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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23) 놀이

기사승인 2021.04.05  14:3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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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흙먼지 먹고, 풀냄새 맡으며 동심은 자란다

술래잡기 고무줄놀이/ 말뚝 박기 망까기 말까기/ 놀다보면 하루는 너무나 짧아/ 아침에 눈뜨면/ 마을 앞 공터에 모여/ 매일 만나는 그 친구들/ 비싸고 멋진/ 장난감 하나 없어도/ 하루 종일 재미있었어
 
2003년 배우 차승원이 주연한 영화 <선생 김봉두>에 OST로 삽입된 노래 <보물>의 일부 소절이다. 남성 3인조 밴드 <자전거 탄 풍경>과 어린이 합창단이 함께 부른 <보물>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서정적인 가사와 동요풍 멜로디로 사랑받았다. 2006년에는 ‘옥동자’ 정종철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KBS <개그콘서트> ‘마빡이’ 코너 오프닝 곡으로 쓰이기도 했다.
 
예전엔 정말 그랬다. 비싼 장난감 하나 없어도 아이들은 동네 공터나 신작로, 야트막한 동산, 도랑, 철둑길 아래, 논두렁 어디에서든 잘 놀았다. 학교 다녀오면 책가방을 던져놓기 무섭게 집 밖으로 나와 “00야 놀자~” “000 할 사람 여기 붙어라” 외치면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길 위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나무작대기, 고무줄 한 가닥, 버려진 깡통, 연탄재, 심지어 신고 있는 고무신까지도 훌륭한 놀이도구였고 등하굣길에 친구의 책가방을 들어주는 것조차 즐거운 놀이였던 시절, 동네 좁은 골목길은 어두워질 때까지 개구쟁이들의 해맑은 웃음과 뛰노는 소리로 활기가 넘쳤다.
 
장난감 없이도 참 잘 놀았지
 
1960~70년대 아이들은 아무런 도구 없이도 재미있게 잘 놀았다. 땅바닥에 금하나 그으면 그곳이 곧 놀이터였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술래잡기> <독장수 놀이> <말뚝 박기> <닭싸움> <다방구>처럼 장난감 없이 맨몸으로 즐길 수 있는 놀이가 수두룩했다.
 
<말뚝 박기>는 좀 과격한 편에 속하는 놀이여서 주로 남자아이들이 좋아했다.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진 쪽이 수비자가 되는데, 술래 중 하나를 마부로 세운다. 나머지는 한명씩 상반신을 숙인 뒤 앞 친구 가랑이에 머리를 끼워 말 등(안장)을 만든다. 공격자는 최대한 말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달려와 체중을 실어 힘차게 올라타는 것이 핵심이다. 이때 충격으로 말 대열이 무너지면 공격자가 이긴 것이 돼 계속 공격권을 가진다. 반대로 공격자가 중심을 잃고 말 등에서 떨어지거나 마부와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지게 되면 새로 편을 나누고 다시 놀이를 시작한다.
 
<말뚝 박기>는 주의하지 않으면 무릎이 까지고 마빡이 깨질 수 있는 좀 과격한 놀이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놀다가 다치는 일이 있어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책임을 묻는 법이 없었다. 언짢은 경우 가끔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렇게 다투고 또 그들끼리 화해하는 것이 놀이터의 관례였다.
 
[▲<말뚝 박기>놀이. 무릎이 까지고 마빡이 깨질 수 있는 과격한 놀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모험심과 협동심, 도전정신을 배우며 즐거워했다.]
<다방구(た-パンク)>는 일본어로 ‘모두 다 열렸다’는 의미다. 전봇대나 큰 기둥 하나만 있으면 쉽게 즐길 수 있는 놀이로, 일제강점기 무렵 널리 퍼진 것으로 추정된다.
 
술래가 정해지면 나머지 인원은 흩어져 꼭꼭 숨는다. 이때 무작정 멀리 도망가 숨으면 술래가 너무 애를 먹으므로 어느 정도 숨을 수 있는 반경을 정해둔다. 숨어 있다가 술래에게 적발된 아이는 술래 집(기둥)에 손을 짚고 있어야 한다. 여러 명이 잡힐수록 포로의 줄은 길어진다. 이때 잡히지 않은 아이가 몰래 술래 집에 접근해 ‘다방구!’라고 외치며 인간 사슬을 끊어주면 포로들은 모두 해방된다. 반대로 포로를 구출하지 못하고 다 잡히면 새로 게임을 시작한다. 술래가 여러 명인 경우도 있다. 이럴 땐 한명이 집을 지키고 나머지는 숨은 아이들을 찾으러 나간다. 이 놀이는 잡으려는 자와 잡히지 않으려는 자 사이의 스릴감을 높이기 위해 주로 야심한 시각에 시작했다.
 
<독장수 놀이>는 ‘꿀밤’때리기로 술래를 골탕 먹이는 게임이다. 술래는 두 사람이 있어야 한다. 둘 중 덩치가 좋은 쪽이 허리춤에 짝꿍을 둘러업는데, 마치 독장수가 지게에 독을 싣듯 짝꿍을 길게 가로로 뉘여 짊어진다. 그리고는 “독 사려, 독이요”라고 외친다. 주위의 아이들은 독이 깨진 곳은 없는지 살피는 듯 업힌 아이(독)의 머리에 꿀밤을 주며 두들긴다. 독장수는 계속 아이들 사이를 돌며 독을 사라고 외친다. 그럴수록 짓궂은 녀석들은 독을 더 많이 두들긴다. 독 역할을 하는 아이는 연이은 꿀밤세례로 눈물을 흘릴 지경이 된다. 그러다 누군가 독을 사기로 결정하면 놀이가 끝난다. 놀이를 재개하려면 가위 바위 보를 해 독장수와 독 역할을 할 술래를 다시 뽑는다.
 
개구쟁이 남자아이들에 비해 여자아이들은 비교적 놀 거리가 적었다. 나이 어린 여자아이들이 <소꿉장난>이나 <쎄쎄쎄>같은 놀이로 시간을 보냈다면 좀 더 큰 아이들은 <고무줄놀이> <실뜨기> <공기> <오자미> 등을 즐겼다. 그 중 <고무줄놀이>는 여자들만의 전용놀이였다.
 
<고무줄놀이>는 술래인 두 아이가 검정 고무줄을 맞잡고 서면 그 사이에서 발레 하듯 묘기를 펼치며 고무줄 위를 넘나드는 게임이다. 고무줄을 두 줄이나 삼각형 모양으로 벌려 놓기도 한다. 술래 없이 혼자 할 때는 고무줄을 기둥에 묶어 놓고 하면 된다. 고무줄을 뛰어넘다가 다리가 엉키거나 넘어지면 술래가 된다. 놀이 종목은 다리에 감기, 줄 밟기, 뛰어넘기, 발엇갈려 뛰기, 두 발로 줄 밟기, 땅 집고 물구나무 넘기 등 다양하다. 
 
술래가 잡고 있는 고무줄은 발목 부위에서 시작해 무릎, 허벅지, 엉덩이, 허리, 겨드랑이, 어깨, 목, 귀, 머리, 머리 위 한 뼘, 머리 위 두 뼘, 팔 뻗쳐들기 순으로 높아지기 때문에 고난도 기술을 익혀둬야 한다.
 
<고무줄놀이>의 생명은 리듬이다. 그래서 고무줄을 가지고 놀 때는 항상 노래를 부르며 박자를 맞췄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무찌르자 공산당 몇 백만이냐’로 시작해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가야 나오너라 달맞이 가자’ ‘하얀 눈 위에 구두발자국’ ‘꼬마야 꼬마야 땅을 짚어라’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까지. <고무줄놀이> 때 단골로 등장했던 레퍼토리만 떠올려도 추억은 새록새록 아름답다.
 
짓궂은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들이 놀고 있으면 슬그머니 다가가 면도칼로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쌩하니 달아나는 놈의 뒤통수에 대고 욕이나 해줄 뿐, <고무줄놀이> 때면 신출귀몰 나타나 훼방 놓는 꾸러기들의 심술은 좀처럼 막을 재간이 없었다. 고무줄이 귀했던 시절에는 그렇게 끊어진 토막을 버리지 않고 죄다 이어 누더기가 되다시피 한 것을 가지고 놀았다. 옛날 어르신들이 속옷 허리끈으로도 즐겨 쓰던 검정 고무줄은 요즘 세상에 찾아보기 힘들다. 세월이 변한 것처럼, 어린 동생을 포대기로 둘러업은 채 팔짝팔짝 뛰며 <고무줄놀이>를 했던 그 시절 언니들의 이마에도 지금쯤은 굵은 주름이 패었으리라.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동요 리듬에 맞춰 뜀뛰기 하듯 즐기는 <고무줄놀이>. 옛날 아이들은 놀이와 운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던 것 같다.]
 
장난감이 풍족치 않던 시절, 아이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연친화적 도구들을 잘 활용했다. 나무작대기는 총싸움이나 칼싸움의 재료가 되었고 <자치기> 도구로도 쓰였다. 어른들이 쓰다 버린 나무젓가락으로는 <고무줄 총>을 만들었다. 고물상에서 건져온 수레바퀴는 <굴렁쇠>가 되었고 바람 불면 수수깡에 <바람개비>를 꽂아 돌렸다. 새끼줄이 있으면 둥그렇게 묶어 <기차놀이>를 했고 모래밭에는 <두꺼비집>을 지었다. 신고 있던 고무신은 흙을 실어 나르는 트럭이 되고 승용차가 되었다.
 
조약돌로는 <공기놀이>를 했다. 버려진 깡통을 주우면 그 안에 작은 돌을 넣고 구부린 뒤 발로 차며 놀았다. 자전거포에서 얻은 엽전모양 와셔에는 습자지를 말아 끼우고 가닥가닥 찢어서 <제기차기>를 했다. 버려진 신문지나 달력종이는 <딱지> 만들기엔 그만이었다. 그뿐인가. 길가의 하찮은 돌조차 훌륭한 장난감이 되었다.
 
<비석치기>는 <망까기> 또는 <말까기>로도 불린 놀이다. 길에서 주운 어른 손바닥 크기의 넓적한 돌을 가지고 노는데 남녀가 함께 할 수 있다. 상대방의 비석(망, 돌, 말)을 3~4m 전방에 세워놓은 뒤 내 비석을 던져 쓰러뜨리는 놀이다. 놀이 단계별로 룰이 있었기에 기억을 살려 복기해 본다.
 
1단계(던지기): 3~4m 후방에서 내 망을 집어던져 술래 비석을 쓰러뜨린다.
2단계(깽깽이): 망을 앞에 던져 놓고 외발로 한걸음 뛴다. 곧 두 번째 걸음을 뜀과 동시에 땅바닥의 망을 발로 차 술래 비석을 맞춰 쓰러뜨린다. 같은 방식으로 두발 뛰어차기, 세발 뛰어차기까지 한다.
3단계(도둑발): 발등 위에 망을 올려놓은 상태로 술래 비석에 접근한 뒤 발등의 망을 떨어뜨려 비석을 넘어뜨린다. 왼발과 오른발 교대로 시행한다. 망을 떨어뜨리지 않고 상대 비석 근처까지 가야하므로 살금살금 걷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도둑발’.
4단계(오줌싸개): 두 무릎 사이에 망을 끼고 살금살금 다가가 술래 비석을 맞추어 넘어뜨린다. 엉거주춤 걷는 꼴이 꼭 바지에 오줌 싼 아이의 모습과 같다고 해서 ‘오줌싸개’라 불렀다.
5단계(가랑이): 무릎 위 가랑이 사이에 망을 끼우고 조심조심 걸어간 뒤 술래의 비석을 맞춰 넘어뜨린다.
6단계(곱사등이): 망을 등에 올려놓고 구부정한 자세로 땅을 보며 걸어간 뒤 술래 비석에 내 망을 떨어뜨려 맞춘다.
7단계(배사장): 망을 배 또는 가슴 부위에 올린다. 허리를 뒤로 젖힌 자세로 걸어가 술래 비석을 쓰러뜨린다. 걷는 폼이 꼭 배불뚝이 사장님 같다 하여 배사장이라 부른다.
8단계(신문팔이): 망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우고 목표물까지 접근한 다음 술래 비석을 조준해 쓰러뜨린다.
9단계(계급장): 좌우 어깨에 망을 올려놓고 걸어가 술래 비석을 쓰러뜨린다.
10단계(모가지): 목과 어깨 사이에 망을 끼우고 삐딱하니 걸어가 술래 비석을 맞춘다.
11단계(마빡이): 망을 이마에 올려놓은 채 하늘을 보며 다가가 술래 비석을 맞춰 쓰러뜨린다.
12단계(떡장수): 머리에 떡 광주리를 올려놓은 것 마냥 망을 머리에 이고 목표지점까지 걸어간 뒤 술래의 비석을 쓰러뜨린다.
13단계(봉사): 망을 전방에 툭 던져놓고 눈을 꼭 감은 상태로 몇 걸음 걸어가 더듬더듬 망을 찾아낸다. 계속 눈을 감은 상태로 망을 던져 술래 비석을 넘어뜨린다.
 
독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룰과 여기 서술한 내용 중 상충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지역마다, 동네마다 놀이의 규칙이 조금씩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놀이규칙 뿐 아니라 아이들이 쓰는 용어도 서로 다른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다방구>를 어느 곳에서는 <다망구>라 했다. 고무공으로 하는 유사 야구놀이를 어느 지역에서는 <찜뽕>이라 부른 반면 어떤 곳은<짬뽕>이라고 칭했다. 땅 위에 말판을 그려놓고 하는 <고누>를 <꼰진이>라고 하는 데도 있었다. 편을 가를 때 손바닥 위아래를 펴면서 지르는 구호도 ‘덴찌후레시’ ‘데덴찌’ ‘뒤집어라 엎어라’ 등등 동네마다 차이가 있었다.
 
딱지·구슬은 최고의 ‘보물’
 
1970년대 들어 문방구나 동네 구멍가게에 종이가면(황금박쥐, 아톰, 타이거마스크), 그림딱지, 구슬, 화약, 풍선, 물총 같은 장난감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알록달록 화려한 장난감이 가득 진열된 상점은 꼬맹이들에게 보물섬 같은 곳이었다. 일일이 장난감을 만들고 구해야했던 노동(?)에서 벗어나고픈 욕구에다, 보기만 해도 구미가 당기는 장난감을 외면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으니. 차츰 부모님에게 타낸 용돈으로 장난감을 사서 노는 아이들이 늘기 시작했다. 놀이판에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이다.
 
 
<구슬치기>는 겨울철에 주로 하는 놀이다. 손등이 다 터져 피딱지가 앉는 추운 날씨에도 아이들의 <구슬치기> 사랑은 말릴 수 없었다. 구슬이 없으면 새 것을 문방구나 상점에서 사야했지만 구슬을 많이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싼 값에 헌 구슬을 팔아 그 돈으로 군것질을 했다. 구슬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보통 구슬보다 두 배 정도 큰 왕구슬, 기계용 베어링에서 빼낸 쇠구슬, 사기 재질로 만든 빽구슬, 짙은 군청색을 띈 청구슬이 있었다. 특히 구슬 안에 팔랑개비 모양의 줄무늬 3~4가닥이 뒤섞여 햇살에 비추면 오색의 영롱한 빛깔을 연출했던 일명 ‘아이노꾸’ 구슬은 귀한 대접을 받았다.
 
<구슬치기> 방식은 삼각형 안에 각자의 구슬을 모아 놓고 정해진 순서대로 2~3m 밖에서 구슬을 던져 삼각형 밖으로 튕겨 내는 ‘세모치기(속칭 깔빼기)’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그밖에 마당에 주먹만 한 구멍을 몇 개씩 파놓고 그 홈에 구슬을 집어넣으며 왕복하는 ‘범들기(봄치기)’가 있었고 ‘홀짝’ ‘쌈치기’ ‘벽치기’도 있었다.
 
버려진 종이를 접어 만든 사각형 수제 딱지의 시대는 가고 상점에서 파는 원형 그림딱지가 급속도로 퍼졌다. 컬러풀한 만화가 인쇄된 그림딱지에는 계급, 별, 숫자, 글씨가 박혀 있었다. 그림딱지를 가진 아이들은 계급이나 숫자의 높낮이, 별·글씨·사람·동물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딱지를 걸고 승부를 겨뤘다. 입으로 딱지를 불어서 멀리 보내거나 새끼손가락으로 딱지를 튕겨 멀리 보내는 식의 따먹기 놀이도 했다. 가위 바위 보로 순서를 정하고 꼴찌부터 벽에서 바닥으로 딱지를 떨어뜨린 뒤 남의 딱지에 제 것이 얹히면 바닥의 딱지를 모두 차지하는 방식도 있었다.
 
딱지를 많이 가진 아이들은 박카스 통 같은 곳에 딱지를 잔뜩 넣고 다녀 그렇지 못한 아이들의 부러움을 샀다. 구슬도 마찬가지였다. 솜씨가 좋아 구슬을 잘 따는 아이들은 바지 주머니로는 감당이 안 되었는지 전리품 자랑하듯 쌈지나 신발주머니 같은 자루에 구슬을 넣어 다니며 뻐겼다. 자루 속의 구슬이 부딪힐 때마다 새어나오는 잘그락 소리는 아이들 사이에서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치부됐다. 그런 모습이 부러워 덤벼들었다가 금쪽같은 딱지와 구슬을 모두 잃고 너무 분해서 잠 못 이룬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시절, 서랍이나 궤짝에 고이 모셔두었던 딱지와 구슬만큼 귀한 보물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흙장난으로 옷이 더렵혀지고 무르팍에 풀물이 들어도, 해가 서산을 넘어 뉘엿뉘엿 어두워져도 ‘5060’세대 꼬마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다. 비가 와 밖에 나가 놀 수 없는 날은 실내에 모여 <뱀주사위놀위> <종이판 축구게임> <종이인형 옷 입히기>를 즐겼으니 하루라도 놀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을 판이었다.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광고가 유행했던 시절이 생각난다. 아이들에게는 그때가 최고의 봄날이었다.

 

 
 
#에필로그: 놀이를 잃은 아이들-------------
 
1990년대 들어 어린이 놀이문화는 급속히 쇠퇴했다. 먼지 풀풀 날리던 골목길에 보도블록과 시멘트 포장이 깔리면서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 크게 없어진 탓이다. 석필 하나로 금만 그으면 어디나 놀이터였던 흙길이 사라지자 골목은 어른들의 주차공간으로 변했다.
 
놀이터를 잃은 아이들은 TV 앞으로 몰려들었고 오락실을 배회했다. 학교 다녀오면 산과 들, 냇가에 나가 뛰놀던 아이들이 요즘은 학원 가기에도 벅찰 만큼 빠듯한 삶을 산다. 잠시 짬이 나더라도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이다. 아파트 놀이터도 키즈카페에 밀려난 지 오래다.
 
아날로그 형태의 골목놀이는 아이들의 자발성과 창의력을 함양시킨다. 다양한 놀이를 하면서 아이들은 싸움도 하고 화해를 하면서 또래와의 관계를 지속한다. 갈등조정 능력은 그런 와중에 자연스럽게 생겨나며 사고의 유연성도 마찬가지다.
 
어울려 놀이를 하다보면 협동심이 생기고 남을 배려할 줄 알게 된다. 놀이를 통해 타인과의 경쟁에서 자신이 질 수 있다는 점까지 터득한다면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동심은 흙먼지와 풀냄새 속에서 티 없이 자란다. 물론 어린이 집이나 유치원, 학교에서도 놀이를 하지만 대개 전문 강사나 지도자 인솔 하에 비자발적이고 수동적 형태로 임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예전 어린이들은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자율적으로 놀았다. 타율에 의해 행해지는 놀이는 반쯤 ‘죽은 놀이’다.
 
점점 난폭해지고, 어른 찜 쪄 먹을 만큼 되바라진 언어를 입에 담거나, 아예 대화를 하려 들지 않는 아이들이 늘고 있다. ‘주의력결핍 과잉행동증후군’이라거나 ‘틱’ 장애 같은 것은 예전에는 잘 들을 수 없던 용어다. 그런 말들은 골목놀이의 순기능이 사라진 뒤부터 부쩍 늘어났다. 행복은 성적표에 적힌 ‘수’의 개수가 아니라 누구와도 잘 어울려 지낼 때 커지는 법이다. 우리는 이 정도의 간단한 이치를 잊어버리고 산다.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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