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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③ 프로레슬링

기사승인 2020.06.29  15: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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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치기 한 방으로 세상 근심을 날려주다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장충체육관입니다. 지금부터 대한의 건아, 화랑의 아들 김일 선수의 인터내셔널 헤비급챔피언 타이틀매치를 중계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아나운서의 뜨거운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흐르는 순간 국민들의 눈과 귀는 일제히 TV와 라디오로 쏠렸다. 얼마나 흥분됐으면 서울에서 중계방송을 하는 아나운서조차 ‘고국에 계신 동포’라는 멘트를 날렸을까.
 
1960년대는 그야말로 프로레슬링의 황금기였다. 그리고 ‘박치기 왕’ 김일(1929~2006)은 그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일찍이 역도산(1924~1963)의 문하생으로 레슬링에 입문한 김일. 그는 춥고 배고프던 시절 국민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준 초인 같은 존재였다. 원자폭탄에 비유되는 그의 다이내믹한 박치기 한 방에 서양의 거구와 일본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나뒹구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국민은 마음에 쌓인 울분과 근심을 훌훌 날려버렸다. 유사 이래 김일 만큼 국민의 속을 시원하게 ‘뻥-’ 뚫어준 스포츠 스타는 없었을 것이다.
 
▲작렬하는 김일(오른쪽)의 박치기. 상대는 일본의 거인 레슬러 자이언트 바바.
 
전설의 이름, 역도산 김일 장영철 천규덕
 
한국의 프로레슬링은 역도산(본명 김신락) 이야기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함경남도 출신으로 1939년 조선씨름대회에서 우승한 후 일본으로 건너간 역도산은 스모 선수를 거쳐 1951년 프로레슬러로 변신했다. 그는 특기인 가라데 촙을 앞세워 덩치가 산만한 서양의 거한들을 쓰러뜨리며 패전 이후 실의에 빠져있던 일본인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웠다. 일본에 귀화한 한국인이었지만 ‘천왕 다음에 역도산’이라는 칭호가 붙을 만큼 그는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역도산의 3대 제자가 저 유명한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끼, 자이언트 바바다. 역도산의 호된 가르침 속에서 필살기인 박치기를 연마하며 세계타이틀을 차지한 김일은 그들 중 맏형 격이다. 1963년 스승 역도산이 야쿠자가 휘두른 칼을 맞고 수술 후유증으로 숨지자 미국서 활약 중이던 김일은 조국의 품으로 돌아와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1965년 6월의 일이다.
 
그때까지 불모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서 프로레슬링의 토대를 쌓고 있던 이는 장영철(1933~2006)이다. 아마추어 선수 출신인 그는 부산에서 수신되던 일본 TV방송을 통해 역도산의 경기를 지켜보며 프로레슬링에 대한 열정을 키우고 있었다. 1959년 가을, 마침내 장영철은 ‘당수의 달인’ 천규덕(1932~2020)과 함께 서울로 입성한다. 그 뒤 백드롭과 플라잉 킥, 넉4자 꺾기, 헤드 시저스 등 현란한 테크닉을 앞세운 장영철은 한국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하며 국내 프로레슬링의 일인자로 떠오른다.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흔히 말하듯, 무림의 세계에 두 명의 맹주는 존재할 수 없는 법. 김일이 귀국 두 달 만에 일본의 요시노 사토를 꺾고 초대 극동헤비급 챔피언에 오르자 지존의 자리는 ‘토종파’ 장영철에게서 ‘해외파’ 김일에게로 넘어간다. 굴러온 돌에 한방 얻어맞은 꼴이 된 장영철은 당황스러웠다. 곧 레슬링 계는 김일과 장영철이 이끄는 두 개의 파벌로 갈라져 반목하고 대립한다. 그러던 중 한국 레슬링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기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진다.
 
“레슬링은 쇼다” 폭탄발언
 
1965년 11월 27일 저녁. 8,500석 규모의 장충체육관은 관중들로 꽉 들어찼다. 이날 열린 5개국 친선 프로레슬링대회에서 한국챔피언 장영철은 일본선수와 맞붙었다. 상대는 무명에 가까운 오쿠마 모토시. 경기는 1:1의 박빙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3라운드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그만 오쿠마의 기술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일명 ‘새우꺾기’라 불리는 ‘보스턴 크랩’에 꼼짝없이 걸려든 장영철은 고통을 호소하며 매트를 두들겼다. 그러나 오쿠마는 봐줄 생각이 없었는지 계속 장영철의 허리를 비틀어 꺾었다.
 
그러자 링 사이드에 있던 장영철의 후배들이 우르르 링 위로 올라가 오쿠마를 집단 구타하기 시작했다. 병과 의자로 사정없이 두들겨 맞은 오쿠마는 코가 휘는 부상을 입으며 전치 2주 진단을 받았다. 경찰이 출동하고 경기는 중단됐다. 장영철과 그의 후배들은 경찰서로 끌려갔고, 다음날 신문에는 장영철이 “레슬링은 쇼”라고 폭로했다는 기사가 대서특필됐다.
 
장영철의 발언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동료선수들은 허탈과 자괴감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팬들도 깊은 충격에 빠졌다. 레슬링의 앞날은 수렁에 빠져버린 것만 같았다. 언론은 이날의 사태를 김일과 장영철의 파벌싸움이 불러온 촌극으로 보았다.
 
김일은 일본에서 선진리그를 경험한 바 있으며 국제적인 지명도,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 등에서 장영철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 또 박정희의 든든한 지원도 받고 있었다. 반면 장영철은 여러 면에서 김일에게 뒤쳐졌다. 결국 사면초가에 몰린 장영철이 이판사판의 심정으로 폭탄발언을 했을 거라는 게 당시 주요언론들의 분석이었다.
 
그러나 정작 장영철은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프로레슬링의 룰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왜곡이 개입된 것”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어쨌든 그날의 해프닝으로 장영철은 선수생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두 사람은 절교했다. 팬들은 물론이고 동료 선수들의 싸늘한 눈길을 피할 수 없었던 장영철은 배신자 소리를 들으며 거의 링을 떠나다시피 했다가 70년대 들어 잠깐 컴백하지만 과거와 같은 영화는 누리지 못한 채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쇼’ 발언으로 프로레슬링의 위상은 크게 손상됐지만 1967년 김일은 미국의 마크 루인을 물리치고 한국인 최초로 WWA 세계헤비급챔피언 왕좌를 차지했으며, 그의 활약 덕에 국내 프로레슬링은 변함없는 인기를 누리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박치기 한 방에 온 나라가 들썩
 
▲TV 수상기가 부족했던 시절, 온 국민은 만홧가게, 다방, 부잣집 거실 등에 모여 프로레슬링 경기를 보며 환호와 탄식이 교차하는 밤을 보내곤 했다.
 
당시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하늘을 찔러서 방송국은 매일 저녁 관련 프로그램을 편성할 정도였다. 그러나 1970년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TV수상기 보급률은 인구 100명당 1대 꼴이 채 되지 못했다. 그래서 프로레슬링 경기를 보려면 TV가 있는 다방이나 만홧가게, 또는 이웃의 잘사는 친구네 집으로 달려가야 했다. 빅매치가 있는 날 다방과 만홧가게, 전파사 앞은 항상 북새통을 이뤘고 경기장 일대는 암표상의 천국으로 변했다.
 
호랑이와 갓, 대나무, 곰방대 등 우리의 전통문양이 새겨진 가운을 걸친 김일이 등장하면 경기장에 운집한 관중과 TV·라디오 앞에 모인 팬들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리고 장내 아나운서 특유의 늘어지는 멘트. “홍코나아~ 신장 185센치이~ 몸무게 32관~ 따블류 따블류 에이 세계헤비급챔피어언~ 자랑스러운 대한의 건아~ 박치기 왕~ 기~미~일!”
 
이어지는 경기. 박치기에 겁을 먹은 외국선수가 주심의 눈을 피해 타이즈 속에 감춘 포크를 꺼내 김일의 이마를 사정없이 내려찍는다. 매트에 쓰러져 신음하는 김일. 관중은 김일을 연호하고, 이마의 피를 닦으며 일어선 김일의 반격이 시작된다. 그리고 회심의 박치기. 한쪽 다리를 들어 반동하듯 원을 그린 뒤 몸을 날려 가격하는 미사일급 박치기에 금발의 거구는 맥없이 나동그라진다. 찢겨나간 이마에 흰 수건을 두른 김일의 팔이 번쩍 들리는 순간 터져 나오는 환호. 비틀거리는 몸을 가눠 팬들에게 머리 숙여 답례하고 링을 내려가는 김일. 세상에 이보다 더 짜릿하고 황홀한 드라마가 또 있을쏘냐.
 
김일의 이마가 빛을 발할 때면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박치기’를 연호하며 세상 근심과 시름을 날려버렸다. 김일의 승전보가 있은 날은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잠을 못 이뤘다. 그런 흥분은 며칠이고 지속됐다. 놀이터든, 교실이든 아이들은 레슬링 이야기로 시간가는 줄 몰랐다. 어떤 녀석은 타이거 마스크 가면을 쓰고 보자기를 목에 두른 채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흉내를 냈고, 또 어떤 놈은 친구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헤드록을 구사했다.
 
그래서 어처구니없는 사고도 일어나곤 했다. 1970년 4월 5일 서울 상도동 공터에서는 동네 중학생과 초등학생들이 엉켜 프로레슬링 흉내를 내다 1명이 목 졸려 숨지는 일이 있었다. 어디 애들뿐이랴. 경기 관람 중 흥분해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어른들 소식도 심심찮게 들려왔으니 온 나라가 레슬링 광풍으로 몸살을 앓는 지경이었다.
 
화려한 기술과 몸을 사리지 않는 투지, 넘치는 쇼맨십으로 국민을 열광시켰던 스타들의 면모는 어디까지 기억할지 모르겠다. ‘알밤 까기’의 여건부, ‘백곰’ 우기환, ‘고릴라’ 이석윤, ‘거인’ 박송남, ‘풍차 돌리기’ 김기남, ‘반칙왕’ 조경수에 고태산과 홍무웅. 그리고 날렵한 동작으로 매트 위를 미끄러지며 카운트를 세던 심판 송학수.
 
기억에 남아있는 외국선수들도 여럿 있다. ‘인간 산맥’ 압둘라 부처와 ‘흡혈귀’ 브라쉬, ‘검은 마신’ 보보 브라질, ‘16문 킥(발 사이즈 384mm)’ 자이언트 바바, ‘백색 복면의 난폭자’ 더 디스트로이어,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 안토니오 이노키, 전화번호부를 맨손으로 찢던 ‘괴력맨’ 에이켄 하루카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펼쳤던 명승부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팬들의 뇌리에 남아 모락모락 추억을 일깨운다.
 
그랬던 프로레슬링이···
 
프로레슬링이 범국민적 스포츠로 성장하는 데는 박정희의 공이 컸다. 그는 패전국 일본의 경제부흥이 역도산의 신화와 행보를 같이하며 진화하는 과정을 눈여겨보았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로서는 스포츠가 지닌 집단 최면과 이미지 왜곡, 대중동원의 힘을 적극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게는 역도산처럼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는 영웅이 필요했다. 박정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일본으로 건너간 지 7년 만에 세계챔피언이 된 김일에게 꽂혔다.
 
김일을 불러들인 박정희는 전용체육관을 지어주고 후원금도 하사하는 등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정희의 심복인 박종규(경호실장)와 김종필(국무총리)이 차례로 김일 후원회장을 맡을 정도였다. 박정희는 또 김일의 고향인 전남 고흥군 금산면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특별지시를 내려 전기를 개통시켜줄 만큼 김일을 극진히 대우하며 프로레슬링 육성에 많은 공을 들였다.
 
▲향수를 자극하는 옛날 포스터.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고, 시인 유하의 표현대로 ‘박통시절, 박통 터지게 인기 있었던 프로레슬링’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비명횡사를 계기로 쇠락의 길을 걷는다. 박정희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박정희와는 달라도 크게 달랐다. 전두환은 국민 우민화의 일환인 3S(Sports, Screen, Sex) 정책을 펴면서 민속씨름, 프로축구, 프로야구를 활성화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프로레슬링에 지원되던 보조금을 모두 삭감하고 정동에 있던 김일체육관을 몰수하여 문화체육관으로 명칭도 바꿔버렸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그동안 우호적이었던 일본 프로레슬링계도 미국과의 연계를 우선시하며 우리와의 교류를 축소시켰다. 게다가 주한미군방송(AFKN)을 통해 미국 프로레슬링(WWF 레슬매니아)에 열광하기 시작한 팬들의 높아진 수준과 안목을 충족시켜야 하는 것도 숙제였다. 프로레슬링 1세대의 뒤를 잇는 스타급 선수를 양성하지 못한 현실도 도마에 올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실전을 방불케 하는 종합격투기가 붐을 이루면서 프로레슬링은 점차 설 땅을 잃어갔다.
 
김일 문하생인 이왕표와 역발산, 노지심 등은 프로레슬링 부흥을 위해 물심양면 노력했으나 이미 기울어진 배를 건져 올리기엔 역부족이었다. 프로레슬링의 화려한 봄날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41년 만의 화해
2006년 2월 8일 저녁. 경남 김해의 한 병원 안으로 휠체어를 탄 노인 한 명이 들어왔다. 5평 남짓한 좁은 병실로 들어선 그는 네댓 명의 환자들 틈에 섞여 있는 한 남자를 향해 다가왔다. 병상의 노인은 다름 아닌 장영철(73). 그리고 그를 찾아온 휠체어의 사내는 ‘박치기 왕’ 김일(77)이었다.
 
장영철은 파킨슨병과 중풍, 약간의 치매증상으로 입원 중이었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탄 김일 역시 박치기 후유증으로 거대결장증과 고혈압, 임파부종, 심부전 등의 질병을 앓고 있는 형편. 장영철이 외롭게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전해들은 김일은 “지금 만나지 못하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서울에서 먼 길을 마다않고 달려왔다고 했다.
 
“그때는 내가 철이 없었습니다.” 환자복을 입어 더욱 핏기가 없어 보이는 장영철이 어렵게 말을 꺼내며 손을 내밀었다. 그의 얼굴에 깊은 회한과 벅찬 감정의 순간이 교차했다. 김일 역시 목이 멘 듯, 떨리는 음성으로 “이제야 묵은 체증이 싹 가신 것 같다”며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한때 사각의 정글을 호령했으나 이제는 늙고 병들어 야윈, 평범한 노인으로 변해버린 두 사내는 그동안 가슴에 묻어둔 이야기를 나눈 뒤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장영철은 그해 8월에, 그리고 김일은 10월에 각각 유명을 달리했다. 다시 만나자던 두 사람의 다짐은 영원히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남고 말았다.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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