삶 앞에서
 
1877년. 가난에 찌든 늙은 아버지 라세 칼슨(막스 폰 시도우)과 여덟 살 먹은 그의 아들 펠레 칼슨(펠레 베네가르드)은 스웨덴 이민자들을 짐짝처럼 실은 배에 실려 덴마크 보른홀름섬에 도착한다. 어린 펠레는 ‘돼지고기에 건포도를 넣고 빵에 버터를 발라먹으며 아이들은 하루종일 놀 수 있는 곳’이라는 아버지의 말을 단단히 믿으며 희망을 품는다.
 
일꾼을 구하는 사람과 이민자들이 뒤섞인 부둣가는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한다. 그러나 덩치만 컸지 늙어버린 라세는 선택을 받지 못한다. 아무 일자리나 덜컥 물지는 않겠다고 큰소리치던 라세는 금세 풀이 죽는다. 해가 기울자 부둣가의 사람들은 모두 빠져나간다. 텅 빈 광장에 달랑 남은 라세와 펠레. 실망한 라세는 선술집에서 한잔 걸치고 비틀거린다.
 
뒤늦게 스톤농장의 근로감독 해리(에릭 파스케)가 나타나 라세와 펠레를 일꾼으로 데려간다. 둘의 일 년 연봉은 합쳐서 100 크로네. 너무 형편없는 임금이지만 더는 이것저것 가릴 형편이 못되기에 라세와 펠레는 마차에 몸을 싣는다.
 
근동에서 가장 규모가 큰 스톤농장의 지주 콩스트럽(악셀 스트로비)은 콜레르 가문의 상속녀와 결혼하여 부자가 된 자로, 타고난 바람기 때문에 곳곳에 자신의 사생아를 뿌려놓을 만큼 막나가는 인간이다. 때문에 남편의 사랑을 잃은 그의 아내(아스트리드 빌라우메)는 술에 빠진 채 매일 밤마다 야수처럼 울부짖어 농장의 분위기를 음침하게 만든다.
 
수십 명의 인부가 일하는 대 농장에 도착한 라세와 펠레는 건초더미가 전부인 외양간 한쪽 구석에서 첫날밤을 보낸다. ‘아이들은 하루종일 놀 수 있는 곳’이라던 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고된 노동이 시작된다. 형편없는 음식과 불결한 환경, 쥐꼬리만 한 임금, 게다가 불만은 조금도 입 밖에 내놓을 수 없는 그들의 처지는 흑인 노예나 별반 다를 게 없을 만큼 열악하다.
 
라세는 젖소와 외양간 관리를, 펠레는 소몰이 일을 하게 된다. 펠레는 농장 근처에서 만난 또래 소년 러드(그 역시 콩스트럽의 사생아다)에게서 소몰이 기술을 배우고 덴마크 말도 배운다. 그러나 라세는 언어소통이 되지 않아 구박을 당하는 등 현실적응에 애를 먹는다.
 
심성이 착한 펠레는 고양이에게 소젖을 먹이다 해리의 수하인 수습감독에게 바지가 벗겨진 채 매를 맞는 수모를 당한다. 아들이 맞는 광경을 빤히 보면서도 라세는 감히 어쩌질 못하는데, 젊고 패기 넘치는 일꾼 에릭(비욘 그라나스)이 나타나 수습감독을 혼내준다.
 
매의 고통과 창피함으로 부들거리는 펠레. 그가 아버지에게 수습감독을 꼭 혼내달라고 부탁하자 라세는 그러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정작 수습감독이 코앞에 나타나자 아버지는 꼼짝도 못하고 비굴한 태도로 그의 앞에 조아린다.
 
벽 틈으로 그 모습을 똑똑히 목격한 펠레는 좌절한다.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듬직한 존재로, 자신의 영웅으로 여겨왔던 펠레의 믿음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다.
 
무력한 아버지의 모습에 상심한 펠레에게 에릭은 새로운 멘토로 떠오른다. 에릭은 같은 노동자 처지이지만 늘 당당하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울 줄 아는 인물이다. 그는 돈을 모아 희망의 땅으로 불리는 미국에 건너갈 꿈을 키우고 있다.
 
“사람들이 그러던데 정말 미국으로 달아날 거예요?” 펠레의 물음에 에릭은 “달아나다니, 난 자유로워지고 싶은 거야. 그때를 기다리는 거지.”라고 답한다. 에릭은 2년 더 일한 뒤에 뱃삯이 모아지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넓은 세상으로 나갈 계획이다. 펠레가 같이 가고 싶다고 하자 에릭은 그의 청을 흔쾌히 들어주며 외친다. “그래, 2년 후 눈이 녹으면 미국으로 가자. 위대하고 신기한 세상을 정복하자.”
 
그러는 사이, 펠레는 학교에 입학한다. 펠레는 이주민인 자신을 왕따 시키는 친구들이 싫어지고 희망 없는 농장 생활에 염증을 느낄 때면 혼자 바다로 나온다. 펠레는 넓은 바다를 보며 미래의 삶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는다. 그런데 이듬해 가을. 뜻하지 않은 사고로 스톤농장은 시끄러워진다.
 
평소 고분고분하지 않은 에릭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근로감독 해리는 에릭에게 야근명령을 내린다. 정당한 휴식을 방해하는 감독에게 에릭이 불복하자 해리는 그동안의 임금을 지불하지 않겠다며 도발한다. 그러자 격분한 에릭은 쇠스랑으로 해리를 공격한다. 그런데 소동에 놀란 말이 흥분하여 날뛰는 바람에 에릭은 머리를 크게 다친다. 불행하게도 피를 흘리고 쓰러진 에릭은 그날 이후 갓난아기 지능을 가진 백치로 변한다.
 
어느 날. 바람 부는 해변을 지나 숲을 가로지르던 펠레는 잠시 쉬었다 가라며 집안으로 불러 따뜻한 차를 내주는 올슨 부인(카렌 베게너)의 온정을 받게 된다. 차를 사이에 두고 펠레와 부인은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죽은 엄마와 홀아비인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부인의 남편이 1년 전 바다에 나가 실종된 뒤 지금껏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까지.
 
집에 돌아온 펠레는 아버지에게 올슨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늙고 지쳐 이제는 자신과 펠레를 돌봐 줄 아내가 필요했던 라세는 올슨 부인의 집을 방문한다. 서로의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나눈 끝에 두 사람은 남은 인생을 함께 보내기로 한다. 라세는 이제는 가정이 생기게 되었다며 희망에 부푼다.
 
한편, 여전히 여자만 보면 껄떡대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 농장주 콩스트럽은 코펜하겐에서 온 아내의 조카딸마저 범한다. 밤마다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며 울부짖던 콩스트럽 부인은 그날 밤 잠자리에 든 남편의 성기를 절단하는 것으로 화끈하게 복수한다.
 
하루라도 빨리 올슨 부인과 합치고 싶은 라세는 몸이 닳는다. 작은 집 한 채와 암소도 한 마리 가지고 있는 올슨 부인이야말로 라세가 노후를 편히 보내기에 안성맞춤인 상대다. 그런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올슨이 어느 날 갑자기 버젓이 살아서 돌아온다. 새 삶이 날아간 라세는 크게 실망해 대들보에 목을 매려 한다.
 
실의에 빠진 라세는 그날부터 술에 빠진다. 그런 아버지를 보는 펠레의 가슴도 미어진다. 펠레는 ‘올슨 부인의 뻐꾸기들’이라며 자신과 아버지를 조롱하는 친구들 때문에 학교에도 가질 않는다.
 
수업 도중 의자에 앉은 채로 죽은 선생님의 장례식이 열리던 날. 교장 목사의 아들이 또 펠레를 놀려댄다. 화를 못 참은 펠레는 목사 아들을 흠씬 패준다. 그 일로 마을에서 추방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라세와 펠레는 콩스트럽을 찾아 도움을 요청한다.
 
고자가 된 콩스트럽은 이제 핫바지 신세가 되어 하는 일 없이 누워서 시간만 보낼 뿐 모든 실권은 아내가 행사하는 꼴이다. 평소 펠레를 대견스럽게 여겨온 마담 콩스트럽은 수습감독을 내보내고 후임에 펠레를 임명해 버림으로써 라세의 고민을 간단하게 해결해준다.
 
수습감독이 돼 흰 유니폼과 검정모자, 가죽장화를 신은 펠레를 보며 라세는 흡족해한다. 이제 모든 고생은 끝났다는 듯 라세의 어깨에는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펠레는 더는 쓸모없어진 에릭이 해리 감독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나가는 모습을 목격한다. 비로소 펠레는 자신이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직감한다. 펠레가 스톤농장에 온지도 어느덧 2년이 흘렀다. 펠레는 미련 없이 수습감독 지위를 포기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날 밤. 펠레는 길 떠날 채비를 하고, 그동안 자신이 돌봐온 소들을 일일이 쓰다듬으며 작별한다. 라세는 아들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려보지만 펠레의 의지는 확고하다. 늙고 기력 없는 라세는 농장에 남고 펠레는 떠난다.
 
떠나는 아들에게 자신의 낡은 셔츠와 장화, 성경책을 건네는 라세. 펠레는 눈 쌓인 벌판 위에서 아버지의 굽은 어깨와 포옹하며 작별한다. 농장으로 되돌아가던 아버지는 아쉬운 듯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본다. 그 사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달려나가는 펠레의 모습은 눈 덮인 대지 위의 작은 점이 되어 까맣게 멀어진다.
 
소년, 새장을 벗어나다
 
러닝타임이 2시간 40분에 달하지만 결코 지루할 틈이 없는 영화 ‘정복자 펠레’는 어린 펠레와 늙고 힘없는 아버지 라세, 그리고 그들 주변의 여러 인물이 뒤엉켜 벌어지는 일들을 유장하게 그려낸 대서사시다.
 
희망을 찾기 어려운 조국 스웨덴을 떠나 덴마크로 흘러들어온 어린 펠레의 눈에 비친 당시의 시대상은 참으로 암담하고 우울하다. 냄새나는 마구간에서 비루한 음식으로 연명하며 희망 없는 하루하루를 견뎌야 하는 일상만큼 펠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세상 최고의 남자로 여겼던 아버지의 나약한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자식을 매질한 사람에게조차 비굴할 수밖에 없는 처지의 아버지 라세는 계급사회의 희생양이다. 라세는 하루만이라도 휴일을 갖고 침대 맡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셔보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다. 그러나 재혼의 기회가 사라지면서 그는 소박한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노예 같은 삶을 이어간다.
 
악랄한 농장감독의 횡포에도 말 한마디 못하는 무력한 일꾼들. 그런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부당한 조치에 항의를 하던 에릭은 펠레의 새로운 희망이 되지만 우연찮은 사고로 영원한 불행을 맞는다. 에릭에게서 넓은 세상의 존재, 도전과 정복의 야망을 배우게 된 펠레는 현실에 안주할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서커스단원이 되어 세상 곳곳을 누비겠다며 도망쳤던 동무 러드(트로셀 아스무센)를 박람회장에서 우연히 만나고, 희망을 꿈꾸던 에릭이 용도 폐기되는 순간을 목격함으로써 펠레는 큰 자각을 얻게 된다.
 
펠레가 숨 쉬던 봉건시대의 비합리적 부조리도 잔인하게 그려진다. 콩스트럽 농장의 하녀 안나(크리스티나 톤퀴비스트)와 이웃 지주의 아들 닐스(라스 시몬센)는 서로 사랑하여 아이를 갖게 되지만 신분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태아를 물속에 유기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다. 안나가 감옥에 끌려가자 가책을 느낀 닐스는 난파된 배에 뛰어들어 선원들을 구하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씻는다.
 
빌 어거스트 감독은 19세기 말 덴마크 농장을 무대로 살아가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북유럽 전원 사계의 수려한 풍광 속에 절묘하게 녹여냈다. 황금빛 밀밭, 백설의 대지, 안개 낀 바다, 나무 끝을 흔드는 삭풍 그리고 은빛 눈보라···.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그림 같은 장면 사이로 소년 펠레의 힘겹고 고단한 일상이 하나둘 펼쳐지는데, 이게 사람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 놓는다.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 속에 그런 가슴시린 사연들이 숨어있었나 싶을 정도로 장면 하나하나에 눈물과 한숨, 탄식이 배어난다. 거기에 스테판 닐슨의 가슴을 파고드는 메인테마가 얹히면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큼 슬픔은 극대화된다. 영혼을 울리는 이 영화에 칸은 그랑프리로 화답했다(4년 뒤 빌 어거스트는 막스 폰 시도우가 출연한 ‘최선의 의도’라는 작품으로 또 한 번 칸 그랑프리를 거머쥐게 된다).
 
영화의 대미는 고통스런 이별을 동반한다. 구부정한 어깨의 아버지와 나누는 마지막 포옹. 눈밭에서의 이별 장면은 올해로 나이 90을 맞은 관록의 대 배우 막스 폰 시도우(1929~ )와 3천 대 1의 경쟁을 뚫고 막 오디션을 통과한 11세 소년 펠레 베네가르드(1975~ )의 세대를 초월한 불꽃 연기로 마지막 빛을 발한다. 그리고 영화는 눈 쌓인 너른 바닷가를 홀로 뛰어가는 펠레의 모습을 롱샷으로 비추는 것으로 대단원을 맞는다. 소년은 어느 바다, 어느 항구에 도착했을까. 열한 살 펠레의 슬픈 눈동자, 앙다문 입술이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silverinews 진고개 신사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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