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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② 라면

기사승인 2020.06.15  15:5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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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상에 라면이 없었더라면…

“홍수환이 챔피언된 것도 다 라면 먹고 이룬 거야. 뭐, 복싱뿐만이 아니야. 그 누구야. 현정화, 현정화 걔도 라면만 먹고, 음? 금메달 3개씩 따버렸어.”
“임춘애입니다. 형님.”
“나가 있어!”
그리고 두들겨 맞는 꼬붕.
 
1997년 개봉한 영화 ‘넘버3’의 한 장면이다. 삼류킬러 조필(송강호 분)이 부하들 앞에서 헝그리 정신을 강조할 때 나오는 에피소드다. 자신의 무식함을 지적하는 부하를 두들겨 패며 분을 삭이던 송강호의 연기가 눈에 선하다.
 
실제로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육상 3관왕에 오른 임춘애(당시 17세)는 “라면만 먹고 운동했어요. 우유 마시는 친구들이 부러웠고요”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훗날 이 표현은 기자의 왜곡보도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긴 했지만 임춘애는 국민들로부터 ‘라면소녀’라는 애칭을 얻으며 많은 동정과 후원을 받았다.
 
▲초창기 삼양라면의 광고 모델.

 

이처럼 라면은 가난의 상징이었으며 서민의 애환이 얽혀있는 음식이었다. 쌀을 주식으로 삼던 우리 민족이 전쟁 후 식량부족을 겪자 대체식품으로 들여온 것이 바로 라면이다. 라면은 저개발의 쓰라린 기억과 경제부흥의 기적을 동시에 경험한 우리 국민들에겐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의 먹거리 중의 하나다.

 
저개발과 가난의 상징 라면
 
라면은 전쟁의 후유증이 온전히 가시지 않은 1963년, 국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해 도입한 인스턴트식품이다. 국내에서 라면 개발에 앞장섰던 이는 삼양식품 창업주 전중윤(1919~2014)이다. 그는 라면 종주국 일본의 도움을 받아 국내에 생산 설비를 갖추고 이 땅에서 최초로 라면을 출시한 인물이다.
 
전중윤이 라면사업에 뛰어든 배경에는 슬픈 일화가 깃들어 있다. 당시 제일생명 사장이었던 전중윤은 남대문시장 근처를 걸어가다 ‘꿀꿀이 죽’을 사먹으려고 모여 있는 사람들의 긴 행렬을 보았다. ‘꿀꿀이 죽’은 미군부대에서 나온 잔반들을 모아 끓여낸 음식. 담배꽁초 같은 불순물이 섞인 그 냄새나는 죽을 서로 먹겠다고 다투는 굶주린 자들의 처참한 꼴을 목도한 전중윤은 그만 충격에 빠졌다.
 
찌든 가난에 먹을 것이 부족해 고통 받는 국민을 안타깝게 여긴 전중윤은 일본 출장 때 눈여겨보았던 라면을 떠올렸다. 즉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JP)을 만나 사정 끝에 5만 달러를 지원받은 전중윤은 일본 묘조(明星)식품의 오쿠이 기요즈미 회장을 찾아가 애걸복걸하다시피 하여 라면 생산에 필요한 기술제휴를 성사시켰다.
 
▲‘꿀꿀이 죽’으로 배를 채우던 시절.
 
돈벌이의 목적보다는 조국의 배고픈 현실을 타개해 보겠다는 충정으로 한 달가량 묘조식품에 출근하여 공부하는 전중윤의 열정에 감복한 오쿠이 회장은 라면제조기계 2대를 싼값에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마법의 가루’로 불리던 전설의 분말스프 배합서마저 은밀히 건네는 우정을 과시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전중윤은 삼양식품의 전신인 삼양제유를 설립했으며 이후 회사 이름을 삼양공업주식회사로 바꾼 뒤 곧 라면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1963년 9월 15일은 ‘삼양라면’이 처음으로 출시된 날이다. 한 봉지 가격은 10원(중량 100g). 당시 꿀꿀이죽 1그릇 5원, 짜장면 1그릇 20원, 담배 한 갑 25원, 커피 한잔 35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라면 1봉지 가격은 서민들에겐 그리 만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때의 10원을 현 시세로 환산하면 대략 2,000원쯤 된다. 때문에 서민의 주린 배를 채워주려는 의도로 공급된 라면은 오히려 부자들의 기호식, 환자대용식, 손님 접대용 같은 고가의 먹거리로 치부되어 판매에 애를 먹였다.
 
당시의 라면은 가격도 문제였지만 익숙지 않은 맛 때문에 대중의 폭넓은 선택을 받지 못했다. 일본인의 입맛에 맞춘 기술을 국내시장에 그대로 적용한 것이 문제였다. 특히 느끼하고 심심한 닭고기 육수 맛은 고객들이 가장 불만스럽게 여기는 부분이었다. 이에 삼양 측은 고객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시식회를 열어 대대적인 홍보전을 펼쳤다. 또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평가를 부탁했는데, 박정희는 한국인의 기호에 맞도록 고춧가루를 더 첨가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1966년 240만 봉지에 머물었던 라면 소비량은 1969년 들어 1,500만 봉지가 팔려나가는 눈부신 신장세를 보인다. 여기에는 1965년 박정희 정부가 실시한 혼분식 장려정책이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러자 ‘농심’의 전신인 ‘롯데공업’이 ‘롯데라면’을 내세워 시장에 뛰어들었고 군소 식품업체들도 공격적으로 경쟁에 가세하기 시작했다. 혹시 ‘풍년라면(동명식품)’ ‘닭표라면(신한제분)’ ‘해표라면(동방유량)’ ‘아리랑라면(풍국제면)’ 등의 상표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삼양과 롯데를 제외한 이들 군소업체들은 모두 2~3년의 짧은 역사를 뒤로하고 곧 모습을 감췄다.
 
 
 ▲1963년 출시된 최초의 라면.(왼쪽)  ▲1960년대의 롯데라면.(오른쪽)
 
대중의 필수식품으로 자리 잡다
 
1970년, 롯데는 지금 형태의 쇠고기육수를 베이스로 하는 ‘소고기라면’을 개발하여 공전의 히트를 친다. 이때의 성공으로 선두기업 삼양 추격에 탄력을 받은 롯데는 공격적인 신제품 개발로 시장점유율을 넓혀갔다. 1975년에는 ‘농심라면(코미디언 구봉서와 후라이보이의 ‘형님 먼저~ 아우 먼저’ 광고로 유명했던 제품)‘이 성공한 것을 계기로 회사명을 아예 ‘농심’으로 바꿨다.
 
그 뒤 농심은 영원한 베스트셀러로 군림하는 ‘신라면’을 출시하면서 마침내 삼양을 제치고 라면업계 부동의 1위 자리를 빼앗게 된다. 반면 ‘신라면’의 출현으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은 삼양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89년 이른바 ‘공업용 우지(牛脂)라면 파동’ 사건을 겪으며 파산직전까지 내몰렸다.
 
사건은 삼양식품이 면을 튀길 때 식용이 아닌 ‘공업용 쇠기름’을 사용했다는 익명의 투서에서 시작됐다. 당시 삼양은 미국에서 2등급 우지를 수입해 썼다. 이는 정부의 허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미국의 축산물기준이었다. 미국은 등급에 따라 식용우지와 공업용우지를 구분 짓는 나라였다. 특히 총 16등급 중 1등급에게만 ’식용(edible)’이란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국의 기준일 뿐이었다. 라면 종주국 일본도 당시 2등급 우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검찰은 왜곡된 잣대만으로 삼양을 계속 흔들었다. 그 바람에 ‘공업용 쇠기름으로 라면을 튀겼다‘는 오명을 뒤집어 쓴 삼양은 천하의 못된 기업으로 낙인찍히는 수모를 당했다.
 
만일 “미국인이 먹지 않는 사골을 고아 먹었으니 당신은 공업용 뼛국을 마신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게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일까. 사회·문화적 배경을 고려치 않고 남의 나라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큰 오류다. 긴 법정다툼 끝에 삼양은 1997년 대법원으로부터 무죄선고를 받았지만 이미 기업의 이미지는 심각한 손상을 입은 뒤였다.
 
1980년대는 라면의 황금기였다. 팔도라면의 전신인 한국 야쿠르트가 1983년, 청보식품이1984년, 빙그레가 1986년, 오뚜기가 1987년 라면사업에 뛰어들며 라면시장은 군웅할거의 국면을 맞았다. 이 시기에 나온 ‘너구리(82)’ ‘육개장 사발면(82)’ ‘안성탕면(83)’ ‘짜파게티(84)’ ‘신라면(86)’ ‘팔도 비빔면(84)’ ‘도시락(86)’ ‘오뚜기 진라면(88) 등은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제품들이다. 특히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을 계기로 우리 기업들은 세계시장에 한국 라면의 맛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는다.
 
라면, 한류의 장르가 되다
 
저렴한 가격, 간단한 조리법, 식사와 간식 등 전천후용도, 뛰어난 맛이 트레이드마크인 라면은 이제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는 최고의 인스턴트식품이 됐다. 라면은 경제성장에 따른 생산량 확대와 품질 개선 효과에 힘입어 불과 반세기만에 한국인의 주식인 밥을 대체할 수 있는 최고의 간편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단언컨대, 한국 사람은 이제 라면 없이는 살 수 없는 민족이 됐다. 2018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 10명 중 6명은 1주일에 한 번 이상은 라면을 먹는다.
 
세계에서 라면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는 역시 인구 대국인 중국이다. 일본에 본부를 둔 ‘세계라면협회’ 통계에 따르면 중국은 2018년 한 해에 402억5,000만 개의 라면을 소비했다. 그 다음으로 2위 인도네시아, 3위 인도, 4위 일본, 5위 베트남 순이다. 한국은 연간 38억 개의 라면을 소비해 8위에 올라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1인당 소비 면에서는 한국이 압도적인 수치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점이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은 1인당 연간 74.6개의 라면을 먹는다. 이는 2위를 기록한 베트남(53.9개)보다도 20개나 많은 수치다.
 
2013년 들어 국내 라면시장의 규모는 2조원을 돌파했다. 농심을 비롯한 국내기업들은 세계 100개국 이상에 완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최다 소비국 중국에서 한국 라면에 대한 평판은 상종가를 달리고 있으며 라면 종주국 일본에서도 한국 라면의 인기는 계속 상승하고 있다.
 
▲농심이 1968년 출시한 ‘왈순마’라면 광고. 판매가격은 15원. 봉지마다 낱개 껌을 하나씩 사은품으로 끼워 주었으며 삼양과의 승부를 위해 당시로선 파격적인 750만원의 경품도 내걸었다. 그러나 정운경 화백이 그린 만화 ‘왈순아지매’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상표사용금지처분을 받아 단종된 비운의 라면이다.

 

우리 라면은 'K-Pop' 'K-Movie'처럼 한국을 상징하는 장르가 됐다. 김치나 불고기처럼 한류 브랜드의 하나로 인지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유럽의 지붕 스위스 융프라우 정상에서, 이집트의 시나이 산에서, 네팔의 신성한 골짜기에서 우리 컵라면이 팔리고 있다. 계율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이슬람 국가도 할랄푸드로 승인된 한국 라면을 먹는다. 올 초에는 봉준호 감독마저 영화 ‘기생충’으로 아카데미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짜파구리’ 신드롬을 더했다. 이쯤 되면 한국 라면의 세계화는 시간문제가 아닐까싶다.

 
라면의 세계는 점점 진화하고 있다. 현재 국내 시제품은 200여개에 달한다. 레시피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라면 자판기와 라면 전문점이 등장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고 유튜브와 방송 등을 통해 기발한 요리법이 연일 쏟아져 나온다.
 
라면업계의 스타트업 분위기도 뜨겁다. 대표적인 주자가 2017년 선보인 ‘옥토끼 프로젝트’의 ‘요괴라면’이다. ‘봉골레맛’ ‘크림파스타맛’ ‘조개파스타맛’ ‘국물떡볶이맛’ 등 종래에 볼 수 없던 맛을 선보이는 ‘요괴라면’은 기성라면보다 2배정도 비싸다. 그나마 일부 웹사이트만을 통해서 판매하는데 한 달에 7만개 이상의 물량을 소비하고 있다.
 
꼬부랑 면발만큼 굴곡진 사연들
 
한국인에게 라면은 음식 이상의 그 무엇이다. 라면 국물을 안주삼아 쓴 소주잔을 기울이며 밤새 문학을 토론했던 삼촌. 노란 양은냄비에 끓인 라면을 뚜껑 위에 덜어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 먹던 형아. 라면 한 박스를 들여 놓고는 배부른 듯 환한 미소를 짓던 엄마. 내무반 구석에서 반합에 끓인 라면을 게 눈 감추듯 먹어대던 군대 선임 등. 한 그릇의 라면에는 꼬불꼬불 구부러진 국숫발만큼이나 제각각의 사연들이 배어있다. 그 시절, 만일 라면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어떤 추억을 먹고 살았을까.
 
10원으로 출발한 라면이 20원(1970)이 되고, 100원(1981년)이 되었고, 300원(1994년)을 거쳐 750원(2008년)이 되었다. 현재 가장 값이 싼 제품은 ‘오뚜기 김치라면’으로 400원이다. 최근에는 프리미엄화를 추구하는 고급제품들도 줄줄이 등장했다. 오뚜기의 ‘쇠고기미역국’라면은 1,600원이나 한다. 세상은 장바구니에 담긴 라면의 종류만으로도 빈부의 정도를 감안할 수 있을 만큼 변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라면- 2016년 5월 28일. 구의역 지하철에서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던 19세 김 모 군이 도어와 열차 사이에 끼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숨진 청년의 가방에는 노동시간에 쫓긴 나머지 미처 끓여먹지 못한 컵라면 1개가 들어있었다.
2018년 12월 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석탄운송설비를 점검하던 24세 청년 김용균이 컨베이어 기계에 빨려 들어가 숨졌다. 사고 후 공개된 김 군의 유품에서도 컵라면이 나왔다. 취재진이 몰렸다. 청년의 유품 앞에선 연신 플래시가 터졌다. 그곳엔 삶의 희망을 찾지 못하고 떠난 자의 초라한 컵라면이 외롭게 놓여 있었다.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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