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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⑬ 직업(上)

기사승인 2020.11.16  14:4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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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뚫어~!”에서 “안 계시면 오라이~” 까지

현진건 소설 ‘운수 좋은 날(1924)’의 주인공 김 첨지 직업은 인력거꾼이다. 월남한 실향민의 비참한 생활상을 묘사한 이범선 소설 ‘오발탄(1959)’에 나오는 송철호는 계리사(計理士)사무실 서기다. 소설 속에 나오는 인력거꾼이나 계리사는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거나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버린 추억 속의 직업들이다.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6.25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이 땅에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직업이 생겼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처음으로 직업실태 조사가 이뤄진 것은 1969년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3,260종의 직업이 있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이 땅에는 1만 7천여 개의 직업이 존재한다.
 
‘직업’은 시대의 모습을 반영한다. 과거에는 자신의 청춘을 송두리째 포기하고 오직 가문의 영광을 위해 머리 싸매고 공부하여 고시에 합격하면 인생 최고의 성공으로 우러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반면, 지금은 허구한 날 게임만 한다고 부모의 꾸중을 듣던 청년이 프로게이머가 되어 억대의 연봉을 받는 시대가 됐다.
 
한국처럼 빠르게 경제발전과 산업화를 이룬 나라는 역사적으로 찾아보기 힘들다. 파란만장, 변화무쌍이라는 말로밖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속살을 들여다보려면 ‘직업’과 관련한 에피소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다양한 직업군, 특히 지금은 사라져버린 추억 속 직업들에 얽힌 소소한 이야기를 통해 시대의 흐름을 엿보는 시간여행을 떠난다.
 
아련해진 우리의 소리들
 
광복 이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우리 국민 다수는 지게꾼, 월천꾼(越川軍:사람을 등에 업어서 청계천 같은 얕은 개울이나 강을 건네주고 돈을 받는 사람), 넝마주이, 구두닦이 같은 열악한 직업을 전전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렸다.
 
전쟁이 터져 많은 것을 잃은 한국 사회는 국가를 일으켜 세울 인재와 물자가 필요했지만 사정은 녹록치 않았다. 전쟁고아와 미망인이 많아 거리는 구걸과 호객하는 사람으로 넘쳐났다. 집게손을 내밀며 볼펜을 팔던 상이용사, 양아치라 불렸던 넝마주이 재건대, 양갈보 또는 유엔마담, 히빠리 등의 은어로 불리며 미군 기지촌 주변에서 몸과 웃음을 팔던 양공주, 품바타령 구걸로 연명한 각설이패 등은 난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이었다.
 
치료해야 할 전쟁 부상자가 많던 그 시절, 의사의 수요는 끊임없이 요구되었다. 판·검사나 국회의원조차 선생님 소리를 못 들었지만 의사들에게는 언제나 선생님 호칭이 붙을 만큼 명예와 존경이 따르는 직업이었다. 전쟁 직후라 직업 군인, 특히 장교의 양성이 시급하다는 인식도 팽배했다. 자연스럽게 군의 미래를 책임질 사관생도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옛날 사관생도들은 거리에서도 재식 훈련하듯 90도 각도로 절도 있게 팔을 들어 올리고 보폭도 딱딱 맞춰 걸어 다녔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그들이 걸어가면 사람들이 몰려들어 수군거릴 정도로 사관생도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지금은 사라진 직업이 되었지만 전쟁 직후에는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타이피스트로 활동한 여성들이 많았다. ‘미군부대’라는 특성상 높은 급여가 보장되었고 근무환경도 좋아서 한때는 타자수를 양성하는 학원이 성행한 적이 있다. 그러나 타자학원은 주산학원, 차트학원처럼 시대의 변화를 맞아 자연 도태되었다.
 
▲보령제약 ‘ 용각산’ 광고. 굴뚝청소부 삽화를 넣어 기관지보호를 
강조한 점이 재미있다.
 
지금은 사라져 찾기 힘들어진 직업 중에는 아주 오래 전 들었던 추억의 ‘소리’만으로 그 존재가 어렴풋이 기억되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이다.
 
▲뚫어~: 커다란 징과 채, 굴뚝쑤시개와 검정 털북숭이 솔대, 얼굴에 묻은 검댕으로 상징되는 사람이 굴뚝청소부다. 징을 두드리며 목청 높여 “뚫어~”를 외치며 하루종일 이 동네 저 동네를 걷는 고단한 직업이다. 굴뚝 소제와 막힌 아궁이는 물론 온돌수리도 해줬다. 1960년대 말 급격히 진행된 도시화와 주택개량, 난방시설의 고급화로 사라졌다.
 
▲머리카락 삽니다~: 우리나라 주력 수출품 중 하나로 가발이 인기를 끌던 시절, 여성들이 잘라서 고이 보관하고 있던 머리카락을 사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작은 가방이나 보따리 하나만 들고 다니던 이 사람들은 머리카락 외에도 고장 난 시계나 금이빨까지 매입했다. “머리카락 삽니다~”. 이 나지막한 소리에는 머리채라도 팔아 자식의 주린 배를 채워주려 마음썼던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들의 아픈 과거가 묻어있다.
 
▲메밀묵 사려~찹쌀 떠억!: 겨울밤을 상징하는 이 추억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분이 많으리라. 예전에는 중학생 정도만 돼도 묵 통을 어깨에 메고 주택가 아무 골목이나 누비며 묵과 떡을 팔았다. 문풍지를 때리는 삭풍과 가물거리는 남포등 불빛이 쓸쓸함을 더하는 긴 겨울밤, 따뜻한 아랫목과 멀리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 묵내기를 하자며 민화투 판을 펼치던 어른들. 그러는 사이 묵장사의 떨리는 바이브레이션은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동네 어귀 너머로 멀어지곤 했다. 먹을거리가 다양해지고 배달음식이 정착되면서 겨울밤 하늘을 울렸던 묵장사의 고요 속 외침은 더이상 들을 수 없게 됐다.
 
이밖에도 “아이스~께-끼”를 외치던 하드 장수, “얼씨구~씨구~들어간다” 각설이타령을 하며 구걸에 나섰던 거지, “뻔!” 한마디면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던 번데기 장수, “똥 퍼~”로 통하던 인분수거 아저씨, “안계시면 오라이~”의 버스차장,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이 약 한 번 잡사 봐. 애들은 가라!”의 돌팔이 약장수 등 누군가의 직업을 기막히게 표현했던 소리들은 이제 추억 속의 골동품으로 박제돼 버렸다.
 
버스차장·식모·미제아줌마의 등장
 
산업화 시기인 1960년대 들어 직업군은 좀 더 다양화된다. 이 시기에는 노동집약적 산업이 붐을 이뤘는데 특히 여성 중심의 고된 육체노동을 요하는 직업이 많았다. 버스차장과 식모, 화장품 외판원, 구로공단 여공 등이 대표적인 예다.
 
‘버스차장’을 뜻하는 여자 버스안내원 제도는 1961년 도입됐다. 그전에는 ‘조수’라고 불린 남자승무원이 탑승해 차장 노릇을 했다. 그러나 인건비가 높고 자주 승객과 다투는 등 불미스러운 일이 잦아서 교통부가 안내원을 전원 여성으로 교체토록 조치했다. 여차장제도가 시행되자 가족 생계를 책임지겠다며 앳된 여성들이 대거 서울로 몰려들었다. 버스차장은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지원자가 많았지만 근무의 강도는 몹시 가혹했다.
 
차장의 하루 일과는 새벽 5시 첫차 승무로 시작됐다. 2시간 이상 운행하는 코스를 하루 여덟 탕쯤 오가는 동안 꼬박 서 있어야 했으며, 정류장에 버스가 정차할 때면 내렸다 타기를 반복해야 하는 중노동이 이어졌다. 정차할 역의 이름은 빠짐없이 큰소리로 고지해야 했다. “다음은 00역입니다. 내리실 분 안 계시면 오라이” “스톱”을 목이 아프도록 되풀이해야 했던 것. 아침저녁 러시아워에는 승객들과의 격렬한 몸싸움을 치러야 했다. 만원으로 차문이 닫히지 않아 개문 발차한 버스에 매달려 ‘배치기’로 승객을 밀어 넣던 차장들의 신공은 감탄스러울 정도였지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늦은 밤 막차 근무를 끝내고 차고지에 들어와도 차장들은 술 취한 승객들의 토사물을 치우는 등 차량 청소를 끝내야 했고 ‘삥땅’ 검사까지 마친 다음에야 탈진한 몸을 겨우 누일 수 있었다. 피곤에 지친 일과의 연속이다 보니 불행한 사고도 따랐다. 1977년 9월 4일 낮 1시경, 서울 한복판인 광교에서 17세의 차장 김 모 양이 과로에 지쳐 승강구에 서서 깜빡 졸다 그만 출입문 개폐기를 잘못 누르는 바람에 추락해서 사망한 일이 있었다.
 
고된 육체노동도 문제였지만 차장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든 것은 소위 ‘삥땅검사’를 한다며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 인권침해 사례다. 당시는 토큰이나 카드 없이 전액 현금만 유통됐다. 감시카메라가 없던 시절이니 운전기사와 차장이 내통만 하면 얼마든지 수입금의 일부를 가로챌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런 사례가 왕왕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버스에 매달려 손님을 안으로 우겨넣는 버스차장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인다.
 
이런 의심 때문에 버스회사는 차장들의 신체나 옷 속에 감춘 동전과 지폐를 찾는다며 제자리 뛰기를 시켰는가 하면, 아예 여자 사감을 기숙사에 보내 차장들 옷을 벗기고 알몸수색까지 했다. 일부 회사는 승객 숫자를 직접 세는 직원을 버스 맨 앞자리에 태우고 다녔다. 또 승강구 발판을 밟으면 탑승인원이 기록되는 계수기를 설치하는 등 삥땅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에 혈안이 됐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1976년 1월 5일, 삥땅 용의자로 의심을 받던 19세 차장 이 모양이 결백을 주장하다 칼로 자신의 배를 그어 사망한 것이다. 이 사건의 파장으로 버스 내 계수기는 모두 철거됐다.
 
불규칙한 식사, 고된 노동, 비인간적인 처우, ‘빠순이’라는 놀림, 각성제를 달고 사는 삶 속에서도 가족 생활비와 동생 학비 조달에 보람을 느꼈던 버스차장들. 그러나 1982년 승객이 직접 요금을 넣는 ‘시민자율버스’가 도입되면서 차장제도는 없어졌다. “안 계시면 오라이~”. 버스차장의 정들었던 목소리는 하차 벨과 여자 성우의 세련된 멘트로 대체되었다.
 
‘식모’는 가정부, 파출부, 가사도우미의 원조쯤 되는 직업이다. 재밌는 것은 1960년대, 그러니까 잘 살지 못했던 시절에도 일반 여염집에서 남보란 듯 식모를 부리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막인즉, 당시 밥 굶기를 밥 먹듯 하던 시골에서는 입 하나라도 덜 요량으로 머리가 큰 딸들은 대처의 식모로 보내버리기 일쑤였다. 그중에는 월급 없이 먹이고 재워만 줘도 좋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자 도시 사람들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으면 그만이라는 심산으로 부담 없이 식모를 들였다.
 
식모들은 입주 형태로 주인집에 머물면서 청소, 빨래, 요리를 비롯한 온갖 허드렛일과 심부름을 도맡는 전천후 일꾼이었다. 월급은 침식이 제공된다는 이유 때문에 일반 직장인의 1/10 정도 선에서 지급됐다. 1960년대 중반 식모의 월급 수준은 400~500원 정도였다. 딸자식 같은 어린 식모를 가족처럼 아끼며 월급과 보너스를 안겨주는 주인도 없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식모는 천덕꾸러기 찬밥신세였다. 특히 못된 주인집 남자들은 식모를 성적 노리개로 삼아 알게 모르게 괴롭히는 경우가 있었고 일부 사나운 여주인은 심심찮게 식모를 손찌검하며 구박했다. 이런 신세를 비관해서 자살하는 식모도 있었다. 물론 식모 중에도 못된 이가 있어서 패물을 훔치거나 주인집 아이 유괴사건에 관여한 일이 있었다.
세태를 반영하듯 식모를 테마로 한 영화도 여러 편 나왔다. 그중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는 한 가정의 몰락을 불러오는 어느 식모의 서늘한 치정극으로 단연 화제가 되었다. 최상록이 그린 만화 ‘말숙이(1966)’도 당시 식모를 바라보는 사회의 눈을 반영하고 있다. 내용 중에 주인집 꼬마가 “식모에게 누나라고 부르지 마. 식모는 어디까지나 식모야.”라며 동생을 꾸짖는 장면이 있다.
 
핵가족화와 생활구조 개선 영향으로 식모 직업은 점차 사양화됐다. 갈 곳이 없어진 식모와 버스차장 다수는 구로공단(현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직공들로 흡수됐고 일부는 술집 작부, 다방 레지, 창녀, 목욕탕 때밀이 등 밑바닥 세계로 밀려났다. 섬유, 의류, 봉제, 전기전자, 가발, 잡화, 광학 등 수출기업들이 대거 입주한 구로공단에는 돈 없고 학벌 없는 우리의 누이들이 몰려들어 졸린 눈을 비벼가며 하루 12시간 넘는 중노동으로 하얗게 밤을 밝혔다. ‘공순이’라는 비아냥거림 속에서 근로기준법이 무색한 대우를 받아가며 묵묵히 일했던 당시의 공단여공은 우리 산업의 현대화를 이끈 주력 일꾼들이다.
 
1980년대까지는 방문판매(방판)로 생계를 유지하던 이들도 많았다. 라디오나 소형 전축 같은 가전품을 산더미처럼 등에 지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물건을 팔던 아저씨들 생각이 난다. 그러나 방판의 상징적인 인물이라면 역시 ‘미제아줌마’와 ‘화장품 외판원’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날,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나타난 여자가 온통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들을 우르르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렌지주스가루 ‘탱’, 리츠 크래커, 맥스웰하우스 커피, 다이알 비누, 코티 분, 바세린, 레브롱 샴푸, 스팸, 조니워커 양주, 럭키스트라이크 담배 등등. 미군부대 PX를 통해 흘러나온 미제상품을 싸들고 은밀하게 집집을 누비던 그 여자를 사람들은 미제아줌마라고 불렀다.
 
외제품 사용이 금지됐던 시절이었기에 미제아줌마들은 정부의 단속을 피해 잠행하듯 소리 없이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곤 했다. 당시 국내 공산품 중에는 품질이 조악한 것이 많았기에 중산층을 중심으로는 미제 물건이 인기를 끌었다. 미제아줌마들은 주문받은 물건을 챙겨 대개 한 달에 한두 번 꼴로 나타났다. 그러나 단속이 심할 때는 몇 달이고 모습을 보이지 않기도 했다. 한동안 나타나지 않아 소식이 궁금해질 무렵이면 어김없이 동네에 모습을 드러냈던 미제아줌마도 1983년 수입자유화조치가 이뤄지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곁을 떠났다.
 
일명 ‘아모레아줌마’로 통칭되던 화장품외판원은 1970~80년대에 가장 활발히 활동했다. 가가호호 방문하여 주부들을 모아놓고 마사지 서비스를 하며 호객행위를 하던 화장품 외판원. 화장품을 사면 이것저것 샘플과 ‘향장’같은 잡지를 선심 쓰듯 나눠주던 그녀들이야말로 오늘날 K-뷰티의 원동력이 된 일등 공신이다. 실제로 태평양화학은 이 방판제도에 힘입어 50% 이상의 매출신장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다. 태평양 ‘아모레’ 화장품에 질세라 한국화장품 ‘쥬단학’이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고 ‘피어리스’, ‘쥬리아’ 같은 화장품까지 가세해 자웅을 겨루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까마득한 옛날 일이 됐다.
 
 
#에필로그: 우리 시대의 누이 ‘영자’ ----------------------------------------
 
1973년 출간된 조선작의 동명소설을 1975년 김호선이 감독한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서울 국도극장 개봉 당시 36만의 관객을 불러 모아 화제가 된 작품이다.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창수(송재호)는 월남 파병 후 돌아와 목욕탕 때밀이로 일하다 영자(염복순)를 만난다. 영자는 창수가 군에 가기 전 용접공으로 일했던 철공소 사장 집에서 식모로 일하고 있다. 창수는 영자를 사랑하지만 돈을 벌어야 하는 영자는 그를 외면한다. 그러던 중 철공소 사장 아들에게 겁탈당한 영자는 그 길로 쫓겨나 식모 일을 그만두게 된다. 그 뒤 봉제공장 여공, 호스티스로 전전하던 영자는 버스차장이 되지만 사고로 버스에서 떨어져 한쪽 팔이 잘린다. 외팔이 신세로 텍사스촌 창녀가 된 영자는 꿈도 희망도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영자의 전성시대’는 1970년대 한 여인의 개인사를 통해 개발주의 시대의 어두운 이면을 고발한 작품이다. 주인공 영자는 당시의 한국사회, 특히 서울 지붕 밑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상경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대변한다. 식모-여공-호스티스-차장-창녀라는 밑바닥 삶을 사는 영자는 식모살이로 번 돈을 모두 시골의 가족에게 부치고 교통사고로 나온 보험금마저 그렇게 한다.
 
영화는 영자가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는 모습을 통해 시대의 질곡을 표현한다. 안타깝게도 영화는 영자의 출구 없는 일상을 그릴 뿐, 제목과 달리 그녀의 전성시대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역설적인 제목은 그래서 슬픔을 더한다. 터널처럼 길고 끝이 보이지 않는 불행한 삶을 살다간 영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았던 우리네 누이들의 분신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런 까닭에 ‘영자’라는 이름은 어두웠던 한국사회의 이면을 증언하는 또 하나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한다.
 
 
▶ 다음 편에 ‘직업(下)’로 이어집니다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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