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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⑫ 만홧가게

기사승인 2020.11.02  15: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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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만화나 실컷 보았으면···

‘꿈과 모험과 상상의 나라’는 만화(漫畵)의 세계를 설명할 때면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다. 불가능이란 없으며, 하늘은 언제나 정의 편에 서 있으며, 주인공은 그 어떤 난관도 이겨내고 승리를 얻는다는 판타지 가득한 세계. 그처럼 멋진 세상이 처음 우리에게 다가온 것은 1909년 6월 2일의 일이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화가 이도영(1884~1933)은 1909년 민족 신문 <대한민보(大韓民報)>가 창간되었을 때 1면에 창간 의도를 알리는 삽화를 그려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가 칭호를 얻은 인물이다. 1910년까지 일제와 기득권층의 탄압을 풍자하는 시사만화를 연재한 이도영의 그림은 우리 만화의 역사를 여는 첫 작품이었다.
 
일제는 1930년대 들어 민족말살정책을 펴며 시사만화를 적극적으로 탄압했다. 그러자 아동을 대상으로 한 유머만화가 인기를 끌었다. 그 인기는 광복 이후까지 이어져 만화잡지가 창간되는 등 얼마간의 활기를 띠지만 곧 6.25가 터지면서 공백기가 생겼다. 3년 뒤 휴전을 맞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동심을 달래줄 만화잡지와 단행본이 쏟아지면서 만화계는 다시 붐을 맞았다. 그러나 열악한 경제 환경과 과열경쟁 탓에 그 거품은 곧 꺼지고 말았다.
 
▲만화노점의 모습
 
전쟁이 끝나고 얼마 뒤, 만화노점이라는 것이 생겼다. 만화노점은 행인이 많은 길거리에 좌판을 깔고 만화를 진열한 뒤 정해진 금액을 받고 현장에서 만화를 보게 해주는 영업 형태다. 만화노점이 열리면 그 주변에는 항상 어린아이들이 몰려들어 만화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1957년에 최초의 만화 공급체인 ‘서울총판’이 출범했고, 1958년 신동우가 그린 <검호 날쌘돌이>와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 리>가 전국적인 히트를 치면서 만화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기 시작했다.
 
오락거리가 전무하다시피 했던 시절, 한번 터진 만화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이후 산호의 <라이파이>, 방영진의 <약동이와 영팔이>, 박기정의 <도전자> 시리즈가 속간되며 만화계는 르네상스시대를 맞았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만화노점’에서 진화한 ‘만홧가게’가 등장했다.
 
만홧가게의 명과 암
 
만화노점이 장돌뱅이식의 떠돌이 장사였다면 만홧가게는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영업하는 붙박이 장사였다. 가게 터를 구할 형편이 못 되는 이들은 살림방 한편에 만화를 쌓아놓고 장사를 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학교 앞이나 동네골목을 중심으로 점포형태로 운영됐다.
 
비록 바닥은 울퉁불퉁한 흙바닥에 희미한 전구, 등받이 없는 딱딱한 의자가 전부였지만 만홧가게는 학교를 파하고 돌아온 아이들로 늘 북새통을 이뤘다. 만홧가게의 벽은 총천연색 그림으로 도배된 만화들이 빼곡히 들어차 아이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한쪽 벽면에는 무협지와 탐정소설도 구비돼 있어서 성인들의 기호까지 만족시켰다. 못질한 각목 위에 만화를 세우고, 만화가 앞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가운뎃 부분을 검정고무줄로 가로질러 단단히 붙잡아 매두었던 그 공간은 실로 아이들에게는 ‘꿈의 공작소’이자 ‘모험과 상상의 나라’였다.
 
▲옛날 만화가게의 풍경.
 
학교에서 돌아와 책가방을 집어던지기 무섭게 만홧가게로 달려간 코흘리개들은 만화 삼매경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몰랐다. 삼복의 찌는 더위도, 추운 겨울의 연탄난로 가스냄새도 꼬맹이들의 만화사랑을 말리진 못했다. 땅거미 질 무렵이면 저녁 먹을 때라며 엄마나 형, 동생이 만홧가게로 찾아와 개구쟁이들 손을 잡아끌던 모습은 흔한 풍경이었다. ‘따뜻한 아랫목에 배 깔고 누워 만화나 실컷 봤으면 세상 부러울 것 없겠다.’던 만화광 세대와 ‘만화만 보다 이다음에 커서 뭐될 거냐.’고 꾸짖던 기성세대의 신경전이 팽팽했던 시절의 추억담이다.
 
1960년대 중반에는 만홧가게에 TV가 등장해 또 한 번 꼬맹이들을 유혹했다. 당시 만홧가게에서는 만화 1권 보는데 1원쯤 받았다. 그때 만화 10원어치를 보면 가게 주인 도장이 찍힌 쿠폰을 한 장씩 받았는데, 쿠폰 2~3장을 모으면 TV를 1회 시청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다. 아이들은 TV를 보기 위해 차비나 군것질 값을 아껴 쿠폰을 모으려 애썼고, 그 덕에 만홧가게도 문전성시를 이뤘다.
 
매일 저녁에는 꼬마 손님들이 콩나물시루 마냥 바글바글 모여든 만홧가게에서 TV 공개방송이 시작됐다. 코흘리개들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온통 TV화면으로 쏠린 가운데 <황금박쥐> <요괴인간> <타이거 마스크> <마린보이> <딱따구리> <뽀빠이>같은 인기 만화영화가 방영됐고 <사하라특공대> <달려라 래시> <타잔> <배트맨> 같은 미국드라마도 보여주었다. TV를 보는 동안에는 의자를 한쪽으로 밀은 뒤 바닥에 멍석을 깔아주는 가게가 있었고 어떤 만홧가게는 다락방 같이 좁은 곳에 아이들을 몰아넣고 TV를 틀어줬다. 그러다 다락이 무너져 수십 명이 다치는 사고도 있었다.
 
김일 레슬링이나 세계챔피언 김기수의 권투경기가 있을 때면 만홧가게가 대목을 보는 날이었다. 이런 날 만홧가게는 어린애뿐 아니라 어른들까지 몰려 더 북새통을 이뤘다. ‘오야 마음’이라고 했던가. 일부 만홧가게 주인은 쿠폰이 없는 어른들에게는 30~40원의 입장료를 요구하며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 참고로 1965년도 시내버스 요금은 8원, 삼양라면 1봉지 값은 10원이었다.
 
초창기 만홧가게들은 짭짤한 수익으로 재미를 봤다. 그러나 만화 열풍이 과열조짐을 보이자 교육현장을 중심으로 만화의 유해성을 경고하는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불량 저질만화는 비교육적이며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그저 백해무익한 존재라는 지적이 일부 지식인과 언론계를 중심으로 불거진 것이다. 1967년 박정희는 아예 만화를 밀수, 토벌, 탈세, 폭력, 마약과 더불어 사회 6대 악의 하나로 꼽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만화계에 결정적으로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터졌다.
 
1972년 1월 31일.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에 사는 정병섭(당시 12세, 신설국민학교 6학년)어린이가 자신의 집에서 나무선반에 나일론 줄을 걸고 목을 매어 숨진 채 발견됐다. 평소 만화광이었던 정 군은 이날 만홧가게에서 만화를 보고 온 후 누나에게 “만화에서는 사람이 죽었다가도 살아나더라. 나도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제가 된 만화는 <철인 삼국지>라는 작품이었는데, 만화에는 장비로 추측되는 인물이 죽었다 살아나는 내용이 있었다. 언론은 정군 누나의 증언만으로 만화를 비극의 원인으로 몰아갔다. 당시 정군의 아버지가 실직상태로 가족 모두 생활고를 겪는 등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불량만화를 발본색원하라고만 목청을 높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만화계의 위상은 크게 추락했다.
 
1970년대 기록을 보면 1년에 나온 약 8천 종의 출판물 가운데 만화가 5,300종(60%)이나 됐으며 서울 시내에만 1,700개의 만홧가게가 있었을 만큼 우리 사회에서 만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었다. 당연히 만화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 악서 추방대회’라는 이름의 만화 화형식이 열리기도 했고 학교별로 궐기대회가 개최됐다. 방송국은 TV 애니메이션 편성을 없애는 강수를 두기도 했다.
 
만화계를 정돈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사정당국도 마침내 칼을 뽑았다. TV를 틀어주는 만홧가게 주인은 공연법 위반혐의로, 가게 안에서 군것질거리로 떡볶이나 번데기 등을 만들어 파는 업주는 식품위생법 위반혐의로 처벌했다. 나아가 엄격한 만화 사전검열제를 시행함으로써 만화산업의 근간 자체를 흔들어 놓았다. 그 결과 국군은 후퇴해선 안 되고, 북한군은 잘 생기게 그리면 안 되며, 가난한 집안을 묘사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지침들이 내려와 만화가들의 창작의욕을 크게 꺾어 놓았다.
 
그 시절 즐겨보았던 만화들
 
 
작가는 초등학교 시절 운 좋게도 또래 아이들이라면 다 부러워했을 만화가게집 아들이었다. 다들 어렵게 살았던 시절이었음에도 우리 집은 영업을 위해 60년대 중반에 이미 미제 중고 TV를 들여놓은 상태였다. TV를 맘껏 볼 수 있었으며 가게 안을 온통 장식한 만화더미 속에서 복에 겨운 유년을 보냈다는 얘기다. 유독 옛 만화에 대한 기억과 향수가 깊은 이유는 그런 성장배경 때문일지 모른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삼삼하게 떠오르는 옛날 만화 표지와 주인공의 모습들···. 그 기억을 더듬어 만화 전성기였던 1960~70년대 주요 만화와 만화가들을 일람해 보련다.
 
1960년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뭐니 뭐니 해도 산호(본명 김산호)가 그린 <라이파이> 시리즈다. 서기 2110년을 배경으로 광속보다 빠른 제비기를 타고 우주를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지구정복을 꿈꾸는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정의의 사도 라이파이의 활약을 그린 이 작품은 우리나라 SF만화의 효시로 꼽힌다. 1959년 시작해 1962년까지 4부 32권의 대작으로 완성됐으며 지금도 라이파이를 기억하는 열성 팬덤이 존재할 만큼 시대를 초월하여 식지 않는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사극만화의 거장 김종래, <울 밑에선 봉선이> <봉선이하고 바둑이> 등 봉선이 시리즈로 사랑받은 순정만화가 권영섭과 더불어 1960년대를 풍미한 작가가 박기정이다. 박기정은 순정, 액션, 스포츠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그리며 우리 장편만화의 지평을 넓힌 중요한 인물로서 <가고파> <오빠생각> <들장미> <폭탄아> <도전자> <레슬러> 등의 작품을 남겼다. 극중 캐릭터인 훈이, 미미, 오동추, 몬도, 배뵤, 구마, 수경이 등을 기억하는 팬들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박기정과 같은 시기에 활약한 방영진 역시 ‘약동이’ 캐릭터를 내세운 학원 청춘물로 꽤 유명했다.
 
임창은 ‘땡이’라는 주인공을 내세워 50여 종의 시리즈 만화를 창작한 인물이다. 동그란 눈동자, 위로 꺾어 올린 모자챙이 트레이드마크인 땡이를 앞세운 임창의 만화는 동시대 어린이들의 정서를 가장 리얼하게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땡이의 사냥기> <땡이와 영화감독> 같은 작품이 인기를 끌었고 땡이의 친구들이었던 맹구, 오삼이, 올챙이, 미라가 기억난다. 임창과 더불어 명랑만화의 일인자로 불린 김경언(필명 경인)은 <우락돌이 부락돌이> <칠성이와 깨막이> <의사 까불이> 시리즈로 밀리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고, 순정만화의 대모 엄희자는 박수산, 민애니, 장은주 등과 더불어 세련된 화풍으로 독자적인 만화세계를 구축했다.
 
이밖에도 기담(奇談)만화의 최고봉 박기당, ‘두통이’ 시리즈를 탄생시킨 박기준, 터프가이 ‘혁’을 통해 통쾌한 복수극을 펼치는 <동경 4번지> <44계단과 혁>의 손의성, ‘으잉’ ‘이크’ ‘사사삭’ 같은 의성어와 의태어를 감칠맛 나게 구사하며 로마시대 검투극과 독일군 전투를 실감나게 그렸던 이근철, <구월산에 피는 꽃> <북진천리> <켈로부대>등 전쟁극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권웅, 의인화한 동물만화로 최고의 인기를 누린 <동물전쟁>의 최경과 ‘진돗개 시리즈’의 차형, 투견시리즈로 감동을 선사한 이향원(필명 향원), <철인 알파칸>과 <심술통>등으로 사랑받은 이정문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일류 만화가들은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차고 넘친다.
 
이들 선배 만화가의 활약에 힘입어 1970~80년대에도 김삼(소년 007), 김원빈(주먹대장), 길창덕(꺼벙이), 이상무(독고탁), 허영만(각시탈), 신문수(도깨비 감투), 박수동(고인돌), 강철수(발바리), 이현세(까치), 이두호(머털이), 배금택(영심이), 이진주(하니), 김수정(둘리), 방학기(바람의 파이터) 등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활발히 활동하며 한국 만화의 맥을 이어나갔다.
 
잘나가던 만홧가게는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분수령으로 만홧가게의 수가 꾸준히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만화계를 둘러싼 문화계 전반의 혁신분위기 때문이었다. 당시 만홧가게를 중심으로 유통된 작품 중에는 유명작가와 비슷한 그림체, 유사한 스토리를 흉내 낸 짝퉁만화가 많았다. 이에 식상한 독자들이 만홧가게를 통해 유통되는 작품들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반면 이 무렵에는 만홧가게가 아닌 일반서점에서도 질 좋은 만화를 구입할 수 있었다. 또 스포츠신문 등에 만화지면이 많이 확대된 것도 만홧가게에는 적잖은 부담이었다. 추동성이란 필명으로 <짱구박사>같은 아동만화를 그렸던 고우영은 <삼국지> <수호지> <금병매> 등 성인극화로 일간지 만화시장을 제패한 대표적 인물이다.
 
1982년 <보물섬>이 창간된 이후 <소년 챔프> <르네상스> <팡팡> 등 만화전문 단행본 시스템이 정착한 것도 만홧가게에 큰 타격을 안겼다. ‘학교보건법’ 등에 따라 학교에서 직선거리 200m 이내에는 아예 만홧가게를 차릴 수 없게 됐으며, 대신 생활수준 향상으로 사서 보는 만화의 시대가 열렸다. 학습만화나 역사만화 같은 것은 통신이나 방문판매로 손쉽게 구입하게 되었다. 또 지역마다 도서대여점이 많이 생겨났으며 컴퓨터 보급 확대로 소일거리가 많아진 어린이·청소년들의 관심분야가 다른 곳으로 분산된 것도 만홧가게의 하락을 부채질한 요인이다. 골목 안 ‘문화 사랑방’으로 불렸던 만홧가게는 그렇게 조락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에필로그: 루저들의 실락원인가 -------------------------------------
 
요즘 만홧가게의 풍속도는 어떤 모습일까. 우선 고객층의 변화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겠다. 1990년대 이후 만화방을 찾는 손님은 어린이들이 아닌 대학생, 일반 성인들로 물갈이됐다. 이용객들이 선호하는 만화장르도 무협>기업>액션>순정>스포츠>명랑 순일만큼 지금은 성인 위주의 작품들이 서가를 점령하고 있다.
 
대학가나 강남 등 번화가의 업소들은 ‘만화카페’라는 이름의 프랜차이즈화로 시설 고급화에 나선지 오래다. 일인용 가죽 소파와 탁자 등 세련된 집기류에 밝은 조명이 빛나는 쾌적한 공간을 보면 세월의 변화를 실감케 된다. 24시간 운영되며 커피와 음료도 제공한다. 배가 고프면 짜장면이나 햄버거를 주문해 먹어도 되고 만화를 보다 지치면 편히 눕도록 마련한 공간에서 수면을 취할 수 있다. 요금은 만화 권수가 아닌 시간기준으로 계산된다.
 
반면, 변두리에는 아직도 시설이 낙후된 만화방이 꽤 남아있다. 서울역 주변처럼 노숙자가 들끓거나 거처가 마땅치 않은 일용 노동자가 많이 모이는 허름한 골목 만화방의 주요 고객은 꿈과 희망을 잃고 가출한 청소년, 실업자, 막노동 일꾼들이다. 여관 대신 찾아들어와 몇 천원의 돈을 지불한 뒤 만화 몇 장을 넘기다 말고 코를 고는 사람, 고된 노동 때문인지 연신 잠꼬대를 해대는 사람···. 그들의 힘든 하루를 변명하는 듯 테이블 위에는 빈 컵라면 용기가 위태롭게 쌓여있다. 그곳은 마치 루저들의 실낙원처럼 보인다.
 
한 컷의 그림과 짧은 말풍선만으로도 이루 다 전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담아냈던 만화. 어린 날 꿈과 희망의 창고였던 만홧가게. 그러나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눈동자가 없어진 그 공간을 대신하고 있는 것은 희망을 잃어버린 자들의 탄식과 한숨뿐이다. 언제나 그렇듯 꿈이 사라진 자리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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