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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⑭ 직업(下)

기사승인 2020.11.30  14:2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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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경미화원’ 되기도 하늘의 별 따기인 세상

솜틀집, 전당포, 전파사, 동네 목욕탕, 쌀집, 자전거포 같은 가게가 우리 주변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대신 펍 레스토랑, 피트니스센터, 24시간 편의점, 네일숍, 찜질방, 애견 쉼터, PC방 등은 언제쯤 우리 곁에 다가온 걸까.
 
지난 회에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몇몇 직업에 관한 에피소드를 통해 전환기 우리 사회의 풍속도를 들여다보았다. 이번 회에는 좀 더 시야를 넓혀 광복 이후 우리 사회에 등장한 주요 직업의 종류, 그 직업들이 생성하고 소멸한 사회적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인구 넷 중 1명은 실업자이던 시절
 
1950년 3월에 최초로 고등고시가 치러졌다. 행정고시를 필두로 외무, 사법 분야 공무원 시험을 시행해 외교관과 법관을 선발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고시 합격자들은 최고의 결혼 상대자로서 단연 선망의 대상이었다. 6.25 직후 혼란기에는 그럴듯한 직업을 갖기 어려웠던 만큼 특수 전문직인 의사를 비롯해 직업군인, 교사, 경찰 등 공무원 직군이 가장 인기를 끌었다.
 
▲실업자의 고단한 삶을 표현한 1953년 임흥식 작가의 사진.
6.25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남한의 제조업 시설은 전쟁 전 대비 42%나 파괴되었고 농업 기반도 초토화됐다. 폐허를 딛고 자립하기 위해 한반도의 모든 것을 ‘리셋’하는 국토 재건사업이 시작됐으며 도로, 철도, 교량, 항만, 학교 및 공공시설 복구에 전 국민이 매달리다시피 했다. 턱없이 부족한 살림살이는 미국에서 원조 받은 잉여농산물과 소비재로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 부대를 통해 흘러나온 잔반으로 만든 꿀꿀이죽을 먹고, 덩치 큰 미군들이 입던 헌 군복에 검은 물을 들인 ‘스모르’를 걸치고, 미군이 가져온 나왕·미송 따위의 목재, 아스팔트 루핑과 C-레이션 깡통을 펴서 만든 판잣집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던 시절. 골목에는 구정물이 흘러넘쳤고 공동우물, 공동변소에는 언제나 긴 줄이 늘어서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도시로, 도시로 마구 몰려들었다.
 
전쟁 통에 월남한 북녘 주민, 해방과 휴전 이후 귀국한 해외동포, 살기 어려운 농촌을 등진 이농인(離農人)으로 만원을 이룬 도시는 몸살을 앓았다. 서울 남산 아래 해방촌을 비롯해 봉천동, 상계동, 마장동, 금호동 등 변두리 하천변이나 언덕 위에는 ‘하꼬방’이라 부르는 판잣집과 움막이 빼곡히 들어섰고 노점상, 행상, 날품팔이로 연명하는 도시 빈민들은 그런 환경 속에서 하루살이나 다름없는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도시 미관을 염려한 정부는 가난한 이들의 주거 현실을 개선하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게 치우는 방식을 택했다. 그 결과 무허가 판잣집을 때려 부수는 철거반원이 대대적으로 투입되곤 했다. 그 당시 ‘철거반 떴다’는 외침은 가장 무서운 말이었다. 철거반원과 빈민 사이에 투석전이 벌어져 피를 보는 일도 잦았다. 연탄을 때는 것조차 사치여서 가까운 산에서 나무를 잘라다 땔감으로 쓰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자 관청에서 ‘산림감사’라는 자들이 나와 불법으로 벌목한 이들을 잡아갔다. ‘완장’찬 직업을 가진 이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 얘기다.
 
1960년대 실업자는 인구의 25%에 달했고 1인당 GNP는 100달러에 불과했다.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국시로 내건 박정희는 본격적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우선 경공업 육성 방침에 따라 노동집약적 산업을 활성화시켰다. 많은 사람이 피복과 가발 등 제조업 분야로 몰렸다. 미싱공, 재단사, 시다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가혹한 근무조건 속에서 먼지를 먹어가며 잔업과 야근을 밥 먹듯 했다. 이런 후유증은 훗날 청년 전태일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뒤 “사람답게 살게 해 달라”고 외치다 죽어가는 비극의 씨앗이 됐다.
 
1961년, 대한항공이 최초로 여자 승무원인 스튜어디스를 공개 선발했다. 같은 해 도입된 버스 여차장 제도와 달리 스튜어디스는 고학력에 엄정한 신체조건을 지닌 여성만 응시할 수 있는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지금은 많이 완화되었다지만 과거 키 162cm 미만인 여성은 아예 응시조차 할 수 없었고 미모는 기본이었다.
 
서울 시민의 발 노릇을 했던 전차 노선이 전면 폐지된 것은 1968년 11월 30일의 일이다. 1899년 5월 동대문-홍화문 사이 구간에서 처음 개통된 전차는 인력거와 자전거의 수요를 대체하며 대중교통수단으로 기능했다. 1930년대만 해도 250대의 전차가 하루 수십만 명의 승객을 실어 날랐지만, 시속 7Km의 느린 속도와 노후한 차량은 늘 문제였다. 서울의 팽창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전차는 결국 버스와 택시의 등장으로 대중 수요가 분산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자 택시 운전수가 인기직업으로 떠오르게 됐다.
 
▲한국 최초의 자동차 시발택시 광고.
택시 이야기 잠깐. 1950년대 택시 기사들의 애마는 ‘시발(始發) 택시’였다. ‘첫 출발’의 의미를 담은 시발택시는 1955년 8월 생산된 최초의 국산 자동차다. 미군이 남기고 간 드럼통을 펴 제작한 시발택시는 최무성·혜성·수성 3형제가 을지로의 천막 공장에서 만들어낸 집념의 산물. 4기통 1,323CC 엔진이 탑재된 시발택시는 1962년 8월, GM대우 전신인 새 나라 자동차가 닛산의 블루버드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 생산한 승용차 ‘새 나라’가 나올 때까지 약 3천여 대나 팔려나가며 대중교통의 첨병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개인택시는 1967년에, 콜택시는 1970년에 도입됐다. 1972년에는 김포공항 이용객을 위한 공항 택시도 배치됐다. 코로나(신진 자동차), 코티나(현대·포드 제휴), 브리사(기아)가 택시로 쓰이다가 1975년에 이르러 최초의 우리나라 자체 완성 차인 ‘포니’가 출시돼 택시와 자가용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당시 포니 1대 가격은 세금 포함 228만 9천2백 원, 계약금은 50만 원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택시의 몸집도 커져서 스텔라·소나타(현대), 프린스(대우), 콩고드·캐피탈(기아) 등 지금은 추억 속의 이름이 된 중형 차들이 가로수를 누볐다. 이는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중형 택시 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실업난에 외화마저 절대 부족했던 정부는 1963년 광부를, 1966년 간호사를 각각 독일에 파견했다. 또 1964년부터 1973년 사이에는 32만 명의 국군장병을 베트남에 파병했다. 7,900명에 달했던 파독 광부들은 어두운 막장에서 생사를 건 노동으로 외화를 벌어 고국에 보냈다. 간호사도 약 1만 명이 파견됐다. 성실한 근무 자세를 보여준 우리 간호사들은 ‘코리안 엔젤(Korean Angel)’ 칭호를 받았지만, 실상은 시신을 닦는 모진 일까지 감수해야 했다. 미군의 용병이라는 비아냥거림을 감내하며 사선을 넘나든 파월 장병들도 귀중한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들이 피와 땀으로 벌어들인 외화는 한강의 기적을 이끄는 종잣돈으로 쓰였다.
 
1970년은 중공업의 시대였다.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 분야가 6대 전략업종으로 중점 육성됐다. 삼성, 현대 등 한국의 재벌들이 몸집을 불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다.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구호 아래 삼성물산, 현대종합상사, 럭키금성상사, 국제 상사 등 무역을 주력으로 삼는 ‘종합상사’가 각광을 받았고 ‘상사 주재원’이란 직책을 달고 해외로 나가 근무하는 대기업 사원들은 부러움을 샀다. 오일쇼크로 세계 경제는 출렁거렸지만 중동 건설 호재 덕에 우리는 외화를 벌어들이느라 바빴다. 그런 까닭에 중장비 기술자는 물론이고 토목, 건축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은 너 나 할 것 없이 중동의 건설 현장으로 보내졌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하던 고등실업자들도 앞다퉈 중동의 모래사막으로 날아갔다.
 
1980년대는 노동집약적인 근로환경이 자본집약적 형태로 넘어간 시기다. 경제발전 속도에 맞춰 금융시장이 성장하면서 은행원, 증권맨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대학을 나와 별 볼일 없는 직장의 샐러리맨으로 사느니 상고(商高)라도 나와 은행에 입사하는 것이 더 낫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던 때였다. 그즈음 이름도 생소한 반도체 엔지니어라는 직업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조선업이 호황을 맞으면서 울산, 거제 등지에서는 선박 기술자를 높은 대우로 스카우트하기도 했다.
 
스포츠도 직업 세계의 지형도에 영향을 끼쳤다. 1982년 프로야구, 1983년 프로 축구가 출범했고, 고액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등장하면서 프로스포츠 스타는 지금의 아이돌 버금가는 인기를 얻었다. 선수뿐 아니라 구단 살림을 진두지휘하는 프런트와 홍보마케팅 전문가, 재무 담당자, 스카우터 등 새로운 일꾼이 필요했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 올림픽 개최 전후로는 광고업, 카피라이터, 통역사, 호텔리어, 공연기획자, 디자이너, 모델 등이 산업계의 새로운 중추로 떠오르며 몸값을 높였다.
 
▲거리에서 주간지와 복권을 팔고 있는 여인. 궤짝 안에서 놀고 있는 두 어린이의 
모습이 재밌다. 1970년대쯤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IMF가 불러온 지각변동
 
1990년대는 신세대를 일컫는 말 'X세대’로 통하는 시기. ‘문화 대통령’으로 불렸던 ‘서태지와 아이들’ 출현 이후 가수나 연예인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부쩍 늘어났다. 1995년 SM엔터테인먼트 탄생과 이듬해 혜성처럼 등장한 원조 아이돌 그룹 H.O.T의 데뷔, 그리고 JYP(1996), YG(1998) 등 대형 기획사가 출범하면서 연예 기획 사업과 연예인 매니지먼트, 스타일리스트, 프로듀서, 댄서, 비디오 및 음반 제작자 등이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이 시기 가장 눈에 두드러지는 점은 정보통신 관련 분야의 도약이다. 인터넷 보급으로 웹 마스터, 데이터베이스 전문가, 전자상거래 전문가, 프로그래머 같은 직업이 초미의 관심을 끌었으며 이들을 양성하는 전문학원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그러나 1997년 말 IMF로부터 구제 금융을 받은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가장 치명적인 경제 위기를 맞으며 바람 앞의 등불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은행과 기업이 연쇄 도산하며 거리에는 노숙자와 실업자가 넘쳐나게 된 것이다.
 
IMF로 대량 실직의 홍역을 겪은 국민들은 정년이 보장되는 직업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신세가 됐다. 그런 세태를 반영하듯 이 무렵에는 높은 연봉, 정년, 긴 방학, 육아휴직을 보장받는 초등학교 여교사가 제1의 며느릿감으로 뽑혔다.
 
한편, 은행이나 증권회사 같은 곳에서 일하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중장년층 일부는 먹고살기 위해 자영업에 뛰어들었다. 그로 인해 치킨집을 비롯해 생맥줏집, PC방, 프랜차이즈 삼겹살 식당, 24시간 편의점 등이 한 집 건너 하나씩 생길 만큼 붐을 이뤘다. 그들이 직장을 떠나오며 비워둔 자리는 훗날 펀드매니저, 애널리스트, 경영컨설턴트, 헤드헌터 등 다소 생경한 이름의 직업들로 채워졌다. 반면 젊은 세대에서는 첨단 신기술과 아이디어를 접목한 작은 규모의 기업 창업이 러시를 이뤘다. 이른바 벤처 시대가 열린 것이다.
 
IMF 이후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림길에 놓이며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현실을 뼈저리게 느낀 우리 국민은 더럽고(Dirty), 힘들고(Difficult), 위험하다며(Dangerous) 기피했던 3D 직종에도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환경미화원’이 대표적인 예다.
 
과거 ‘청소부’라 불렀다가 어감이 좋지 않다며 ‘환경미화원’으로 호칭했다가 2016년부터 ‘공무관’이라고 부르게 된 ‘환경미화원’은 높은 임금과 정년보장의 장점 때문에 지금은 취업 문턱이 매우 높아진 직업 중 하나이다. 야근과 휴일 근무수당에 명절 휴가비 등을 포함한 초임 연봉이 4,500~5,000만 원 수준. 승진은 없지만 32호봉(32년간)까지 계속 오르는 임금에 공무원과 동일한 정년, 자녀 학자금 지원, 주 5일 근무 등 여건이 좋아 지금은 고학력자는 물론 20대 젊은이까지 몰려 수십 대 1의 경쟁률을 보이고 있다. 비와 바람을 맞으며 새벽을 쓸어 담는 고달픈 직업이라고 천대받던 청소 일이 이처럼 주목받을 줄 누가 알았으랴.
 
아주 오래전, 뱃사공이라는 직업이 있었다. 뱃사공은 사람은 물론이고 소달구지, 버스까지 뗏목에 실어 강을 건네주고 삯을 받았다. 그러다 다리 놓는 기술이 생겨 여기저기 교량이 건설되자 뱃사공 직업은 도태됐다. 나무나 연탄 때던 시절에는 굴뚝 청소부와 연탄 배달부가 골목을 누볐지만, 보일러 기술이 보급되면서 그 또한 추억의 직업이 되었다. 컴퓨터 실사의 등장은 극장 간판 그리는 화공의 일자리를 앗아갔다. 또 전자계산기의 출현은 주산학원의 몰락을 가져왔다. 대학에서 장례지도사를 양성하니 마을의 장의사가 없어졌다.
 
이집 저집 연결고리가 되어 이사 흥정을 붙여주던 동네 마당발 복덕방도 공인중개사로 교체된 지 오래다. 복덕방 앞 나무 의자에 앉아 곰방대를 털며 장기를 두던 영감님들. 그 곁에서 이래라저래라 훈수하다 구박을 받던 이웃 아저씨의 모습은 이제 빛바랜 사진에서나 찾을 수 있는 옛 풍경이 되었다. 정겨웠던 것들은 어느 결에 하나둘 사라져버렸다. 엿장수의 가위소리도 그중 하나다. 그런 세월이 참 무심 타.
 
 
 
* 에필로그: 느그 아부지 머 하시노?! --------------------------------------
 
부산을 배경으로 한 조폭 영화 ‘친구(2001)’의 한 장면이다.
담임(김광규) : 아부지 머 하시노?! 말해라! 아부지 머 하시노!
동수(장동건) : (빈정 상한 표정으로) 장의삽니더.
담임 : 장의사? 그래! 이놈아, 느그 아부지는 죽은 사람 염해가며 니 공부시키는데, 공부를 이 꼬라지로 하나, 어이?! (동수에게 따귀 3대를 올려붙인다).
담임 : 들어가!
동수 : (담임을 한껏 노려보고 자리로 들어간다. 그런 낌새를 알아챈 담임이 다시 부른다).
담임 : 일로 와, 일로 와. 이 닝기미…씨발! (열 받은 담임이 다시 동수의 따귀를 날린다).
 
영화 속에서 동수는 아버지의 직업이 장의사라는 것에 심한 콤플렉스를 느낀다. 동수는 친구들 앞에서 아버지의 직업을 발설하게 만든 담임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 더 얻어맞는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직업을 창피하게 여긴 기억이 있는 사람은 쉽게 공감할 만한 장면이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쓴 자전적 글에서 자신의 부모님 직업을 고백한 것을 보고 놀람과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지사는 과거 자신의 아버지가 청소부로 일했으며 어머니는 성남시 상대원동 시장통 공중변소 입구에 앉아 하루 종일 변소를 이용하는 사람들로부터 10원, 20원 요금을 받아 자식들을 키웠다고 적었다.
 
연전에는 MBC 아나운서였던 임희정 씨가 가족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나는 겨우 자식이 되어간다>를 통해 자신의 1948년생 아버지가 무학자로서 막노동꾼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밝혔다. 1952년생인 어머니도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했다고 고백한 임 씨는 부모의 삶을 부끄러워했던 자신의 감정을 속죄했다.
 
세상에는 만 가지도 넘는 일이 존재한다. 비천한 직업일망정 그것을 천직으로 여기며 새끼들 먹이고 입히며 재우느라 허리 펼 날 없었을 세상의 부모님들. 그분들의 삶이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겨우’ 자식이 되는 것이다.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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