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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④ 라디오

기사승인 2020.07.13  16: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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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불 속에 숨어서 듣던 ‘전설 따라 삼천리’

‘여기는 서울방송국입니다. 에이치 엘 케이 에이(HLKA)', ‘기쁜소리사에서 제공하는 시보가 정오를 알려드립니다. 뚜-뚜-뚜-뚜~’, 이런 멘트를 기억하시는지. 기억에 없다면 시간을 조금 더 당겨서 이건 어떤가.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이제 가정으로 돌아갑시다’ 과거 라디오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던 소리들이다. 기억이 돌아온 독자라면 “맞아, 그랬지”라며 무릎을 치리라.
 
라디오는 이 땅의 국민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한 가장 친근한 문명의 이기 중 하나다. 우리는 일왕 히로히또의 항복 선언을 라디오에서 들었고, 이승만의 하야선언도 라디오로 들었다. 박정희의 5.16 쿠데타공약은 라디오를 통해 전국에 전파되었고, 1974년 복싱 세계챔피언 홍수환의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인터뷰도 라디오에서 들을 수 있었다.
 
▲저 안엔 작은 사람들이 들어있는 걸까?
 
라디오는 오락거리가 전무했던 시절, 그러니까 근대화시기를 지나 산업화와 현대화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국민들에게 웃음과 희망을 선물한 귀한 존재였다. 어린이들에게는 꿈과 모험을, 청년에게는 열정과 도전정신을, 어른들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로 다정했던 라디오. 오늘은 당신의 추억을 방울방울 떠올려줄 그 시절 라디오 세상으로 떠나보자.
 
1960년대는 라디오 전성시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라디오 방송이 시작된 것은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이 개국하면서부터. 방송국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때 우리나라 국민이 소유한 라디오는 275대에 불과했다. 반면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1,165대의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당시는 일본어가 중심이었으며 우리말 방송은 제 궤도에 오르지도 못했다.
 
일본이 물러간 뒤에도 생활은 여전히 궁핍했고 라디오는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일 뿐이었다. 당시 미군부대를 통해 나온 제니스 진공관 라디오는 무려 쌀 50가마 가격에 암거래되는 실정이었다. 1945년 22만 8천대에 그쳤던 전국의 라디오 현황은 1961년 말에 이르러 100만대를 돌파하게 되는데, 라디오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부터다.
 
1959년 11월 15일에 우리나라 최초의 진공관 라디오 <금성 A-501>이 출시된 바 있다. 15개의 진공관과 5인치 스피커를 장착한 이 라디오는 동동구리무와 럭키치약, 플라스틱사업으로 돈을 번 구인회가 1958년 설립한 금성사를 통해 내놓은 회심의 역작으로, 오늘날 가전 명가인 LG의 모태가 된 제품이다. 당시 87대가 생산됐으며 판매가격은 2만환이었다. 이는 대졸자 직원의 3~4개월 치 월급을 고스란히 모아야 살 수 있는 가격이었지만 당시 제니스, RCA, 필립스, 내쇼날 등 수입품 라디오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었다.
 
금성은 야심차게 진공관 라디오를 내놓았지만 국산부품의 낮은 품질 탓에 자주 소리가 끊기는 등 하자가 많았다. 당시 전력과 방송국 사정마저 열악하여 서울외곽에서는 잘 수신되지 않는 등 여러 문제가 노출되자 <금성 A-501>은 출시 5개월 만에 단종 됐다. 그러나 밀수품과 면세품 유통을 막아주는 정부의 정책과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정권 홍보를 위해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전개하는 바람에 금성은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 국내 최초의 진공관 라디오 ‘금성 A-501'
 
라디오 보급이 확대되면서 신흥 방송국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경성방송국 후신인 KBS가 홀로 분투하던 중 1954년 기독교방송(CBS)이 최초의 민간라디오방송으로 출범했다. 뒤이어 1961년 문화방송(MBC), 1963년 동아방송(DBS), 1964년 동양방송(TBC)이 속속 개국하며 경쟁체제를 구축했다. 그 결과 시대를 초월하여 회자되는 유명 프로그램들이 생겨났고 스타급 성우와 아나운서, 유능한 작가와 연출가, 스텝들이 줄줄이 탄생하는 등 라디오는 이후 10여년 가까이 최고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재치문답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라디오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연속극이 아닐까 싶다. 1946년 우리나라 최초 연속극 <똘똘이의 모험(김래성 원작)>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라디오 연속극은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장르가 됐다. 초창기 라디오 연속극은 동극(童劇) 또는 사극(史劇) 형태의 각색물이 많았으나 이후 성인 대상의 문학성 짙은 현대창작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연속극을 듣기위해 일찌감치 저녁밥을 지어먹은 뒤 온 가족이 라디오 앞에 둘러앉아 숨죽이며 극에 빠져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삼삼하다.
 
1956년 방송된 KBS드라마 <청실홍실>은 고정시간대를 확보하며 본격적으로 자리 잡은 첫 번째 연속극으로 꼽힌다. 젊은 연인들의 애틋한 사랑을 다룬 줄거리도 인기였지만 방송사상 처음으로 선보인 연속극 주제가도 폭발적인 반응을 불렀다. 조남사 작사, 손석우 작곡, 안다성·송민도 듀엣의 ‘청실, 홍실 엮어서~’로 시작하는 주제가를 모를 사람은 아마 없으리라.
 
<청실홍실>이후 인기 연속극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일제강점기 학도병으로 끌려간 조선인 청년 ‘아로운’의 이야기를 담은 <현해탄은 알고 있다>, 전쟁미망인과 대학생의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아낌없이 주련다>, 사장 집 딸을 사랑한 청년의 비극적 순애보와 이별을 다룬<떠날 때는 말없이>, 작가 김수현의 데뷔작인 <저 눈밭에 사슴이>를 비롯해 <동심초>, <이 생명 다하도록>, <능금이 익어 갈 때> 같은 수작들이 밤마다 안방을 파고들었다. 이들 연속극 대부분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청취자들을 다시 한 번 극장으로 불러냈다. 이밖에도 매일 아침을 상쾌하게 열어주던 KBS의 <즐거운 우리 집>, TBC의 <아차부인 재치부인>은 홈드라마의 전형을 보여주며 인기를 누렸고 DBS의 <정계야화>, TBC의 <광복 20년>등 정치를 소재로 한 드라마는 아버지 세대 청취자의 욕구를 만족시켰다.
 
연속극의 풍요는 자연히 인기 성우의 양산을 불러왔다. KBS 1기인 장민호, 구민, 민욱, 고은정을 비롯해 이창환, 신원균, 주상현, 천선녀, 최응찬, 유강진, 김현직, 장유진 등 목소리 하나만으로 청취자들을 웃기고 울리던 성우들은 영화배우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 최고의 스타였다. 그뿐이랴. 극본 조남사 한운사, 연출 이상만 고무송, 효과 차재완 김벌래처럼 연속극 말미면 빠짐없이 등장하던 유명 제작진 이름도 잊히지 않는다.
 
연속극 이외에도 드라마 형식을 띤 인기 프로그램이 여럿 있었다. 그중 늦은 밤이면 어김없이 찾아왔던 유기현의 ‘전설 따라 삼천리’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있는 전설과 설화를 소개하면서 선인의 슬기와 지혜, 효와 충, 삶의 교훈을 전해주던 이 방송은 1965년 시작돼 1983년까지 18년간 지속된 장수프로그램이다. 귀신 우는 소리, 산신령 나타나는 소리, 천년 묵은 구렁이 소리, 이무기와 지네가 싸우는 소리 등 기상천외한 효과음이 어찌나 소름 끼치도록 실감났는지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 오들오들 떨며 들었던 기억이 난다. 성우 유기현의 입담은 또 얼마나 구수했는지, 한번은 어느 시골노인이 그의 나이가 80쯤은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방송국으로 찾아갔는데 30대 젊은이라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
 
‘북한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보내드리는 <자유의 소리> 방송입니다’로 시작하는 대북방송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던 시절에는 북한의 실상을 풍자하는 <김삿갓 북한방랑기>가 전파를 타기도 했다. 1964년 5월 18일 시작돼 2001년 4월까지 무려 37년간 계속된 KBS의 대표 장수프로그램 <김삿갓 북한방랑기>는 풍류시인 김삿갓을 등장시켜 북녘 땅 곳곳을 여행케 하며 공산치하에서 신음하는 북한 동포들의 실상을 고발하는 4행시를 선보였다. ‘땅덩어리 변함없되 허리는 동강나고··· 어이타 북녘 땅은 핏빛으로 물들었나’라던 성우 오정한과 신원균의 한탄스런 목소리는 지금도 귓전을 맴도는 것만 같다.
 
▲‘재치문답’ 공개방송 장면.
 
한편, 매주 일요일 오후 온가족의 귀를 즐겁게 만든 <재치문답>은 ‘국민프로그램’이라는 명칭을 붙여줘도 무방할 만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공개 오락방송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던 사회 저명인사들의 수준 높은 지식과 재치, 유머로 청취자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재치문답>은 삼행시, 스무고개, 우문현답, 천문만답 등 여러 코너로 나뉘어 진행됐다. 출연자들은 제시된 단어를 가지고 ‘000은 000이라 푼다’며 입담을 과시하곤 했는데, 예를 들면 “라디오는 수도꼭지라 푼다. 왜냐하면 틀면 나오니까.” 뭐 이런 식이었다. 그런 센스만점 대답이 나오면 청취자들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곤 했다.
 
당시 출연했던 재치박사들의 이력도 다채로웠다. 한국남(산부인과 의사), 안의섭(시사만화가), 엄익채(은행가), 이연숙(방송인), 강소천(아동문학가), 신동헌(만화가), 정광모(여성운동) 등 유명 인사들은 허를 찌르는 촌철살인의 입담을 자랑했고 장기범, 최세훈 아나운서의 친근감 넘치는 진행도 인기에 한몫을 거들었다.
 
동아방송은 <재치문답>에 맞설 프로그램으로 <유쾌한 응접실>을 편성했었다. 전영우 아나운서가 진행을 맡은 이 방송은 우리사회의 내로라하는 유명석학들을 패널로 초청해 각자의 사상과 철학세계, 시대의 현안을 유쾌한 재담으로 푸는 교양오락 프로그램이었다. 1963년 동아방송 개국과 함께 시작하여 방송국 폐국 때까지 계속되었다. 특유의 언변과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던 천재 국문학자 양주동 박사는 이 프로그램의 간판이었다.
 
심야방송 시대와 TV의 출현
 
1960년대 중반에는 음악 감상실이 대세였다. 당시 서울 중심가에는 <디쉐네> <메트로> <카네기> <세시봉> <뉴월드> <라 스카라> 등 여러 개의 음악 감상실이 포진해 있었으며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라디오 음악방송도 인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DJ(디스크자키)라는 명칭을 가진 전문 음악방송인이 등장해 팝송을 소개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동아방송 PD였던 최동욱은 자신의 팝송프로그램 ‘탑튠쇼’를 맡은 어느 아나운서의 영어발음이 마음에 들지 않자 직접 방송진행자로 나섰다. 그 바람에 최동욱은 ‘국내 1호 DJ’ 칭호를 얻게 됐다.
 
최동욱이 'DJ 1호'의 기록을 가졌다면 이종환은 최장수 DJ로 기억되는 베테랑이다.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왠지 연인과 진한 커피 한 잔을 나누며 못다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싶군요.”라는 식의 닭살 돋는 멘트로 유명했던 이가 이종환이다. 최동욱과 이종환, 그리고 수필가 피천득 선생의 아들로도 유명했던 피세영은 당시 DJ트로이카를 구축하며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이들의 뒤를 이어 이양일, 박원웅, 김광한, 김기덕, 황인용 등이 팝송 방송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특히 1965년 동아방송이 새벽 2시까지 방송시간을 연장한 것을 신호로 각 방송국들은 심야방송체제에 돌입하여 자정 이후까지 음악프로그램으로 진검승부를 벌였다. 이장희가 진행하던 <0시의 다이얼>의 <In the year 2525>, 문화방송 <별이 빛나는 밤에>의 <Merci cheri>, 동양방송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La reine de saba>, 이종환의 달달한 목소리가 빛났던 <밤의 디스크 쇼>의 <Adieu, Jolie candy> 등 밤을 지배했던 팝 프로그램의 시그널 음악은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을 추억에 빠지게 한다.
 
이들과는 좀 다르지만 하루를 마감하는 늦은 시각에 일상의 느낌과 소회를 담담하게 정리하며 팝송과 가요, 경음악을 함께 내보냈던 김세원의 <밤의 플랫폼>도 잊을 수 없는 음악방송이다. 풀벌레 소리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기차의 기적, 그에 오버랩 되는 폴 모리아 오케스트라의 시그널 뮤직 <이사도라>가 인상적이었던 그 프로그램. 통금 전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며 듣기도 했던 <밤의 플랫폼>의 최대 강점은 진행자 김세원의 우수를 머금은, 듣는 이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는 감성 만점 목소리였다. <밤의 플랫폼>은 밤 10시 이후에 방송된 프로그램이었지만 실은 아침 9시에 녹음해 둔 것을 내보내는 형태였다. 밤 분위기를 담기위해 스튜디오를 일부러 어둡게 꾸며놓고 녹음한 것으로 알려진다.
 
전 국민의 사랑 속에서 황금기를 구가하던 라디오방송은 1970년대를 맞으며 TV라는 복병을 만난다. 그러자 대중매체의 주인공 자리는 TV가 곧 차지할 것이라며 라디오의 종말을 예고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게다가 1980년에는 전두환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정책에 따라 동양방송과 동아방송이 타 방송사에 흡수 통합되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라디오는 무너지지 않았다.
 
위기를 맞은 방송계는 시대의 변화에 맞춰 청취자를 세분하고 특정계층을 공략하는 편성으로 청취자에 다가갔다. 임국희의 <여성살롱>과 그 후신인 <여성시대>처럼 여성층을 겨냥한 프로그램이 성공을 거뒀으며, <가로수를 누비며> <푸른신호등>같이 운수종사자를 위한 프로그램은 꾸준히 진화하며 <교통방송>의 원형이 되기도 했다. 특히 마이카 시대의 도래는 라디오방송 발전의 전환점이 됐다. 자가용 족이 급격히 늘어났으며 그들 차량에 장착된 오디오시스템이 대중과 라디오의 접촉을 훨씬 용이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도 라디오의 위상은 흔들리기는 커녕 더 탄탄해지는 모양새다. 과거의 방송이 ‘듣는’ 라디오에 머물렀다면 요즘은 청취자 곁으로 ‘찾아가는’ 라디오가 대세다. 방송국들은 이런 트렌드에 적응한지 이미 오래다. 지금은 첨단 영상시대다. 우리는 미처 보지 못하는 영역의 것들까지 세세하게 보여주는 놀라운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라디오는 우리에게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결코 채워줄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이지 않는 것의 매력’이 주는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 그것이야말로 21세기 라디오가 지닌 위대한 힘이다.
 
 
#오늘은 왠지
 
참 오랜만이다. 심야방송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춰본지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귀에 익은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1970년대를 풍미했던 미국의 남매 듀오 <카펜터스>의 <Yesterday once more>다. 카렌 카펜터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에 착 감기듯 다가왔다.
 
When I was young/I'd listened to the radio/Waiting for my favorite songs/
When they played I'd sing along/It made me smile/···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기다리며 라디오를 들었죠. 
음악이 나오면 나는 노래를 따라 불렀고, 그건 나를 미소 짓게 했어요.)
 
대학시절, 학교 앞 다방 뮤직 박스에 신청해 들었던 그 노래다. 그 뒤로 한참의 세월이 흘렀다. 스키터 데이비스, 레이 찰스, 짐 모리슨, 밥 딜런 등 내 청춘의 밤을 책임져 주었던 목소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시절 나팔바지 뒷주머니에 도끼 빗을 꼽고 한껏 폼을 잡던 변두리다방 DJ 형님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엄습하는 이 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핥고 지난 듯, 깊은 상실과 허무에 빠진 내 육신은 길고 긴 불면의 밤을 방황하며 걷는다. 오늘은 왠지······.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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