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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① 노포 음식점

기사승인 2020.06.01  15:4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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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삶의 시름 덜어주던 국밥 한 그릇의 추억

 
‘노포(老鋪)’는 일본 말 ‘시니세(しにせ)’에서 유래된 단어로, 대를 물려 내려오는 오래된 점포나 기업을 일컫는다. TV 등을 통해 일본의 초밥집이나 소바(국수)음식점이 대를 이어 운영하는 모습을 보곤 했는데, 그럴 때면 작은 가업이라도 전통을 이어 보전하려는 그네들의 정신세계에 조금은 부러움을 느끼곤 했다. 2017년 조사에 따르면 일본에는 100년 넘는 노포가 3만 개 이상 되며 1,0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곳도 7개나 된다.
 
116년 전통에 빛나는 설렁탕집
 
실제로 일본에는 400~500년의 역사를 가진 음식점이 적지 않지만 우리나라는 1904년 문을 열어 116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종로의 ‘이문(里門)설농탕’이 최고령 음식점으로 꼽힌다.
 
대한제국 말 서울 종로 3가에서 ‘이문옥(里門屋)’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이 식당은 일제강점기에는 ‘이문식당’이라는 상호로 영업했다. ‘이문(里門)’은 지금의 서울 YMCA 뒤편 일대를 지칭했던 옛 지명이다. 이후 ‘이문설농탕’으로 간판을 바꾼 뒤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서울시 허가 제1호로 공식 등록된 음식점이다. 2011년 도심 재개발 사업으로 밀려나 지금은 종로 견지동 뒷골목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
 
▲철거 전의 ‘이문설농탕’. 일제 강점기에 지은 건물로 추정되는 2층 한옥이다.
 
▲1949년 11월 4일자 서울신문에 실린 ‘이문설렁탕’ 광고.
소 지라가 꼭 들어가는 서울식 맑은 설렁탕을 전문으로 내놓는 ‘이문설농탕’은 종로를 주름잡은 주먹 김두한이 어린 시절 종업원으로 일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며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고(故) 손기정의 단골식당이기도 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 남로당 당수 박헌영, 국어학자 이희승과 양주동, 코미디언 송해 등이 이 집을 자주 찾았다.
 
서울은 한때 설렁탕의 도시라 할 만큼 많은 설렁탕집이 성업을 이뤘다. 한 요식업 관계자의 증언에 따르면 구한말 이후 수표교, 광교 등에 명물집이 많았고 6.25 때까지만 해도 남대문 밖의 ‘잼배옥’, 염천교 앞의 ‘복순옥’, 시내의 ‘대림옥’, 세운상가 앞의 ‘감미옥’ 등이 유명했다고 한다. 이들 상호의 말미에 유독 ‘옥(屋)’자가 많이 들어가는 것은 일본식의 영향이다.
 
서민의 애환이 서린 곳
 
서울에서 추탕(鰍湯;미꾸라지 탕)솜씨로 자웅을 겨루던 3대 노포가 있었다. 평창동 ‘형제추어탕(1926년 개업)’과 을지로 ‘용금옥(1932년)’, 용두동 ‘곰보추어탕(1933년)’이 그들이다. 서울식 추어탕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이들 중 ‘형제추어탕’과 ‘곰보추어탕’은 안타깝게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현재 폐업한 상태다.
 
서울식 추어탕은 사골국물에 통 미꾸라지와 두부, 버섯, 유부 등을 넣고 끓이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에 고추장과 고춧가루 양념을 더하여 맑고 시원한 국물 맛을 내는데, 육개장과 흡사한 비주얼이다. 반면 남도식 추어탕은 으깬 미꾸라지에 우거지를 넣은 뒤 된장과 들깨가루를 풀어 걸쭉하게 끓여 낸다. 구수하고 얼큰한 국물은 남도식 추어탕의 자랑이다.
 
‘용금옥’은 1973년 남북조절위 3차 회의 때 북한의 박성철 부주석이 “용금옥이 아직도 잘 있냐”고 물어 화제가 됐던 곳. 1990년 남북 화해시기 때는 북의 연형묵 총리가 서울에 와서 이틀 연속 이 집의 추어탕을 먹어 널리 회자됐다. 조병옥 박사와 시인 정지용, 변영로, 박종화 등 정치인과 유명 문인, 예술가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용금옥은 경쟁 노포들이 사라진 중에도 여전히 붉고 매운 국물 맛이 특징인 서울식 추어탕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이름난 노포들의 메뉴를 보면 대개 설렁탕, 곰탕, 해장국 같은 국밥이 주를 이룬다. 서울 중구 남창동 ‘은호식당(꼬리곰탕·1932년)’, 피맛골의 터줏대감 ‘청진옥(해장국·1937년)’, 을지로에서 옮겨와 명동의 전설로 자리 잡은 ‘하동관(곰탕·1939년)’, 나주의 ‘하얀집(곰탕·1910년)’ 등은 국밥 하나로 백년의 명성을 쌓아가는 대표적인 노포들이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뜨거운 국물에 밥을 말고 소, 돼지의 고기와 그 부산물을 푸짐하게 담아낸 국밥은 가난한 이들의 한 끼를 든든하게 책임졌다. 뿐만 아니라 매양 술에 찌들어 사는 소시민의 쓰린 속을 달래는데 국밥만큼 안성맞춤인 음식도 없었다. 이처럼 국밥은 서민의 정서와 애환을 듬뿍 머금고 있었으니, 이를 대표 메뉴로 삼는 노포가 수적 우위를 점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국밥 얘기가 나온 김에 개장국에 대한 언급을 조금만 하자. ‘영양탕’ ‘보신탕’ ‘사철탕’ ‘멍멍탕’의 별칭을 갖고 있는 개장국은 조선시대 때부터 평민은 물론이고 사대부 귀족과 왕실에서도 즐겨먹던 기호식품이다. 식용으로 소를 잡는 것이 불법이던 시절, 개를 잡아 조리한 개장국은 훌륭한 단백질원인 데다 맛 또한 좋아 큰 사랑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1770년(영조 46년) 충남 서천군 판교면 백중장에서 개장국을 최초 시판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보다 앞서 1670년(현종 11년) 만들어진 고전 조리비법서 <음식디미방>에 개고기 손질법이 실려 있을 만큼 개장국은 대중적인 음식이었다.
 
▲1940년대 조선일보에 실린 개장국 광고.
 
위는 1948년 5월 6일자 조선일보 2면에 실린 서울 중구 수하동의 개장국 전문식당 ‘부춘관’ 광고다. ‘乞(걸) 1차 시식(한 번 맛봐 주십시오)’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그 아래는 같은 해 6월 24일자 신문에 실린 것이다. 세종로에 있던 ‘진미옥’ 광고인데, 역시 ‘여름철 보신제’라는 점을 강조하며 손님을 부르고 있다.
 
사대문 안에서 대놓고 당당하게 개장국을 광고하던 세태를 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개장국은 88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비위생적인 도축과정, 환경단체의 반발로 인해 지금은 전문식당이 많이 자취를 감춘 실정이다. 사회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부산 금정구의 ‘박달집’은 지금도 성업 중인 대표적인 개장국 전문 노포다. ‘박달집’은 1920년 평양에서 ‘성천관’이라는 이름으로 개업한 후 전쟁 중 남하한 뒤 오늘날까지 보신탕 애호가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으며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따끈한 국밥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면 시원한 냉면 역시 한국인의 입맛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장르다. 냉면은 ‘평양’이냐 ‘함흥’이냐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질 만큼 열렬한 팬덤층을 형성하고 있는 대표적인 음식. 평양냉면의 대부로 통하는 서울 주교동 ‘우래옥’은 1945년 ‘서북관’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시작한 이래 여전히 성업 중이다. 6.25때 피란을 다녀온 뒤 재오픈하면서 ‘다시 또 왔다’는 의미로 ‘우래옥(又來屋)’이라는 상호를 내걸었다. 현재 상호를 1969년 등록하여 지금껏 사용하고 있으며 이는 대한민국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상표다.
 
메밀가루를 면발의 주된 재료로 사용하는 우래옥이 육향 진한 평양냉면의 지존으로 강호를 제패했다면 중구 오장동의 ‘오장동 함흥냉면(1953년)’은 감자와 고구마 전분을 사용한 쫀득한 식감과 새콤달콤한 맛으로 쌍벽을 이루는 함흥냉면의 절대강자다. 이 집의 베스트 메뉴는 가자미 무침을 고명으로 얹은 회냉면. 오장동 쪽에 주로 젊은 층의 손님이 몰린다면 우래옥은 백발성성한 실향민 어르신들이 많이 찾는 편이다. 우래옥 물냉면 한 그릇 가격은 14,000원으로 다소 부담스러운 편이지만 평양냉면의 고유한 맛을 가장 잘 재현하는 집이라는 평가답게 전국 팔도에서 발품을 들여 이곳을 찾는 애호가들이 적지 않다.
 
불고기의 역사를 새로 쓴 '한일관'
 
정통 한식집으로 가장 명망 높은 노포는 누가 뭐래도 ‘한일관’이 아닐까 싶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화선옥’이란 이름의 국밥집으로 종로 3가에서 개업한 뒤 1945년 해방과 함께 ‘한일관’으로 상호를 바꾸고 종로 1가로 이전했다.
 
 
▲1957년 10월 5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한일관 광고. 종로본점 건물의 신축을 홍보하고 있다.
 
불고기 메뉴는 오늘의 ‘한일관’을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 과거 불고기는 양념한 고기를 석쇠에 구워먹는 방식이었다. 소 내장을 저미고 전통양념을 뿌려 불 위에서 구워내는 고기구이로 시작한 한일관 불고기는 광복 후에는 살코기를 양념에 재워 불에 구워내는 형태로 진화했다.
 
‘한일관’ 창업자 신우경 여사는 당시 한일관 직원이던 박영태와 함께 독자적인 풍로와 불판을 개발해 ‘육수불고기’라는 신메뉴를 선보였다. 이때 개발한 불판 덕에 한일관 불고기는 자작한 육수에 고기, 당면, 만두 등을 함께 넣어 조리할 수 있는 형태로 진화했다. 신우경은 궁중 너비아니 양념을 본떴다 해서 이를 ‘궁 불고기’라 불렀다. 세상 처음 먹어보는 불고기 맛에 장안은 뒤집혔고 한일관은 연일 북새통을 이뤘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서울 위주로 이어졌다. 식당은 유동인구가 많은 대도시에서 성행하기 마련이고, 그러다보니 서울에 유명 노포가 많이 남아있어 그리된 것 같다. 물론 지방에도 대를 이어 전통을 이어오는 노포들이 꽤 있다. 대구의 ‘안면옥(냉면·1905년)’, 경기 하남의 ‘마방집(장작불고기·1918년)’, 전남 해남의 ‘천일식당(떡갈비·1924년)’, 경남 진주의 ‘천황식당(육회비빔밥·1927년)’, 울산 남구의 ‘함양집(비빔밥·1924년)’, 전주의 ‘삼백집(콩나물국밥·1945년)’ 등은 우직하게 대를 이어 가업을 계승하고 있는 지역의 자랑스러운 백년식당들이다.
 
노포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
 
일본 야마나시 현 소재 게이운칸 료칸(여관)은 서기 705년에 오픈해 현재까지 영업 중인 유명한 업소다. 무려 1,3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숙박업소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는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노포는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조선시대 때부터 사농공상(士農工商)이란 서열을 두어 장사를 천한 직업으로 여겼다.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치’라 표현하며 비하했다. 처지가 그러하니 대를 이어 장사를 하겠다고 나서는 이가 적었다. 우리가 오랜 역사의 노포를 가질 수 없었던 첫 번째 이유다.
 
노포는 사회가 안정적일 때 활성화된다. 근대화로 가는 길목에서 일제지배, 해방정국, 전쟁, 쿠데타 등 숱한 격변을 겪으며 안정감 없는 피로사회를 살아온 우리다. 이런 환경에선 노포가 육성되기 어렵다. 우리가 오랜 역사의 노포를 가질 수 없었던 두 번째 이유다.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는 국민적 습성도 노포의 번성을 저해한 요인이다. 밥과 술을 파는 직업은 항상 고된 일로 여겨졌다. 조금만 돈을 벌면 권리금 받고 가게를 팔아넘기거나 주방을 떠나 카운터나 지키며 편히 살아보는 게 꿈이 돼 버렸다. 언감생심, 누가 그 힘든 식당 일을 자식에게 물려주려 했겠는가. 우리가 오랜 역사의 노포를 가질 수 없었던 세 번째 이유다.
 
장사를 잘하고 있던 음식점들 중에는 도심개발 사업에 밀려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고 명맥이 끊긴 경우도 허다하다. 얼마 전 서울의 ‘을지면옥’이 세운상가 일대 개발로 36년의 역사를 접고 사라진 것은 좋은 예다. 노포는 보수적인 도시환경 아래서 활성화되기 쉬운 법이다. 자고나면 도시를 뜯어고치는 현실에서 노포가 살아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랜 역사의 노포를 가질 수 없었던 네 번째 이유다.
 
다행인 것은 최근 들어 나타나는 작은 변화의 조짐들이다. 일종의 마이스터(Meister)인식이 확산되면서 셰프(Chef)라는 직업이 각광을 받는 등 음식장사를 대하는 긍정적 시각이 생겨나고 있다. 대학의 조리학과 인기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으며 요즘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식당을 백년점포로 이끌어 가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드러내고 있다.
 
행정당국도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각 지자체들은 지역의 노포를 미래유산으로 지정해 보전정책을 펴나가고 있다. 서울시의 경우 일본식 냄새가 짙은 ‘노포’의 명칭을 ‘오래가게’라는 새 표현으로 바꿔 부르는 등 분위기 개선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유명한 노포 음식점 중 일부는 분점을 내거나 프랜차이즈 사업 진출 등으로 다각화, 기업화하는 것이 요즘 추세다. 세상은 변했고 인심마저 잃어가고 있지만 다행인 것은 아직도 세월의 흔적이 남은 빛바랜 벽지와 손때 묻어 반들거리는 탁자를 간직하고 변함없는 모습으로 손님을 맞아주는 정겨운 노포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다 노포로 대접받는 것은 아니다. 대세와 유행에 휩쓸리지 않으며 전통을 고수하는 우직함, 정직과 성실, 넉넉한 인심, 그리고 최고의 맛이 어우러질 때 진정한 노포로 인정받는다.
 
 
그곳에는 그리운 정이 있다-이런 퀴즈가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답이 나왔다. ‘공짜 술’이라는 둥, ‘훔친 사과’라는 등. 정답은 ‘어머니의 음식’이다. 그러자 누군가 이의를 제기했다. “우리 엄마는 음식 못하는데요.”
맞다. 세상의 모든 엄마가 음식을 다 잘하리란 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있는 음식을 표현할 때면 우린 엄마의 손맛을 떠올린다. 왜일까. 엄마의 음식에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정성과 그리움이 잔뜩 묻어있기 때문이다.
내게도 단골 노포가 있다. ‘엄마의 손맛’처럼 따스한 정이 담긴 음식이 생각날 때면 이따금 들르는 곳이다. 연륜 지긋한 주인장이 토렴한 국밥과 한 종지의 깍두기를 내왔다. 따끈한 국밥을 한입 떠 넣자 예의 진한 추억과 그리움이 밀려왔다. 소주가 필요했다.
 
 
▲ 연재를 시작하며 ---------------------------
 
1945년 광복과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우리사회는 빈곤과 무지에서 탈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쓰며 발전과 변화의 길을 걸어왔다. 그 시절, 높다란 철 대문 양옥집에 사는 부자는 식모를 부리고 운전기사가 모는 승용차 뒷좌석에 자식을 태워 등하교를 도왔던 이면에, 못사는 집 부모는 금지옥엽처럼 키운 딸자식을 대처의 식모로, 버스 차장으로, 봉제공장 시다로 내보내며 눈물을 삼켰던 아픔이 우리에겐 있다. 특히 1950년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공간은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라는 기치 아래 똘똘 뭉친 우리 국민들이 가장 치열하게 부대끼며 고단한 삶을 살아온 시기였다.
 
오늘부터 격주로 연재하는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는 그 시절 우리들이 경험한 사회의 단면을 되돌아보는 시리즈다. 가깝게는 최근 30년 전의 문화현상부터 멀게는 70~80년 전, 근대화의 발걸음을 떼어놓던 시절의 이야기가 마치 ‘대한늬우스’의 한 장면처럼 전개될 것이다. 한때 우리의 일상과 의식세계를 지배했던 에피소드를 하나씩 드러내 반추할 이번 연재가 각박한 현대의 삶 속에서 당신의 잃어버린 추억을 일깨워 주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여행이 막 시작됐다.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편집자】
 
 
▲ 작가 박영신 ---------------------------

1959년생.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석사과정)에서 신문학을 전공했다. 젊은 시절 신문사와 잡지사 기자로 10여 년 활동하며 취재하고 글 쓰는 일에 종사했다. 인생이 꼬여서 한때는 손톱 밑에 새까만 기름때가 끼는 사업에 매달리기도 했다. 기자 시절보다 당시 수입은 몇 배 더 많았지만 그리 행복하지는 못했다. 글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려 수년 전부터는 프리랜서 작가로 데뷔, 자서전 대필과 언론사 칼럼 기고를 시작했다. 기회가 닿아 대학에서 학부생을 대상으로 글쓰기 특강을 하는 행운도 누렸다. 2년 전 강릉으로 이주한 뒤에는 물에 나가 고기 잡아 먹고, 산에 올라 나물 캐 먹는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실은 ‘백수’나 다름없다. 해서 한 달에 몇 번은 막노동판에 나가 용돈을 벌기도 한다. 저서 <영화 100년 인생 100년>.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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