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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21) 표어(標語)

기사승인 2021.03.08  17: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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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촌철살인’ 짧은 글귀에 새긴 시대정신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 이 짧고 단호한 문구는 199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후보 빌 클린턴이 재선에 도전하는 조지 부시를 물리치고 당선될 때 가장 강력한 한방의 무기로 쓰인 말이다.
 
당시 걸프전 승리로 한층 고무돼 있던 조지 부시 대통령은 미국의 힘을 과시하는 쪽에 초점을 맞춰 지속적인 국방력 증강을 주장했다. 반면 클린턴은 민생경제 부활에 비중을 두었다. 비 전시상황에서 미 국민의 최대관심사는 먹고사는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지 부시는 그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무명에 가까웠던 빌 클린턴은 유권자가 진정으로 원하고 공감하는 화두를 고스란히 담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슬로건으로 유권자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키며 승기를 잡았다.
 
짧지만 강력한 메시지, 촌철살인의 문구를 담은 표어(標語)는 사회 현실에 대한 세계관(이데올로기)을 담은 구호나 슬로건을 일컫는다. 주로 대중의 행동을 조작하기 위한 선전도구로 이용되는 표어는 쉽고 단순한 내용, 단정적인 표현으로 구성되는 것이 특징이다.
 
표어에는 당대의 시대정신과 민중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그런 측면에서 가시밭길 헤치듯 격동의 시기를 걸어 온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하는데 있어 그동안 쓰인 표어들을 살펴보는 것은 꽤 의미 있는 일이다. 전봇대, 동네 골목, 시골집 토담벼락, 교실 게시판, 선술집 기둥, 구멍가게 문짝 등 어디랄 곳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던 생활표어. 그런 표어들은 언제쯤 출현했을까.
 
당대의 생활상을 엿보게 하다
 
현대적 의미의 표어가 출현한 것은 3·1운동 직후인 1920~30년경이다. 이 무렵 발생한 여러 저항운동과 방정환 중심의 어린이운동, 그리고 여성운동, 신분차별 폐지운동, 물산장려운동, 문맹퇴치운동, 소작쟁의 등을 계기로 정치적 선동 선전의 효과를 담은 짧고 강력한 문구가 등장해 대중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자-자작자급 하야 우리 것으로 살자> <희망을 살니자! 래일을 살니자! 잘 살랴면 어린이를 위하라!>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배우자! 가르키자! 다함께 브나로드!!>등은 일제강점기에 출현한 표어다. 문맹률이 심각했던 당시, 간략한 문장으로 국민의 이해를 돕고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표어만큼 유용한 수단은 없었다. 조선총독부 역시 조선인을 세뇌시키기 위해 <내선일체> <우리는 대 일본 제국의 신민입니다>같은 표어를 적극 활용했었다.
 
6·25전쟁 뒤 국토분단의 후유증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 남한 땅은 낙후된 환경 속에서 식량증산, 생활환경개선, 농촌운동 등을 전개했다. 1950년대 중반과 1960년대 초반의 계몽활동을 독려하기 위해 만든 표어를 보면 당시 민중의 삶이 어떠했는지 직감할 수 있다. <농토 좁다 낙심 말고 퇴비모아 증산하자> <잡병을 없애고 수명을 늘리자> <아카시아를 심자> <이, 벼룩 진드기를 없애자> <백일이 지나면 철분을 보태주자> <가래침 뱉는 곳에 결핵균 날뛴다> 등의 표어에서 보듯 당시의 영농환경, 보건위생, 영유아 영양 상태는 참으로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오래 전 한 초등학교의 모습. 두 어린이가 교내 반공 탑에 표어를 내걸고 있다.]
 
먹고사는 것도 시급한 문제였지만 당시 남한사회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이슈는 ‘반공’이었다. 북한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에서 비롯된 ‘반공’은 그 어떤 행동과 상황도 정당화시키는 무소불위의 ‘도그마(Dogma)’였다. ‘반공·방첩·승공·멸공’을 정권유지 수단으로 교묘히 활용한 군사정권은 간첩사건까지 조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툭하면 반공표어 짓기, 반공포스터 그리기, 반공글짓기, 북괴규탄 웅변대회를 열었고 직장과 학교, 반상회를 통해 간첩과 불온분자 색출 요령을 적극 홍보하는 등 온 국민을 상대로 마치 주술 걸듯 반공교육을 실시했다. 어린이들에게는 ‘똘이장군(1978)’같은 만화영화를 보여 주며 반공의식을 주입시켰다.
 
<의심나면 다시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 <간첩은 표시 없다 너도나도 살펴보자> <혼란 속에 간첩오고 안정 속에 번영 온다> 같은 표어는 50대 나이를 넘긴 분들이라면 친숙하게 여길만한 것. 그 이전 세대에는 <공산당을 쳐부수자> <때려잡자 김일성 무찌르자 공산당> <힘에는 힘으로, 도발하면 때려잡자>는 식의 원색적 표현이 많이 쓰였다. 1960년대 군부대에는 아예 <죽이자 김일성, 쏘아죽이고, 찔러죽이고, 때려죽이고, 찢어죽이자>는 표어가 내걸리기도 했다.
 
<사랑하는 S양도 알고 보니 붉은 간첩>이라거나 <이웃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가 다시보자>처럼 주변 사람 모두를 잠재적 간첩으로 보게 만드는 불편한 내용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반공표어는 많이 순화되었다. 1990년대의 <자수하여 광명 찾자> <문민시대에도 간첩은 숨어 있습니다> <당신의 안보시력은 얼마입니까> <마음은 열어도 신고정신은 철저히> 같은 표어는 남북 화해분위기를 고려한 나머지 부드럽게 바뀐 예에 속한다. 갇혀진 시간 속에 머물며 직설적인 단어와 경직된 감정으로 일관했던 반공표어가 개인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안보의식을 가다듬자는 식으로 완곡하게 다듬어진 것을 보면 시국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다.
 
[▲교단에 불려나가 구충제를 받아먹던 그 때를 기억하십니까.]
 
<내 몸 위해 먹은 음식 기생충이 다 먹는다> <간첩 색출하는 정신으로 쥐를 찾아내 박멸하자>는 구호와 함께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에는 기생충 구제운동과 쥐잡기 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국민의 보건위생과 식량훼손을 막기 위한 방책으로 실시한 이런 운동은 많은 뒷이야기를 남겼다.
 
1960년대에는 우리 국민의 90% 이상이 기생충 감염자였다. 채소를 재배할 때 인분을 비료로 사용했기에 국민 대부분이 기생충에 감염되는 것은 피할 수없는 현실이었다. 이를 께름칙하게 여긴 주한미군은 자국 영토에서 키운 채소를 공수해 식재료로 사용할 정도였다. 기생충 때문에 독일에 파견된 우리 광부들이 퇴짜를 맞을 뻔한 사건도 있었다. 따로 변소가 없는 갱(坑) 안에서는 적당히 용변을 보아 처리하곤 했는데, 우리 광부들의 기생충 감염 사실이 알려지면서 독일 당국이 한국 광부 수입을 꺼린 거였다. 창피한 일이었다.
 
그러던 중 기생충감염의 심각성을 일깨운 사건이 벌어져 장안을 들쑤셔놓았다. 1963년 10월 24일, 전주예수병원 응급실에 심한 복통을 호소하는 9세 소녀 정 모양이 실려 왔다. 장 폐색 증상으로 괴로워하던 정 양은 갑자기 입으로 회충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의료진은 이튿날 새벽 응급수술에 들어갔다. 의사들은 정 양의 소장 대부분이 회충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확인했다. 소장 일부는 이미 괴사한 상태였다. 당시 의료진은 소장 일부를 절단하고 환자 뱃속의 회충을 대부분 제거했으나 안타깝게도 정 양은 수술 9시간 만에 숨지고 말았다.
 
수술 뒤 정 양의 몸속에서 나온 회충은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체중 20Kg이었던 정 양의 몸 안에서 나온 회충은 모두 1,063마리로 그 무게가 약 5Kg에 달했으며 회충의 전체 연장길이는 160m나 됐다. 당시 이 뉴스는 토픽으로 타전돼 전 세계에 보도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 인식이 대대적으로 개선되었고 기생충 퇴치는 국가적 숙원사업으로 떠올랐다. 정부는 이듬해 기생충박멸협회를 만들어 전국적인 구충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1968년부터는 학교에서 채변봉투를 나눠주고 기생충 감염여부를 검사했다. 당시 밤톨만 하게 대변을 찍어 비닐봉투에 담아 가는 것이 망설여져 학교 뒤 야산에 가서 ‘남의 것’으로 해결하거나 개똥 따위를 가져다 제출한 경험이 적지 않을 것이다. 횟배를 앓으면 구충제 대신 휘발유를 마셨던 그 시절의 아이들은 기생충 검사 뒤에야 비로소 학교에서 나눠주는 산토닌 같은 알약을 받아먹을 수 있었다. 약장수들이 죽은 회충을 가득 담아놓은 흉측한 모습의 유리병을 진열해 놓고 길거리에서 정체불명의 회충약을 팔아먹던 시절의 에피소드다.
 
회충, 이, 벼룩, 빈대 구제사업 만큼이나 대대적으로 추진된 것이 쥐 퇴치운동이다. 쥐는 전염병을 매개하는 해로운 동물이기도 하지만 국민의 주식인 쌀을 축내는 주범이었다. 1960년대부터 시군 단위로 쥐잡기 행사를 실시해 온 정부는 늘어나는 쥐와 그에 따른 피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농림부 주관 하에 범국민캠페인을 열어 전국적인 쥐잡기 운동에 돌입했다.
 
당시 농림부는 나라 안에 약 9천만 마리의 쥐가 살고 있다고 추산했다. 이는 국민 1인당 3마리, 한 집에 평균 18마리의 쥐가 있다는 계산이었다. 전국의 쥐가 한 해 240만 섬의 곡식(당시 곡물 총 생산량의 8%)을 먹어 치웠으니 쥐 절반만 잡아 없애도 120만 섬의 곡식을 아낄 수 있다는 논리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쥐잡기를 독려했던 광고.]

때는 1970년 1월 26일 오후 6시. <쥐를 잡자> <쥐는 살찌고 사람은 굶는다>는 표어 아래 제1회 전국 동시 쥐잡기운동이 개시됐다. 가정, 학교, 군대, 직장, 농촌 등 전국 방방곡곡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쥐약이 살포됐다. 정부는 미리 1억 4천만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집집마다 쥐약을 무료로 배포했다.

 
쥐약을 뿌린 지 20여일이 지난 2월 19일, 당국은 전국에서 4,200만 마리의 쥐를 소탕했다고 공식발표했다. 성과에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그해 5월 다시 한 번 2차대회를 열어 쥐 소탕에 나섰다. 이때 또 3,200만 마리의 쥐를 잡은 것으로 집계됐다. 학교에서는 죽은 쥐의 꼬리를 잘라오라는 과제를 내주었고, 서울 YMCA 강당에서는 <쥐 없는 명랑한 사회를 건설하자>는 테마로 웅변대회가 열렸다. 불과 50년 전 우리들 모습이다.
 
세월 따라 180도 변하는 표어
 
먹고살기 힘들던 60~70년대는 그저 허리띠 졸라매고 허례허식 삼가며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시대였다. 불필요한 전화사용을 막자고 다이얼식 전화기에 자물쇠를 채워놓을 만큼 참 빡빡하게 살던 그때에 혼·분식 장려운동이 전개됐다.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흰쌀밥은 몸에 안 좋은 음식이고, 빵을 먹는 서양인처럼 밀가루를 먹어야 키가 쑥쑥 크고 힘이 세진 다는 이상한 논리가 동원됐다. 우리는 조상대대로 밥을 주식으로 먹어온 쌀의 민족 아니었던가.
 
아무튼. <내가 먹는 혼·분식, 내 몸 튼튼 나라 튼튼> <엄마의 분식솜씨 즐겨먹는 우리가족> <살림위해 분식하고 건강위해 혼식하자>라는 표어가 곳곳에 나붙었으며 학교 점심시간에는 교사가 학생의 도시락 뚜껑을 열어 보리나 밀을 잘 섞어 먹는지 검사했다. 당국은 일선 식당을 상대로 규정대로 잡곡이 30% 섞인 밥을 제공하고 있는지 단속하고 이를 어긴 식당에는 영업정지 등의 제재를 가했다.
 
1967년 시작된 정부의 혼·분식 장려정책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러다 나중에 문제가 생겨 혼·분식운동은 존폐 기로를 맞게 됐다. 경제발전으로 국민 식생활 패턴이 완전히 달라지면서 심각한 수준으로 쌀 소비가 감소했기 때문이다. 쌀 재고물량이 늘어 쌀값도 크게 폭락했다. 쌀 재배 농가의 시름이 깊어지자 정부는 부랴부랴 쌀 소비 권장 표어를 공모하고 쌀 소비촉진 결의대회를 여는 등 호들갑을 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쌀 소비는 점점 더 줄었다. 2000년대 들어 남아도는 쌀을 처리하지 못해 곤경에 빠진 정부와 지자체는 <삼시세끼 우리 쌀밥! 몸 튼튼! 농촌 튼튼!> <아침밥을 먹읍시다>라는 표어를 배포하고 제발 쌀 좀 먹어달라며 읍소하기에 이르렀다. 상황이 단단히 역전된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정부의 시책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표어도 마찬가지다. 정부 정책이 갈지자걸음을 할 때마다 표어 내용은 변덕을 부렸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인구정책 관련 표어다.
 
<자식이 재산 아닙니까? 많을수록 좋죠 / 1930년대> <3남 2녀, 다섯은 낳아야죠/ 1950년대> <아들 하나, 딸 하나면 만족합니다/ 1970년대> <딱 하나만 낳아 정성껏 잘 키우겠습니다/ 1980년대>에서 보듯 가족계획과 관련한 우리 사회 정서는 시시각각 변해왔다.
 
우리나라에서 가족계획사업이 화두로 등장한 것은 1959년의 일이다. 당시 보건사회부는 빈곤문제 해결을 위해 인구증가 억제를 국가의 주요시책으로 삼으려 했으나 무산됐다. 그러나 휴전 이후 급격한 신생아 증가(베이비부머)라는 돌발변수에 부딪힌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높은 출산율이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정부는 가족계획을 추진키로 결정했다. 이 시기에 등장한 표어가 <덮어 놓고 낳다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이었다. <3명의 자녀를 3년 터울로 35세 이전에 단산하자>라는 다소 복잡한 내용도 있었다.
 
1970년대 들어서는 3명의 자녀도 많았는지 2명만 낳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인구에 회자되던 시기다. 그러다 1980년대가 되면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며 둘도 많으니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고 목청을 높였다. 나라에서는 정관수술 받은 남성의 예비군훈련을 면제해 주었고, 불임시술을 받은 여성이 있는 가정에는 주택청약 시 혜택을 부여했다.
 
그런데 좁은 땅덩어리에서 폭발하듯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기 어렵다며 줄기차게 산아제한 정책을 펴온 정부의 기조는 2000년대 들어 180도 뒤바뀌게 된다. 심각한 인구감소가 원인이었다. 낮은 출산율과 고령화는 발등의 불처럼 시급한 과제로 대두됐다. 2011년도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1.23명으로 전 세계 222개 국가 중 211위였다. 다급해진 정부는 이전의 산아제한 정책을 전면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2000년대 들어 등장한 인구정책 표어를 보면 <가가호호 아이들 셋, 하하호호 희망한국> <자녀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형제, 자매입니다> <아빠, 혼자는 싫어요. 엄마 저도 동생을 갖고 싶어요>처럼 이전 것들과는 달라도 사뭇 다르다. 제발 아이 좀 낳아 주십사 애원하는 모양새다. 한 가정의 피임까지 국가가 나서 간여하고 통제하던 때가 엊그제만 같았는데 이제는 아이를 낳으면 지자체마다 앞 다퉈 장려금을 주고 있다. 세상 참 요지경 아닌가.
 
#에필로그: 시대를 관통하는 말, 말, 말 ------------------------
 
1956년 3·15 부정선거 당시 등장한 선거 표어는 역사상 가장 멋졌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민주당 후보 신익희의 <못살겠다 갈아보 > 구호가 국민의 큰 호응을 얻자 이승만의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수 없다>로 응수했고, 민주당이 다시 <밑져봐야 본전이다, 갈아보자>로 받아치니 상대는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표어로 맞섰다. 대개의 정치 표어는 딱딱하고 선동적이며 원색적인 비난 일색이다. 그에 비하면 1956년 대선 표어는 짧지만 강렬한 내용에 해학적인 맛까지 품고 있다.
 
<엄마, 남자는 태어나서 두 번 우는 거야? 아니야, 사람은 모두 울고 싶을 때 우는 거야>. 이 표어는 양성평등 표어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이다. 이는 자유로운 형식, 감성적인 메시지, 그러면서도 명확한 전달력을 표방하는 최근 표어의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관제’ 냄새 묻어나는 딱딱한 주제 일변도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 현대 표어의 특징이다. <밑 빠진 중독에 인생을 붓지마세요/ 도박·게임중독> <찰랑찰랑 넘치는 술, 우리가족 눈물바다/ 음주운전> <악플은 깊은 상처를, 선플은 깊은 감동을/ 인터넷문화> <그렇게 돌아다니더니 돌아가셨더라> <올 봄엔 벚꽃놀이, 내년에는 신과 함께/ 이상 코로나바이러스> <알아요, 죽고 싶은 게 아니라 말하고 싶은 거라는 거/ 자살예방캠페인> <세상에 맞을 짓은 없다/ 가정폭력>처럼 요즘은 일상에서 찾기 쉬운 생활소재형 표어들이 대세를 이룬다.
 
표어공모전도 정부기관 주최보다는 언론사, 지자체, 사회직능단체 위주로 많이 기획되고 있다. 위트 있고 기발하며, 부드럽고 아름다운 표현의 표어가 많아지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우리 사는 세상도 그처럼 말랑말랑하고 유연해졌으면 좋겠다.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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