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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㊺ - 천국보다 낯선

기사승인 2019.11.11  11:2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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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㊺ - 천국보다 낯선
 
 
  - 제작 : 1984년, 미국·독일
  - 감독 : 짐 자무시
  - 배우 : 존 루리, 에스터 발린트, 리처드 에드슨 외
  - 필름 : 흑백
  - 상영시간 : 89분
  - 수상 : 칸 영화제 신인감독상
 
 
 
 미국 독립영화의 기수 짐 자무시(68). 마틴 스콜세지, 스티븐 소더버그, 스파이크 리, 마이클 무어, 쿠엔틴 타란티노, 소피아 코폴라 등 미국 독립영화를 상징하는 기라성 같은 인물 중에서도 짐 자무시의 명성은 독보적이다,
 
짐 자무시는 미국인이면서도 할리우드 스타일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영화적 상상력을 유럽적인 영감으로 풀어내려 고민한 인물이다. 그의 감칠 맛 나는 영화들 가운데 ‘천국보다 낯선(Stranger Than Paradise)’은 국내 팬에게 가장 어필한 작품으로 꼽힌다.
 
주류사회에 끼어들지 못하고 방황하는 두 남자와 한 여자의 행적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과 일상의 허무를 표현한 ‘천국보다 낯선’은 10만 달러에 미치지 못하는 저예산으로 찍은 대표적인 인디펜던트 필름이다.
 
컬러시대의 흑백영화라는 독특한 발상에다 영화 내내 반복되는 블랙아웃(Black Out), 개성 강한 음악 등이 뒤섞인 이 영화는 독특한 연출 스타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1980년대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의 하나로 남게 된다.
 
[신세계] [1년 후] [천국] 등 3개의 섹션으로 구성한 ‘천국보다 낯선’은 세 남녀 주인공이 드넓은 미국 땅 어디엔가 존재할 것이라 믿는 파라다이스를 찾아 이곳저곳 떠도는 이야기다. 이들의 여정은 미완으로 끝나지만 그들의 유랑기는 우연과 필연의 경계를 줄타기하며 묘한 여운을 제공한다.
 
당신의 천국은 어디인가
 
뉴욕 맨하탄의 낡고 비좁은 아파트에 사는 헝가리 이민자 윌리(존 루리)는 어느 날 클리블랜드에 사는 로티(세실리아 스타크) 숙모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전화의 내용인즉 ‘부다페스트의 사촌 에바가 클리블랜드에 온다는 것, 그런데 숙모 자신이 병원에 입원한 관계로 윌리가 그녀를 열흘 동안 재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혼자 이리저리 뒹굴며 자유분방하게 사는 놈팡이 윌리는 당분간이긴 하지만 군식구가 늘어난다는 사실이 짜증스럽기만 하다.
 
[신세계/The New World]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뉴욕에 도착한 에바. 허허벌판 황량한 공항을 빠져나온 뒤 쓰레기 뒹구는 맨하탄의 뒷골목을 걸어가는 에바(에스터 발린트)는 휴대용 카세트 레코더에 즐겨듣는 음악 테이프를 꽂는다. 흘러나오는 노래는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의 강렬한 리듬 앤 블루스 ‘I Put A Spell On You(당신에게 주문을 걸 거예요)’. 그녀는 노래의 가사처럼 마법의 주문을 걸어 미국을 내 집 안마당처럼 만들겠다는 야무진 각오를 품고 윌리의 아파트에 여장을 푼다.
 
10년 전 헝가리에서 건너온 윌리는 이미 미국인이 다 되었다는 듯 행동하고 사고하는 인물. 사촌이라고는 하지만 성가신 존재의 출현으로 마음이 부어터진 윌리는 에바에게 “제발 내 앞에서 헝가리어를 쓰지 말아 달라”며 퉁명스럽게 대한다. 윌리는 마치 미국인처럼 사고하고, 마시고, 먹으며, 행동하지만 에바의 눈에 윌리는 하릴없이 뒹굴다 도박장이나 전전하는 별 볼 일 없는 존재로 비칠 뿐이다.
 
이틀 뒤. 윌리의 절친 에디(리처드 에드슨)가 아파트로 찾아온다. 에디는 처음 보는 에바에게 호감을 비친다. 윌리는 에디와 함께 경마도박을 하러 밖으로 나가고 좁은 아파트에 남은 에바는 무료함에 빠진다. 다음날도 윌리와 에바는 하는 일 없이 종일 TV를 시청하는 것으로 하루해를 다 보낸다.
 
이튿날 에바는 외출을 나갔다 담배와 통조림 등 먹을거리를 잔뜩 사 들고 온다. 윌리는 비로소 에바에게 호의를 드러낸다. 그리고 얻어먹는 게 미안했는지 윌리도 원피스 한 벌을 선물한다. “여기 사람들처럼 입어 봐”라며 윌리는 의기양양하게 옷을 건네지만 에바는 싸구려 냄새가 풀풀 나는 후줄근한 원피스를 집어던지며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럭저럭 열흘의 시간이 지난 뒤 에바는 로티 숙모가 있는 클리블랜드로 떠난다. 에바는 윌리가 사준 원피스를 입고 길을 나선다. 윌리는 아파트 문간에서 빼꼼히 내다보는 것으로 에바를 배웅한다. 땅거미 깔린 거리를 걷는 에바. 몇 걸음 내딛던 그녀는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윌리가 사준 옷을 벗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1년 후/One Year Later] 에바가 클리블랜드로 떠난 지 일 년이 지났다. 윌리와 에디는 여전히 노름판이나 들락거리며 시간을 죽인다. 윌리는 갑자기 에바가 보고 싶었는지 클리블랜드에 갈 생각을 한다. 에디의 매형에게 차를 빌린 윌리와 에디는 도박으로 번 6백 달러를 챙겨 무작정 클리블랜드로 떠난다.
 
윌리와 에디는 길을 묻기 위해 잠시 차를 세우고 어떤 사람에게 말을 거는데, 그 사람으로부터 일하려고 공장에 출근 중이라는 말을 듣는다. 윌리와 에디는 ‘일’, ‘출근’이라는 단어를 듣자 끔찍한 감정을 느낀다. 그들은 클리블랜드는 따분한 뉴욕과는 뭔가 달라도 다를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낮과 밤을 달려 로티 숙모 집에 도착한다.
 
뉴욕과 달리 눈 덮인 클리블랜드는 이빨이 부딪힐 정도로 춥다. 에바는 핫도그 가게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다. 에바가 일을 나간 동안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윌리와 에디는 늙은 로티 숙모와 카드놀이나 하며 시간을 소모한다. 저녁에는 에바와 그의 남자친구가 영화구경을 하는 극장까지 쫓아가 분위기를 망쳐놓기도 한다.
 
너무 춥기만 하고 새로운 곳에 왔어도 달라진 게 없는 단조로운 일상에 윌리와 에디는 곧 신물을 느낀다. 에바가 쉬는 날, 셋은 호수구경을 가지만 휘날리는 눈발에 꽁꽁 얼어붙은 호수는 코빼기도 보여주질 않는다. 결국 윌리와 에디는 클리블랜드를 떠나기로 한다.
 
[천국/Paradise] 너무 추운 곳에서 벌벌 떨던 윌리와 에디는 따뜻한 플로리다로 갈 계획이다. 두 날건달은 플로리다만큼은 자신들이 원하는 천국일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에 빠지고, 윌리는 에바에 대한 미련 때문에 도중에 차를 돌려 그녀까지 태우고 여행길에 오른다. 셋은 하얀 백사장, 푸른 야자수, 뜨거운 모래, 눈부신 태양, 부서지는 파도를 상상하며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린다.
 
그런데 플로리다는 그들이 상상했던 휴양지의 이미지와는 완전 딴판이다. 거리에는 사람도 없고 해변은 텅 비었다. 어느 곳에도 그들이 찾는 천국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 사람은 기운이 빠진다. 설상가상으로 윌리와 에디는 도착하자마자 개 경주 도박에 나섰다가 가진 돈을 거의 탕진한다.
 
남자들이 도박장에서 돈을 날리고 있을 때 에바는 모텔을 나와 쓸쓸히 바닷가를 걷는다. 다음날도 윌리와 에디는 잃은 돈을 되찾겠다고 경마장엘 간다. 다시 외톨이가 된 에바는 기분전환을 할 겸 줄무늬가 그려진 넓은 차양 모자를 쓰고 바닷가로 나간다.
 
그런데 어떤 얼간이 하나가 에바에게 접근해 온다. 그 얼간이는 다짜고짜 에바에게 다가와 “너 프리크 맞지?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난 거야! 이거 받으러 온 거 아냐?”라며 두툼한 봉투를 떠넘기고 황급히 사라진다. 얼떨결에 봉투를 받은 에바는 그 안에 거액의 현금이 든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모텔로 돌아온다. 그리고 잠시 뒤, 우연찮게도 에바처럼 줄무늬가 있는 차양 모자를 쓴 여인이 해변에 나타나 누군가를 찾다가 그냥 돌아간다. 그녀가 진짜 프리크였다. 
 
뜻하지 않게 약쟁이들이 주고받았어야 할 거금을 손에 쥐게 된 에바는 편지 한 장과 약간의 달러를 남겨두고 모텔을 빠져나온다. 돈을 좀 따서 기분이 한껏 좋아진 윌리와 에디도 모텔로 돌아온다. 윌리는 “공항에 간다.”라고 쓴 에바의 편지를 발견한다.
 
윌리와 에디도 주섬주섬 짐을 챙겨 공항으로 향한다. 이미 공항에 도착한 에바는 유럽행 비행기 표를 알아본다. 그런데 오늘 유럽으로 떠나는 비행기는 45분 뒤 부다페스트로 출발하는 단 한 대밖에 없다. 에바는 어쩔까 망설인다.
 
공항에 도착한 윌리는 창구 직원으로부터 에바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제 부다페스트행 비행기는 5분 후면 이륙한다. 윌리는 서둘러 티켓을 구입한다. 에디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윌리는 에바를 데리고 나오려고 기내로 들어간다. 몇 분 후, 비행기는 요란한 소음과 함께 이륙하지만 어쩐 일인지 윌리는 돌아오지 못한다. 공항 밖에서 멀리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던 에디는 사태를 파악했다는 듯 끄덕이며 차를 몰아 뉴욕으로 돌아가 버린다.
 
한편 부다페스트행 비행기가 이륙하던 시각, 에바는 플로리다의 모텔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파묻는다. 또 다른 어디론가 떠나려 했던 그녀는 헝가리 외에 다른 항공편이 없다는 사실에 낙담하여 더 이상의 여행을 포기한다. 얄궂게도 세 사람의 동행은 그렇게 끝난다. 세상 어디에도 그들이 꿈꾸는 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씁쓸한 사실만 확인한 채 세 남녀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길을 간다.
 
짐 자무시 스타일
 
어느덧 인디영화의 고전이 된 ‘천국보다 낯선’은 흥미로운 탄생배경을 갖고 있다. 1982년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하던 짐 자무시는 독일출신 빔 벤더스 감독의 새 영화 ‘사물의 탄생’ 촬영을 돕고 있었다. 당시 짐 자무시가 쓴 시나리오를 읽은 빔 벤더스는 격려차원에서 자신이 쓰고 남은 35mm 흑백 필름을 건네준다. 짐 자무시는 이 자투리 필름을 가지고 ‘천국보다 낯선’의 1부에 해당하는 ‘신세계(30분 분량)’를 찍었다.
 
2개월에 걸쳐 촬영한 이 작품이 실험적인 형식과 미학적인 완성도에서 호평을 받으며 파장을 일으키자 2년 뒤 짐 자무시는 ‘1년 후’와 ‘천국’ 등 1시간 분량의 에피소드를 추가해 ‘천국보다 낯선’이라는 제목의 장편을 발표하게 된다. 이 하나의 작품으로 짐 자무시는 칸 영화제 신인감독상, 로카르노 영화제 황금표범상, 선댄스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는 등 하루아침에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왠지 정겹고 향수를 불러오는 흑백 화면에 방황하는 청춘들의 고독과  소외, 허무를 담은 이 작품은 짐 자무시 생애 두 번째 장편영화이자 본격적인 메이저 무대 데뷔작이다. 그의 첫 번째 장편은 1980년 발표한 ‘영원한 휴가’다.
 
‘천국보다 낯선’은 짐 자무시의 독특한 감성이 물씬하게 풍기는 영화다. 이동이 없도록 고정시켜 놓은 카메라, 토막으로 분절한 각각의 화면 모두를 롱테이크로 찍어대는 대담성, 특히 장면이 끝날 때마다 등장하는 블랙아웃(암전)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수없이 반복된다. 매끄러운 전개를 방해하고 관객의 몰입을 저해할 수 있는 이런 위험한 편집테크닉은 기존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는 시도하기 힘든 파격이다. 그러나 억지로 세련되기를 거부하는 이런 자유분방함이야말로 영화를 더욱 참신하게 만든 원동력이다.
 
‘천국보다 낯선’은 흔히 ‘짐 자무시답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그의 독자적인 스타일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영화다. 플롯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는 것처럼 보이고, 실컷 떠들지만 언제나 침묵하는 것 같고, 항상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늘 어긋나는 것 같고, 어디론가 떠나지만 결코 머물지 못하며, 우연인지 필연인지 규정할 수 없는 찰나들의 반복. 어디 그뿐인가. 난데없는 개그코드가 만들어내는 황당한 결말, 짧고 건조한 대사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만들어내는 절제미, 그리고 멋진 제목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온통 짐 자무시의 기발한 상상력과 천재성으로 번뜩인다.
 
음악도 멋지다. 처절함이 흘러넘치는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의 노래는 물론이고 윌리 역으로 출연한 존 루리가 직접 만든 OST도 매력을 발산한다. 존 루리는 배우 이전에 밴드활동을 한 색소폰연주자였다. 나직이 속삭이듯 녹아드는 그의 현악 4중주는 단조롭지만 꽤 장중하다. 존 루리(1953~ )는 음악을 하던 중 1980년 자무시의 첫 장편 ‘영원한 휴가’에 출연한 것이 인연이 되어 배우의 길을 병행하게 됐다. 에디 역의 리처드 에드슨(1954~ ) 역시 뉴욕 펑크밴드의 정통 드러머 출신 뮤지션이다. ‘천국보다 낯선’으로 데뷔하여 35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다.
 
에바 역의 에스터 발린트(1966~ )는 헝가리 출신으로 그녀 역시 가수이자 작곡가 겸 바이올리니스트다. 6살 때 바이올린을 잡았고 극단 멤버였던 부모를 따라 각지를 떠돌다 뉴욕에 정착하면서 클럽 디제이로 활동했다. 그녀는 예술가들이 똬리를 튼 그곳에서 자무시의 눈에 들어 처음으로 영화를 찍게 된다. 그때 나이가 15세였다. 흡연 욕구를 자극할 만큼 맛있게 피워대는 담배, 무심한 듯 무표정한 얼굴에 문득 띄우는 미소 하나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버리는 그녀의 매력은 걸크러쉬의 원조 격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다.
 
윌리와 에바의 순례는 욕망의 물거품만 남기고 허망하게 끝난다. 영화 속에서 에디는 ‘어딜 가도 왜 이렇게 다 똑같은 거지’라고 푸념한다. 그들은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이 ‘신세계’일 거라고, 황홀한 ‘천국’일 거라고 믿지만 미국이라는 나라도 자신들이 떠나온 고향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평범한 땅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완전한 미국인으로 살고자 했던 윌리는 의도치 않게 조국 헝가리로 돌아가게 되고 절묘한 타이밍으로 거액의 검은돈을 손에 넣은 에바는 오히려 미국 땅에 남게 된다. 순간의 어긋남이 빚어낸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영화는 끝난다. 뭔가 심오한 메시지를 전달할 것 같았던 짐 자무시는 왜 이처럼 황당하고 우스꽝스런 결말을 보여주었을까. 그는 실현될 수 없는 꿈을 찾아 인생을 허비한 청춘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허황된 꿈을 꾸느라 고생하였소. 안됐지만 당신이 찾던 이곳은 천국보다 낯선 곳이랍니다.’
 
 

silverinews 진고개 신사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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