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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㊱ - 로코와 그의 형제들

기사승인 2019.08.11  10:3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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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㊱ - 로코와 그의 형제들
 
  
  - 제작 : 1960년, 이탈리아·프랑스
  - 감독 : 루치노 비스콘티
  - 배우 : 알랭 들롱, 안니 지라르도 외
  - 필름 : 흑백
  - 상영시간 : 176분
  - 수상 : 베니스 영화제 특별상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는 표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 잘 들어맞는 말 같다. 시골에서 올라온 가족들의 각박한 생존과 해체의 과정을 묘사한 영화 ‘로코와 그의 형제들(Rocco And His Brothers)'만 봐도 그렇다.
 
‘로코와 그의 형제들’은 이탈리아 감독 루치노 비스콘티(1906~1976)가 네오리얼리즘 스타일로 내놓은 마지막 영화다. 루치노 비스콘티를 상징하는 키워드-즉 네오리얼리즘과 멜로, 그리고 데카당스(세기말적 퇴폐와 조락)의 요소를 모두 담은 이 작품은 출구 없는 폐쇄회로에 갇혀 몸부림치는 형제들의 애증과 분노, 뜨거운 우애를 그린다.
 
 
이탈리아 남부의 촌구석을 떠나 대도시로 옮겨온 어머니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다섯 형제는 나름의 방식으로 낯선 사회에 적응하려 애쓴다. 그러나 이들은 폭력과 자기 파괴의 방식으로 밖에는 달리 저항할 수 없는 어두운 현실과 맞닥뜨림으로써 분열에 직면한다. 전쟁 직후 산업화로 몸살을 앓는 도시생활에 지친 형제들은 언젠가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무지갯빛 꿈을 꾸지만, 그조차 물거품이 될 위기에 직면한다. 과연 로코의 형제들은 위기를 극복하고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까.
 
촌뜨기 형제들, 도시로 오다
 
 이탈리아 남부 시골마을에 살던 로자리아(카티나 팍시누)는 남편이 죽자 아들들과 함께 장남 빈첸조(스피로스 포카스)가 있는 밀라노로 올라온다. 최종 목적지 람브라테에 도착하기 위해 늦은 밤 버스를 갈아탄 이들은 대낮처럼 밝은 도시의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새삶에 대한  기대감으로 설렌다.
 
빈첸조가 적어준 주소는 그의 애인 지네타(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집.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그 날 빈첸조와 지네타가 약혼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깜짝 놀란다.
 
삶에 찌든 로자리아는 축하는 고사하고 “장남이 가족을 벌어먹여야지 결혼할 돈이 어디 있느냐”고 타박한다. 아들의 부양의무만 강조하는 로자리아의 태도를 보고 지네타의 엄마는 딸이 불행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결국 낯 뜨거운 말싸움이 벌어지고 약혼식은 파장난다.
 
장남 빈첸조, 둘째 시모네(레나토 살바토리), 셋째 로코(알랭 들롱), 넷째 치로(막스 까르띠에), 막내 루카(로코 비돌라지)는 월세가 밀려 쫓겨나면 나라에서 제공하는 빈민 아파트에 입주할 자격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일단 마을의 허름한 아파트를 얻어 짐을 푼다. 식구들은 날품 파는 일부터 시작한다.
 
추운 어느 겨울날, 아파트 위층의 여자 나디아(안니 지라르도)가 그녀의 아버지와 싸운 뒤 쫓겨난다. 여자의 직업은 창녀. 얇은 옷 하나만 걸친 채 복도에서 떨고 있는 나디아를 목격한 빈첸조는 좀 안 돼 보였는지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시모네와 로코는 관능미가 물씬거리는 뜻밖의 방문자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본다. 당돌하리만치 낯을 가리지 않는 나디아는 좁은 아파트의 구석구석을 훑어보며 겉옷까지 빌려 입는다. 빈첸조의 복서시절 사진이 담긴 신문기사(벽 한쪽에 붙어있다)를 본 나디아는 도시에서 큰돈을 벌려면 복서가 되라고 말한다. 한때 복서로 가족을 부양했던 빈첸조는 맞는 고통을 잘 알기에 동생들이 권투를 못하게 말리지만 엄마는 자식들이 얻어맞아서라도 돈을 벌어오길 은근히 기대한다.
 
시모네와 로코는 여자의 말대로 복싱 도장을 찾아간다. 변변한 운동복이 없어 내복차림으로 링에 오른 형제들은 관원들의 웃음거리가 되지만 터프한 시모네는 프로모터의 눈에 들어 더 좋은 체육관으로 스카우트된다. 얼마 뒤, 시모네는 첫 게임에서 통쾌한 KO승을 거둔다. 그리고 나디아가 시모네를 찾아온다.
 
빈첸조는 공사장 인부로 일하고, 셋째 로코는 세탁소에 취업한다. 야무진 넷째 치로는 공장에 다니며 틈틈이 공부를 하여 기술자격증을 딴다. 꼬맹이 루카도 편의점 물건을 배달한다. 형제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열심히 일하며 각박한 도시생활에 적응하려 애쓴다. 그러나 둘째 시모네만은 잠깐의 성공에 도취돼 일탈의 길을 걷는다.
 
시모네는 나디아와 호텔방에서 뒹군다. 꾀병 핑계로 훈련도 빼먹는다. 나디아의 매력에 빠진 시모네는 그녀를 결혼상대로 여기지만 왠지 나디아는 시모네와 적당히 거리를 두려 한다.
 
술과 담배, 여자에 빠진 시모네는 용돈을 빌리기 위해 로코의 세탁소를 찾는다. 세탁소에서 셔츠를 훔쳐 입고 나온 시모네는 옷을 돌려주기 위해 다시 세탁소에 갔다가 세탁소 여주인을 유혹하여 그녀의 브로치까지 훔치는 뻔뻔한 행동을 한다. 시모네는 훔친 브로치를 나디아에게 선물한다.
 
며칠 뒤 로코를 만난 나디아는 브로치를 돌려주며 시모네가 더이상 자신을 찾지 않게 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한편 로코는 입영통지서를 받고 입대한다. 그 사이, 시모네는 지역챔피언이 되고 빈첸조는 분가한 뒤 지네타와 결혼하여 예쁜 아기를 낳는다.
 
공장에 다니는 치로 이외에는 변변한 수입이 없는 집안 살림은 여전히 궁핍하다. 엄마는 군에 간 로코에게까지 돈이 있으면 좀 부쳐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은행을 다녀오던 로코는 길에서 우연히 나디아를 만난다. 그녀는 매춘 행위로 잡혀 들어갔다 출감하는 길. 로코는 나디아를 동정하며 두려움을 버리고 믿음을 가지라는 애정 어린 충고를 한다.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로코의 따뜻한 심성을 알게 된 나디아는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헤어진다.
 
제대한 로코는 오랜만에 복싱체육관에 나가 훈련한다. 나디아가 떠난 이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시모네는 여전히 체육관과 불협화음을 보이고 있는 상태. 대체자원을 찾으려 골몰하던 관장은 로코의 기량을 눈여겨본다.
 
밀라노에 돌아온 이후 재회한 로코와 나디아는 어느덧 사랑의 감정을 나누며 데이트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반면 시모네는 경기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패배한다. 복싱 관장은 시모네가 끼친 피해를 보상하라며 로코를 압박한다. 정식 복서로 데뷔하라는 압력이다.
 
어느 날, 시모네는 친구들과 함께 로코와 나디아가 밀회를 나누고 있는 장소를 급습한다. 패거리가 로코를 붙잡아 둔 사이 질투심이 폭발한 시모네는 나디아를 강간한다. 불가항력의 상황에 로코는 피눈물을 흘리고, 만신창이가 된 나디아는 울부짖으며 그곳을 떠난다.
 
형의 여자를 사랑했던 것부터 잘못이었다고 자책하는 로코. 시모네가 짐승처럼 변해버린 것이 모두 자신 때문이라며 괴로워하던 로코는 나디아에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나디아는 그런 로코를 향해 “우리의 사랑은 무엇이었냐”고 쏘아붙인다. 로코를 만나면서 인생의 즐거움을 알게 됐던 나디아는 절망에 빠져버리고 만다.
 
그날 이후, 냉소적으로 변해버린 나디아는 형제의 아파트로 옮겨온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아니면 복수하려는 심정인 듯, 나디아는 보란 듯이 집 안에서 시모네와 뒹굴며 온 가족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다 엄마 로자리아와 말싸움 끝에 종적을 감춘다.
 
도박과 술에 빠져 거의 폐인이 된 시모네는 이제 도둑질까지 한다. 도시에서 타락해 가는 시모네를 바라보는 로코의 마음은 찢어진다. 자책을 이기지 못하는 로코는 시모네의 빚을 갚기 위해 불리한 계약을 감수하고 링에 오른다. 그리고 쌓인 분노를 발산하듯 상대를 두들겨 침몰시킨다.
 
한편 창녀의 생활로 돌아간 나디아의 행방을 알게 된 시모네는 그녀를 찾아 나선다. 강둑으로 연결된 한적한 벌판에서 나디아를 만난 시모네. 그러나 나디아는 이미 자신의 행복을 빼앗아 버린 시모네에게 뼛속 깊은 증오를 가진지 오래다. 나디아는 애타게 구걸하는 시모네를 차갑게 외면한다. 더 이상 나디아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한 시모네는 품 안의 칼을 꺼낸다. 수차례 잔인한 칼질 끝에 나디아는 그 자리에서 절명한다.
 
나디아가 숨을 거두던 시각, 로코는 화끈한 승리를 거두고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다. 로코의 승리를 축하하는 파티가 열리는 저녁, 샴페인이 터지고 동네 전체가 축제분위기로 들썩이지만 시모네만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언젠가 시골로 돌아갈 날이 올 거야.” 형제들은 자신들이 떠나온 시골, 그러니까 올리브 나무와 달빛과 무지개가 아름다운 고향을 떠올리며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때 울리는 초인종 소리.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초췌한 모습의 시모네다. 그리고 시모네를 통해 나디아의 죽음을 알게 된 로코는 처절하게 절규한다.
 
며칠 후. 막내 루카는 형 치로의 일터를 찾는다. 치로는 시모네를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뛰쳐나간 뒤 이제껏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상태다. 치로는 자신을 원망하고 있는 루카를 향해 “너도 좀 크면 내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생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너 하나뿐일 것”이라며 “고향이라고 해서 변하지 않았겠니? 모든 게 변해도 너의 인생만큼은 정의와 진실로 가득 차 있기를 바란다.”며 동생을 격려한다.
 
형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루카는 로코의 연승 소식을 알리는 신문이 여러 장 내걸린 가판대를 응시한다. 작은 손을 내밀어 신문에 실린 로코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루카는 이윽고 공장지대의 잿빛 공간을 뚫고 힘차게 달리기 시작한다.
 
다섯 손가락과 같은 존재들
 
 별 존재감이 없는 장남 빈첸조, 인생의 막장에 몰린 시모네, 성자의 내면을 갖췄지만 현실적이지 못한 로코, 접시에서 콩을 골라내듯 곪은 상처는 뽑아내려는 치로, 이들을 보며 인생을 배워가는 루카. 한 배에서 나왔지만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로코의 형제들은 언제나 함께 있어야 할 다섯 손가락 같은 존재다. 그러나 비정한 도시는 이들 다섯 손가락을 하나씩 찢어낸다.  거기에 억척스럽고 소란스러우며 적당히 염치없는 엄마의 모습은 이 영화가 결코 우리네 삶과 무관치 않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루치노 비스콘티 감독은 이탈리아의 명문 비스콘티 백작가문의 아들로서 인생의 꽃길이 보장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얻은 정치적 자각을 통해 반파시스트 저항운동에 투신해 구속되는 등 가시밭길을 걸었다. 이후 공산당 활동과 연극연출가의 길을 거쳐 영화계에 투신했다. 그의 데뷔작 ‘강박관념(1943)’은 이탈리아 최초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로 평가받는다.
 
젊은 날의 눈부신 외모를 과시하는 알랭 들롱(당시 25세. 같은 해 발표된 ‘태양은 가득히’를 통해 세계적 스타로 발돋움 한다), 출연 분량은 적지만 신인 때의 풋풋함을 보여주는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에서 빨치산부대의 걸걸한 여전사로 나와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카티나 팍시누(엄마 역)의 연기가 볼만하다.
 
특히 바닥으로 질주하며 분노와 광기, 야수의 반항을 표현한 레나토 살바토리(시모네)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안니 지라르도(나디아)의 육감적이며 몸을 던지는 연기는 압권이다. 두 사람은 2년 뒤 결혼해 실제 부부가 됐다.
 
음악은 거장 니노 로타가 맡았다. 그의 감성적 멜로디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랴. 주세페 로툰노의 카메라도 좋다. 첨탑과 수많은 조각상으로 장식된 밀라노 성당에서의 로코와 나디아 이별 신은 너무 멋지다. 다섯 개 섹션으로 나눠 시간을 채집하듯 형제들의 삶을 따라가는 구성도 신선하다. 국내 개봉 때 제목을 ‘젊은이의 세계’라고 좀 이상하게 단 것만 빼면 모든 게 괜찮다.
 
‘로코와 그의 형제들’은 왠지 한국영화 ‘초록물고기(1997)’를 생각나게 한다. 도시화와 산업화에 밀려 먼지처럼 흩어지고 해체되는 가족의 혼란스런 정체성을 그린 ‘초록물고기’에도 다섯 남매가 나온다. 남편이 죽은 후 파출부로 일하는 엄마,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장남, 술에 찌들어 줄곧 행패를 부리는 둘째, 트럭 행상을 하는 셋째, 그리고 막 군에서 제대한 넷째 막둥이(한석규), 다방 레지가 된 여동생이 그들이다.
 
막둥이 가족은 엄마 생일에 물가로 야유회를 갔다가 의견충돌로 대판 싸운다. 유원지는 아수라장이 되고, 막둥이는 차를 운전해 그런 가족의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 너무나 씁쓸한 장면이다. 이들 가족의 꿈은 작은 식당을 하며 함께 모여 사는 것이지만 막둥이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변수를 맞는다.
 
꿈은 혼자 꿀 때보다 여럿이 꿀 때 현실이 된다. 하지만 로코와 막둥이 형제의 소박한 꿈은 냉혹한 현실 앞에서 좌초한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지만 사실 무성한 ‘가지’는 아무 죄가 없다. 문제는 ‘가지’를 흔들고 또 흔들어 대는 무심한 세상의 ‘바람’이다.
 
 

silverinews 진고개 신사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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