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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⑤ MSG(인공조미료)

기사승인 2020.07.27  13: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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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법의 가루’ 그 불편한 진실에 대하여

남편: 마누라 음식은 언제든지 맛이 있거든! 참 재주떵어리란 말야!
아내: 아이, 날마닥 놀니시네. 제 층찬마시고 아지노모토를 층찬허서요.
다른 집의 풍경.
남편: 이걸 어터케 먹으란 말야! 오늘두 또 식당에 가서 먹을 수박게 없지. 
경을 칠 놈의 노릇!(밥상을 뒤집어엎는다.)
아내: 아이그머니!(놀라며 얼굴을 가린다.)
 
위 상황은 1936년 6월 25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조미료 ‘아지노모토(味の素, あじのもと)’ 광고의 삽화 속 대화 내용이다. 음식에 조미료를 첨가해 입맛을 돋우어준 아내를 칭찬하는 남편과 그렇지 못한 가정의 상황을 그럴싸하게 표현하고 있다.
 
100년 역사 ‘아지노모토’의 탄생
 
흔히 ‘미원’으로 통칭되는 인공조미료(MSG)는 1908년 동경제국대학의 키쿠나에 이케다 교수가 세계 최초로 만든 ‘아지노모토’에서 출발한다. 키쿠나에 교수는 다시마를 우려낸 국물에서 나는 특유의 맛이 단맛, 신맛, 짠맛, 쓴맛과는 확연히 다른 제5의 ‘어떤 맛’이라는 단서를 얻고 그 정체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마를 끓이고 졸이기를 반복한 결과 글루탐산이라는 물질의 존재를 확인했으며 그것이 음식의 맛을 좋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글루탐산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풍미를 ‘감칠맛’이라고 정의한 키쿠나에는 이 글루탐산에 나트륨을 결합시켜서 ‘글루탐산염(MonoSodium Glutamate=MSG)’을 만들었다. 그가 나트륨을 첨가한 까닭은 글루탐산염이 글루탐산보다 물(국물)에 잘 용해되었기 때문이다. 또 결정체로 환원하기가 쉬워 상품화에 유리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생산특허를 출원한 키쿠나에 교수는 이렇게 만들어진 조미료에 ‘아지노모토’란 이름을 붙였다.
 
세계 최초로 MSG 생산특허권을 쥐게 된 일본은 식민지 한국과 대만 등지로 자국의 발명품을 전파했다. 일본은 아지노모토 홍보를 위해 대대적인 캠페인을 펼쳤다. 악극단을 동원하여 가두홍보에 나섰고 일간지에 엄청난 물량의 광고를 게재하며 우리 국민의 눈과 귀를 홀린 것이다. 무용가 최승희, 기생 문예봉은 아지노모토의 인기 모델이었다.
 
아지노모토의 출현은 전통 장맛에 길들여진 우리 국민의 식탁 문화에도 큰 변화를 불러왔다. 일본은 광고를 통해 마치 아지노모토가 ‘마법의 가루’인 양, ‘어떤 음식이든 이것만 있으면 모두 맛있게 만들 수 있다’면서 이(李) 왕가에서도 사용하는 조미료라는 주석을 꼭 붙였다. 근대여성이라면 ‘문명적 조미료’인 아지노모토를 꼭 써야 한다거나, 아지노모토를 쓰지 않는 사람은 미개한 인간이라는 식으로 은근히 소비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방법도 써먹었다.
 
▲1936 국내 일간지에 실린 스즈키상점의 아지노모토 광고.
 
가정주부 공략에 이어 일제는 대중음식점 매수에도 공을 들였다. 특히 평양지역 일대의 냉면집은 일본기업의 첫 번째 타깃이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여름이 되면 냉면집들은 고기육수를 끓여 보관하거나 백김치, 동치미를 담그는 일로 엔간히 골머리를 앓았다. 실제로 여름철엔 냉면을 먹고 식중독을 일으키는 사람도 많았다. 그런 판국에 아지노모토가 간단한 방법으로 고기국물 맛을 연출해 준다니 냉면집들은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한국인의 맛이라고 자부했던 평양냉면이 아지노모토 육수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엔 실망을 금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아지노모토는 일본의 근대 식문화를 식민지에 완벽하게 접목시킨 사례로 꼽힌다. 비슷한 예가 건빵이다. 건빵은 만주사변 무렵 일본 군국주의가 비상식량으로 활용하기 위해 서양의 크래커를 변형시켜 만든 것이었는데 씁쓸하게도 우리 국군의 주요 간식으로 오래 전부터 공급됐다.
 
어쨌거나. 아지노모토의 조선반도 공략은 대성공을 거뒀다. 담배에 인이 박히면 쉽게 끊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국민은 알게 모르게 요놈의 ‘흰 가루’ 없이는 살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태평양전쟁이 종반을 향해 치닫던 1943년 7월, 전시 식량통제로 대두와 소맥분을 제대로 확보할 수 없게 된 일본은 아지노모토 조선사무소를 철수하기에 이른 것이다.
 
아지노모토를 밥에 뿌린 뒤 왜간장에 비벼 먹을 만큼 한국사람 입맛을 길들여 놓은 ‘마법의 가루’가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사람들은 당황했다. 물론 일본으로부터 적은 양의 물량이 수입되긴 했지만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하는 형편이었고 대신 고가의 밀수품이 국내에 유입됐다. 그러다 광복을 맞았고 6.25전쟁을 겪었다.
 
토종 조미료 ‘미원’의 탄생
 
1955년 봄이다. 훗날 미원그룹의 총수가 되는 임대홍(1920~2016)은 독자적인 힘으로 국민조미료를 만들어보겠다는 포부를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조미료 제조기술을 습득한 임대홍은 한국으로 돌아와 1956년 1월 부산 대신동에 150평 규모의 ‘동아화성공업주식회사’를 세웠다. 그리고 ‘신선로표 미원(味元)’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국산 ‘미원’을 보고도 ‘아지노모토’라고 부르는 사람이 더 많던 시절이었다. 빨간색 신선로 그림에 하얀 글씨를 새긴 ‘미원’의 디자인은 오리지널 아지노모토와도 흡사해서 소비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갔고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그러자 임대홍은 1962년 회사 이름을 아예 ‘미원’으로 바꿨다. 부엌 찬장 안에 ‘미원’ 없는 집이 없을 만큼 호응이 좋아서 도매상들은 공장 앞에 줄을 서 기다리다 물건을 받아가곤 했다. 그런 인기를 타고 ‘미원’은 설탕, 밀가루와 더불어 최고의 명절선물로도 각광받았다. 이들 세 품목을 당시 ‘삼백(三白)’이라 불렀는데, 가정주부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하는 선물이었다.
 
▲1958년 10월 한 잡지에 실린 ‘미원’광고. 모델은 무용가 김백봉이다.

‘미원’이 히트하자 유사제품도 많이 출몰했다. 신한제분의 ‘선미소’와 ‘닭표 맛나니’ 제일식품 ‘미성’ 영생산업 ‘육미소’ 신앙촌 ‘7000번 미소’ 진미식품 ‘진미’ 삼양식품 ‘맛그만’ 제일물산 ‘일미’ 한양산업 ‘미영’ 등은 그 당시 각축을 벌인 조미료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미원’의 열풍을 견뎌내지 못하고 모두 단명했다. 다만 1963년 원형기업의 ‘미풍’을 인수한 제일제당(CJ)만이 시장의 주도권을 놓고 긴 세월 미원과 피 말리는 레이스를 펼치게 된다.

 
라이벌 등장과 MSG 유해론의 대두
 
미원과 제일제당이 치른 조미료 전쟁은 인구에 회자될 만큼 유명한 사건이다. 당시 동네 구멍가게에서 좋은 진열대를 차지하기 위해 두 회사 영업사원은 난투극을 불사할 만큼 앙숙이었다. 미원의 독주체제에 도전장을 내민 제일제당은 화끈한 경품행사로 소비자를 유혹했고 미원도 그럴 때마다 맞불작전을 폈다. ‘미풍’이 무채 칼과 고무장갑을 경품으로 내세우면 ‘미원’은 고급 비치볼과 조미료 병으로 맞섰다. 한 치도 양보 없는 싸움이 계속됐다. 그러다 저 유명한 ‘스웨터-금반지 경품사건’이 터졌다.
 
▲1970년 벽두를 장식한 ‘미풍’과 ‘미원’의 경품 광고.
 
1970년 1월 31일, 제일제당은 ‘미풍’ 빈 봉지 5매를 보내는 1만 명에게 3천 원짜리 스웨터를 증정한다는 광고를 실었다. 그러자 ‘미원’이 곧바로 반격했다. 그런데 이게 완전 메가톤급이었다. ‘미원 빈 봉지 5장으로 순금반지 하나!’ 게임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경품전략이 사전 누설돼 제일제당이 되치기를 당했다는 뒷말이 무성했으나 진위는 알 길 없다. 일설에 의하면 대결에서 이긴 ‘미원’ 측에서는 여럿이 승진한 반면 ‘미풍’에서는 관련 임직원 몇몇이 옷을 벗었다고 한다. 당시 두 회사의 경쟁이 얼마나 과열됐었는지 상공부와 치안국이 경품행사를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1988년 장선우가 감독하고 안성기 이혜영이 주연으로 나온 영화 ‘성공시대’는 이때의 에피소드를 소재로 만든 것이다.
 
후폭풍은 거셌다. 경품전쟁 이후 ‘미풍’은 ‘미원’의 그늘에 가려 영원한 2인자에 머문다. ‘여인표 미풍’ ‘백설표 미풍’ ‘국자표 미풍’ 등으로 상표를 바꿔보고 별짓을 다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오죽했으면 삼성 창업주 이병철마저 자서전에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게 골프, 자식, 그리고 미원”이라는 글을 남겼을까. 반면 미원은 발전을 거듭한다. 전성기의 미원은 삼성이나 현대, 금성(LG의 전신)보다도 국민성금을 더 많이 내는 기업이었다. 일반명사인 ‘미원’은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불렸고, 상점에선 조미료 대신 ‘미원’ 달라고 하면 다 통했다.
 
그 시절 미원 이미지를 알리는 도심의 네온사인도 유명했다. 1968년쯤이었던가. 기차에서 내려 해 저문 서울역 광장을 빠져나올라치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길 건너 옥상의 ‘아이디얼 미싱’ 네온 광고였는데, 재봉틀 바늘이 상하로 움직이며 박음질하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바로 그 옆에 ‘신선로표 미원’ 네온사인이 있었다. 오색찬란한 네온기둥이 밤하늘 아래서 쥘부채처럼 좌우로 펴졌다 접히는 그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그렇게 잘 나가던 ‘미원’도 뜻밖의 복병을 만나 고전을 겪었다. 1980년대에 일기 시작한 인공조미료 유해론이 그것이다. 경제발전으로 생활수준이 나아지면서 사람들이 건강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였는데 ‘MSG=화학조미료’란 인식이 문제였다.
 
특히 1990년대 초 럭키(현 LG생활건강)가 ‘맛그린’이란 조미료를 출시하며 'MSG를 뺀 조미료’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유해성 논란은 정점에 달했다. 럭키는 ‘MSG가 뇌세포를 손상하거나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는 광고 문구를 써서 삽시간에 여론을 들끓게 했다. 시장은 곧 요동쳤다. 관계당국은 럭키의 광고를 비방성광고로 적시해 시정명령을 내렸지만 사태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그때의 여파로 큰 타격을 입은 미원은 훗날 이미지 쇄신 차원에서 회사명을 ‘대상(大象)’으로 변경하기에 이른다.
 
‘미원’의 원료가 뱀가루였다는 가짜뉴스, 사이다에 ‘미원’을 섞어 마시면 궁극의 최음제가 된다는 루머를 비롯해 온갖 유해론이 세상에 떠돌 때 학계와 관련업계는 꾸준한 연구로 반박에 나섰다. 그 결과 인공조미료 원료인 글루탐산은 자연에서 흔히 발견되는 아미노산의 일종이며 이는 전통발효식품인 간장, 청국장, 젓갈을 비롯해 토마토, 다시마, 브로콜리, 완두콩은 물론이고 생선과 육류, 심지어 모유에도 풍부하게 함유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글루탐산 추출방식에도 변화가 있었다. 기존의 화학적 합성방법은 1973년부터 미생물 발효방식으로 대체됐다. 때문에 MSG는 식초나 요구르트처럼 미생물 숙성에 의해 만들어진 ‘발효조미료’ 범주에 포함됐다. 그리고 사탕수수를 발효시킨 당밀 또는 설탕이 조미료의 주재료라는 것도 널리 홍보됐다.
 
현재 세계보건기구(WHO)와 세계식량농업기구(FAO)에서는 MSG의 섭취량에 제한을 둘 필요가 없다고 규정한 상태다. 미국식품의약국(FDA)도 MSG를 소금, 후추, 식초 등과 동일한 안전물질로 분류하고 있다. 이 같은 추세에 따라 2018년 1월 1일부터 우리나라는 MSG의 정식 표기를 ‘화학적 합성품’에서 ‘향미증진제’로 변경한 바 있다.
 
소비자의 인식은 과거에 비해 많이 개선됐지만 한번 생긴 선입견을 완전히 불식하기란 쉽지 않다. 2012년 ‘채널A’의 이영돈 전 PD같은 이는 ‘먹거리 X파일’ 프로그램을 통해 소위 ‘착한식당’을 찾는다면서 MSG를 사용하는 식당은 모두 나쁜 식당으로 매도하는 무책임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는 학계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MSG를 마치 먹어서는 안 될 쓰레기로 취급하는 독선적 태도를 보여 논란을 불렀다.
 
참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MSG다. 그러나 꾸준한 연구결과와 소비자의 인식개선, 1인 가구 증가, ‘쿡방’ 인기 등 환경변화에 힘입어 합성조미료 매출은 오히려 늘어나는 추세다. 소나 닭을 잡아 육수를 우려내느니 ‘미원’을 써서 가축의 희생을 막자는 광고도 소비자의 인식변화를 이끌어내는데 일조했다. 그런 성과 때문인지 ‘미원’의 2013년 국내 매출액은 953억 원에서 2014년 1천 6억 원, 2015년 1천 27억 원으로 계속 증가했으며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해외수출도 크게 늘고 있다.
 
한편, 2인자에 머물던 제일제당은 1975년 이후 기존 MSG에 쇠고기분말, 파, 마늘, 양파 등의 양념을 첨가한 천연조미료 ‘다시다’ 생산에 주력했다. ‘다시다’는 MSG 유해론이 한창 대두되던 시기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천연’이라는 수식어와 몸에 좋은 것이 비싸다는 고가 전략, 인기탤런트 김혜자를 앞세운 엄마마케팅이 주효한 덕이었다. 미원도 여기에 자극받아 1982년 ‘맛나’와 이를 업그레이드한 ‘감치미'등을 내놓으며 천연조미료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다시다’를 압도하지는 못했다. 이후 시장의 판세는 발효조미료 쪽은 대상이, 천연조미료 부문은 제일제당이 점유하는 형태로 굳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에 집착하다 보니 요즘은 천연첨가물도 일절 넣지 않고 100% 원물 재료를 쓴 조미료가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작금의 조미료시장은 청정원(대상) ‘맛선생’과 제일제당 ‘산들애’, 샘표 ‘연두’가 맞붙는 액상조미료 각축장으로 진화했다. 맛을 둘러싼 전쟁이 앞으로 어떤 양상으로 확전될지 지켜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래 이 맛이야!
 
어릴 적 몰래 부엌에 들어가 설탕인 줄 알고 한줌의 ‘미원’을 털어 넣었다가 시금떨떨한 맛에 질색한 기억이 있다. 집집마다 ‘미원’ 하나쯤은 다 가지고 있던 시절을 떠올리면, 과거 엄마 손맛인 줄로만 알고 먹었던 음식들의 정체가 조금은 궁금해진다. 그러나 부엌의 진실은 엄마 이외엔 누구도 모른다. 다만 가난한 살림, 보잘 것 없는 찬에 그럴듯한 맛이라도 내볼 요량으로 조미료를 팍팍 뿌려 넣었을 엄마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하다.
 
몸에 나쁘지 않다니 굳이 회피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스스럼없이 먹기에는 뭔가 좀 불편한 MSG. MSG 유해론은 지나치게 왜곡된 것이 맞지만, MSG가 질 좋은 음식을 만들기 위한 인간의 정성과 노력을 사라지게 한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전국 팔도 밥상의 맛을 완벽하게 평준화시켜 놓은 놀라운 ‘신공’은 MSG가 지닌 불편한 진실 중에서도 으뜸이다.
 
같은 식재료라 해도 들어가는 양념과 물, 정성에 따라 천차만별의 맛이 나온다. 똑같이 장을 담가도 내리쬐는 햇볕과 부는 바람, 적당한 습기와 온도, 만드는 이의 수고, 그리고 오랜 기다림의 시간에 따라 맛은 달라진다. 공장에서 만든 조미료로는 그 오묘한 맛을 따라갈 수 없다. 그래서 조미료에 점령당한 요즘은 “그래, 이 맛이야!”라며 격하게 감동할 일도 드물다. 감동이 사라진 식탁에 매일 앉아야 하는 현대인들은 그런 면에서 불행한 존재다.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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