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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⑮ 금지곡

기사승인 2020.12.14  16: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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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요 100년사의 지울 수 없는 ‘대 학살극’

1975년 봄은 한국 가요사에 있어 가장 잔인한 계절로 기록된다. 박정희대통령의 장기집권과 독재를 현실화한 유신헌법에 따라 그동안 한국인의 정서를 대변하며 사랑받아온 수많은 대중가요들이 ‘금지곡(禁止曲)’이란 주홍글씨를 받아들고 하나 둘 우리 곁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가요대학살’이란 이름이 붙을 만큼 엄청난 파장을 불러 온 이 사건은 한국 대중가요 100년사에서 씻을 수 없는 치욕과 탄압의 역사로 기록된다. 그동안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애창됐던 <아침이슬> <동백아가씨> <고래사냥> <그건 너> <거짓말이야> 같은 노래들이 하루아침에 방송 불가, 공연금지, 음반발매 불허의 철퇴를 맞았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금지곡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그 무렵 시국상황을 간략히 이해하고 넘어가는 게 좋을 듯싶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은 자신의 장기집권을 위한 사전포석으로 초헌법적 발상을 담은 ‘유신헌법’을 공포했다. 국내외 여론이 곱지 않은 시점에도 중앙정보부는 1974년 봄 인민혁명당(인혁당)사건을 조작해 무고한 국민 8명을 사형에 처하는 등 공포정치를 멈추지 않았다. 박정권은 이듬해 5월 13일에는 긴급조치 9호마저 발령, 국민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무제한적인 제약을 가했다.
 
이에 뉴욕타임스 등 해외 유수언론은 박정희가 주창하는 ‘한국적 민주주의’는 조지 오웰의 소설에 등장하는 1인 전제정치라고 비꼬는 한편, 유신정권으로 한국은 북한과 구별하기 힘든 독재사회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지미 카터 미국 민주당 정권도 박정희를 정면으로 경고하고 나섰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사면초가 궁지에 몰린 박 정권은 얼마 뒤 궁정동 안가에서 들려온 몇 발의 총성과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유신정권은 영원할 거라 믿으며 박정희와 그의 추종자들이 벼랑 끝으로 달려가던 그때, 위정자들은 정권에 비판적인 청년들의 의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대중음악계에 재갈을 물릴 궁리를 했다. 표현의 자유, 개인의 예술 활동을 국가가 나서 통제한다는 것 자체가 민주국가에서는 이치에 맞지 않는 행위였지만 결국 독재정권은 마음에 들지 않는 노래를 죄다 금지곡으로 묶어 가요계에서 퇴출시키는 야만적 행동을 드러냈다.
 
금지곡이란, 정치·사회적인 이유로 대중 앞에서 직접 부르거나 방송 또는 음반을 통해 타인에게 전파할 수 없는 상태의 노래를 일컫는다. 외국에서도 법적·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경우 제재를 가해 금기시 하는 노래가 있기는 하지만 누군가의 정권유지를 위해 대놓고 악용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이런 점에서 유신 정권의 횡포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아리랑> <봉선화> <눈물 젖은 두만강> <황성옛터> 등을 금지곡으로 낙인찍어 부르지 못하게 한 야비한 짓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치졸하기 짝 없는 ‘금지의 사유’
 
금지곡의 법적 기원은 1967년 제정된 ‘음반에 관한 법률’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법률에 따라 사전심의가 법제화되어 금지곡을 지정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그러나 창작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위정자의 자의적 판단만으로 금지곡 딱지를 붙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법률은 악용의 소지가 농후했다. 아니나 다를까, 유신 이후 ‘음반에 관한 법률’은 쾌도난마의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1975년 문화공보부는 ‘공연활동정화대책’을 발표하면서 1차로 43곡을, 그리고 추후 심사를 거쳐 무려 222곡의 노래를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양희은의 <아침이슬> <이루어 질 수없는 사랑>,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신중현의 <미인>,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기러기아빠>, 한대수의 <물 좀 주소>,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김> 등 당시 인기 절정의 노래들이 모조리 금지곡 판정이란 수난을 당한 것. 해당 금지곡들은 즉각 관계당국에 의해 음반이 수거돼 폐기되는 한편 방송 전파를 타는 것이 일절 금지됐다.
 
당시 가요 심의를 담당한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가 금지곡을 지정할 때 기준으로 삼은 항목은 다음과 같다. ▲국가 안보와 국민총화에 악영향을 줄 수 있고 ▲외래 풍조의 무분별한 도입과 모방 ▲패배, 자학, 비관적인 내용 ▲선정, 퇴폐적인 것.
 
▲대표적인 금지곡 <아침이슬>이 담긴 양희은의 음반.
지금도 최고의 민중가요로 불리는 김민기 작사·작곡의 <아침이슬>은 1973년에는 건전가요 상을 받은 노래였다. 박 정권 하에서 좋은 노래라고 상까지 받은 노래가 하루아침에 금지곡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노래를 만든 김민기의 이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1972년 김민기는 서울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해방가>를 가르친 적이 있다. 그때 일이 괘씸죄로 작용해 <아침이슬>이 금지곡이 됐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다.
 
그런 속내를 차마 드러낼 수는 없었던지 심의당국은 <아침이슬>가사 중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의 ‘붉은 태양’이 북한 지도자 김일성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트집 잡았다. 그러고 보면 그 시절 이문세가 활동하지 않은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이문세는 1988년도에 <붉은 노을>이란 노래를 발표하지 않았던가.
 
정작 노래를 만들고 부른 김민기와 양희은은 <아침이슬>이 운동권가요라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해본 적이 없었다는데, 정권이 금지곡으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오히려 운동권가요의 상징적인 인물이 돼 버렸다.
 
세시봉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송창식의 대표곡 <고래사냥>과 <왜 불러>도 금지되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라는 <고래사냥> 가사가 허무주의를 조장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한창 열심히 일해야 할 국민들을 음주가무에 빠지게 해서야 되겠냐는 논리였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 삽입된 <왜 불러>는 주인공이 장발 단속하는 경찰관을 따돌리고 도망가는 장면에서 나왔는데, 공권력을 조롱하고 반항심을 심어줄 수 있다고 해서 금지처분 됐다.
 
‘길가에 앉아서/ 얼굴 마주보며/ 지나가는 사람들/ 우릴 쳐다보네.’ 상큼한 멜로디와 가사로 세대를 뛰어넘어 폭넓은 사랑을 받은 김세환의 최대 히트곡 <길가에 앉아서>가 금지곡이 된 연유는 더욱 황당하다. 당시 심의 담당자는“이 중차대한 시국에 젊은 놈이 할 일 없이 거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왜 쳐다보냐”고 다그쳤단다.
 
정권에 밉보여 거의 만신창이 수준의 난도질을 당한 사람은 한국 록음악의 대부 신중현이다. 신중현은 1970년대 초 청와대로부터 박정희대통령 찬가를 만들라는 주문을 받는다. 평생 예인의 길을 걸은 신중현은 이 부탁을 거절했고 대신 대한민국을 찬양하는<아름다운 강산>을 만들었다. 미운 털이 제대로 박힌 신중현은 결국 그가 만든 노래 22곡이 금지되는 인생 최대의 수난을 맛보았다. 특히 신중현의 대표곡 <미인>은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원 가사를 대학가에서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개사한 것이 문제였다. 자꾸만 집권하고 싶은 박정희의 야심을 뼈아프게 꼬집은 노랫말이 정권의 심경을 크게 거스르고 말았으니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다.
 
그밖에도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금지곡 굴레를 쓴 노래들이 있다. 1960년대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배호가 부른 <0시의 이별>은 통행금지 위반을 부추긴다 해서 금지곡이 됐다. 양희은의 짙은 감성이 담긴 <이루어질 수없는 사랑>도 금지곡이었다. 실연당한 친구를 위로하는 이 노래를 두고 심의위원은 “정권은 ‘하면 된다’를 외치며 국토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판국에 부정적이며 패배주의를 의미하는 노래가 웬 말이냐”고 일갈했다는 후문이다.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의 대표곡 <동백아가씨>가 금지곡 대열에 끼인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곡 발표 후 35주 연속 1위, 최초의 밀리언셀러로 불릴 만큼 한국인의 사랑을 듬뿍 받은 <동백아가씨>는 하루아침에 ‘왜색(倭色)’을 이유로 금지곡이 됐다. 일본의 대중가요 ‘엔카’를 연상시키는 창법이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등 근거 없는 핑계였다.
 
<동백아가씨>가 발표된 것은 1964년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됐다. 당시 한일 수교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속죄양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권은 인기절정의 국민가요 <동백아가씨>에 왜색가요 딱지를 붙이는 꼼수를 부렸다. 만주국 군관학교 출신으로 다카키 마사오라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까지 썼던 박정희는 일본육사에 진학해 장교로도 복무했다. 국민 다수가 한일수교 배경과 박정희의 친일 이력을 연결 지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자 박정희 측근은 자신들의 근본성향이 민족적이라는 점을 애써 강조하려고 <동백아가씨>를 왜색으로 몰아 퇴출시키는 액션을 연출한 것이다.
 
우습게도 <동백아가씨>는 박정희가 사석에서 즐겨 부르는 그의 애창곡이었다. 금지곡의 시대에도 박정희는 청와대 행사에 이미자가 초청가수로 나오면 <동백아가씨>를 불러달라고 청하곤 했다는 것이다.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호도하기 위해 ‘왜색가요’ 멍에를
뒤집어씌운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앨범.
 
가요계의 시련은 박정희 사후에도 오래도록 지속됐다. 특히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과 맞물려 신중현, 이장희, 김추자, 윤형주, 이종용, 김정호, 조용필 등은 수년간 활동이 금지되거나 투옥되었다. 대중음악계는 완전히 초토화되어 록, 포크, 발라드, 블루스, 재즈, 헤비메탈에 이르기까지 유명가수는 물론이고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무명가수들까지 10여년 가까이 춥고 배고픈 시절을 보내야 했다. 시판되는 대중가요 음반에는 건전가요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가면> <어허야 둥기둥기> <서로 믿는 우리 마음> 같은 노래를 의무적으로 수록해야 했고, 한술 더 떠 <걸어서 가자> <승공의 노래> <향토방위의 노래> <나의 조국> <새마을노래> <유신찬가> <아! 대한민국> 같은 노래를 한데 모아놓은 건전가요집이 보급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시절에는 정치나 사상적인 배경 외에도 ‘각하’ 내외의 품위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노래에 대해서는 여지없이 금지곡 재갈을 물렸다. 심수봉이 부른 <순자의 가을>이란 노래가 그런 부류에 속한다. 이 노래는 1980년 동명의 드라마를 영화화한 박호태 감독의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의 주제가였다. 심수봉은 영화 주연으로 출연하고 노래도 불렀다. 그런데 영부인 이름이 고스란히 들어간 것이 문제가 돼 금지곡이 됐다. 훗날 이 노래는 가수 방미가 제목만 바꿔 불러서 대박 히트를 쳤다. 그 노래가 바로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다.
 
이런 일도 있었다. 가수 윤복희가 청와대 초청을 받은 적이 있다. 윤복희는 자신의 히트곡 <여러분>을 부르기로 했다. 청와대 비서관이 공연 전에 찾아와 가사 중 ‘네가’라는 부분은 반말이니 ‘그대’로 바꿔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윤복희는 이를 거절했고, 전두환을 향해 손가락을 뻗어 ‘네가 만약···’이라며 노래를 불렀다. 그 뒤 <여러분>은 금지곡이 됐다.
 
전두환 재임 중에는 정광태가 부른 국민가요 <독도는 우리 땅>도 금지곡이었다. 이 노래는 1983년 7월부터 11월까지 방송금지 판정을 받았다. 이유인즉, 1982년 일본의 중등교과서 왜곡사건으로 반일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자 한일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한 정부가 앞장서 이 노래를 못 부르게 조치한 것이다. 당시 소관부처는 “독도 주소는 ‘남면 도동 1번지’가 아니라 ‘독도리’로 바뀌었다. 그런데 가사는 이 같은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고 금지 이유를 밝혔다. 얼마나 찌질 하고 옹색한 변명인가.
 
군사쿠데타 이후 설치된 ‘한국방송윤리위원회’에서 음악방송 심의를 실시한 이래 ‘금지곡 1호’로 지목된 노래는 조명암 작사,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의 <기로의 황혼>이다. 작사가 조명암이 월북인사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1965년 3월 1일의 일이다. 이후 가요에 대한 탄압은 점점 절정으로 치달아 1975년, 222곡에 대한 금지곡 판정 뒤 1976년 9월 30일까지 771곡, 1981년 9월 30일까지 787곡, 1983년 11월 30일까지 34곡, 1987년 9월 30일까지 332곡, 1994년 6월까지 301곡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해금의 시대, 그리고 그 후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끝에 가요계는 1987년의 민주항쟁을 계기로 해금의 기쁨을 맛보았다. 엄혹했던 시절 금지곡으로 묶여 햇빛을 보지 못한 가요 186곡이 빗장을 풀고 세상 밖으로 나온 것이다. 이때 <아침이슬> <그건 너> <동백아가씨> 등이 대중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기쁨이었을 뿐, 사전심의제도 전반에 걸친 수정은 가해지지 않았다.
 
이후 시대가 변하며 사전심의제도에 대한 저항운동이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했다. 그 정점에는 가수 정태춘이 있었다. <촛불> <떠나가는 배> <시인의 마을>로 대중적 인기를 얻은 정태춘은 공륜심의에 걸린 자신의 곡들을 당당하게 음반에 담아 발표함으로써 사전심의 철폐운동에 불을 지핀 인물이다. 1993년 그가 발표한 <92년 장마, 종로에 서다>는 그렇게 탄생한 앨범이다.
 
서태지 역시 사전심의에 대해 강한 반발을 보였다. 서태지가 작사·작곡한 <시대유감>은 1995년 10월 발매예정이었다. 공륜은 ‘···이 세상이 모두 미쳐버릴 일이 벌어질 것 같네···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라는 노래의 내용이 현실 부정적이고 과격하다는 이유를 들어 가사수정을 요구했다. 그러자 서태지는 공륜조치에 항의하는 의미로 가사를 모두 삭제한 채 연주곡 형태로 <시대유감>을 발표했다.
 
당시 서태지의 팬들은 서명운동을 전개하며 각종 매체를 통해 항의 메시지를 올렸다. 한 여고생은 당시 새정치국민연합 김대중 총재에게 공륜심의의 부당성을 담은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정치권에서 사전심의제 폐지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다. 1996년, 마침내 헌법재판소는 정태춘이 제기한 헌법소원을 받아들여 심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헌재는 사전심의제도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헌법정신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사전심의제 철폐는 한국 가요사에 한 획을 긋는 위대한 사건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요에 대한 규제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후심의’라는 이름아래 현재는 여성가족부(여가부)가 가요심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명분은 청소년 보호차원이다. 그런데 여가부는 지난 2011년 청소년들이 즐겨 듣는 가요 수십 곡에 ‘19금 딱지’를 붙여 방송 불가 조치하는 시대착오적 행동으로 물의를 빚었다. 여가부는 노래 전체의 의미를 살피기보다는 단지 ‘술·담배’같은 단어가 포함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곡을 청소년 유해물로 지정하는 어리석음을 범했다. 이때 바이브의 <술이야>, 전람회의 <취중진담>, 임창정의 <소주 한잔>같은 노래가 금지곡이 됐다. 그러자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소송이 이어졌고 여가부 홈페이지는 하루아침에 마비됐다. 여가부는 부랴부랴 음반심의위원장을 자르고 심의기준 완화대책을 내놓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다.
 
또 다른 한쪽의 문제는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된 방송사 자체 심의제도다. 방송사로부터 방송부적격 판정을 받은 노래는 가사나 안무를 재조정해야 하고 그래도 심의통과가 안되면 해당 방송사의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해야 하는 것이 현재 실정이다. 여가부의 조치처럼 법적인 제재가 가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방송사마다 서로 다른 잣대로 심의에 임하고 있는 것은 큰 문제다. A방송에서 금지판정을 받은 곡이 B방송에서는 무사통과되어 전파를 타는 것은 원칙 없는 심의방식 때문이다. 방송사 심의 기준을 보면 주로 비속어와 선정적인 표현, 타인 비하, 간접광고 등을 부적합 이유로 들지만 심의결과를 찬찬히 뜯어보면 군사정권시대에서나 보았을법한 황당한 사례가 적지 않다.
 
몇 가지 예를 보자. 윤종신의 <팥빙수>라는 노래는 ‘열라 좋아’라는 가사가, 박명수의 <바다의 왕자>는 ‘세 겹 뱃살 접힌 아줌마’라는 부분이 저속하다는 이유로 방송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박명수는 후에 가사를 ‘저기 뚱뚱하신 아줌마’로 고친 뒤에 방송할 수 있었다. 백지영의 <사랑 안 해>는 저출산과 미혼풍조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은 너무 반항적이라서, 슈퍼주니어의 <미라클>은 ‘난 널 품에 안고 날아’라는 가사가 납치를 연상시킬 수 있어서, 원더걸스의 <so hot>은 지구온난화를 부추길 수 있어서, 손담비의 <미쳤어>는 괜한 사람을 미친 것으로 취급하고, 빅뱅의 <모두 다 소리쳐>는 고성방가를 방조한다는 이유로 방송금지 됐다.
 
문민의 시대에도 표현의 자유는 어둠 속을 헤매듯 그 끝이 선명하게 잡히질 않는다. 가사 전체의 맥락을 무시한 채 자구 하나의 해석에 매달려 자의적이고 시대착오적 판단을 일삼는 심의제도는 아직도 망령처럼 우리 곁에 붙어있다. ‘···이 세상이 모두 미쳐버릴 일이 벌어질 것 같네’라던 서태지의 ‘시대유감’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에필로그: 코미디 2제(題) ---------------------------------
 
군사독재시절 ‘민족중흥’과 ‘선진조국’ 창달에 매진하느라 불철주야 애쓴 검열당국자들의 눈물 나는 충성심을 떠올리는데 헛웃음이 터지는 이유가 뭘까. 금지곡의 주인공이었던 분들이 훗날 털어놓은 사연을 들어보면 정말이지 코미디도 그런 코미디가 따로 없다. 짧게 2개만.
 
코미디 하나.
 
<아침이슬>을 만든 김민기가 어느 날 보안사에 끌려갔다. 먹잇감을 앞에 둔 늑대마냥 김민기를 날카롭게 쏘아보던 수사관이 기세등등하게 취조를 시작했다.
수사관: “이 새끼야, ‘긴 밤 지새우고’의 ‘긴 밤’은 ‘유신’을 비꼬는 거지?
김민기: 제가 이 노래를 만든 것은 1970년이고요, 유신은 1972년인데요.
수사관: “……”
 
코미디 둘.
 
이장희의 <그건 너>는 1975년 1차 가요정화운동 때 금지곡이 됐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너 때문이야’라는 표현이 문제였다. 이장희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재심을 청구했다. 그런데 방송윤리위원회로부터 더 어이없는 소리를 듣고 이장희는 할 말을 잃었다.
이장희: “여기서 ‘너’는 단순히 사랑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인데 책임전가라뇨?”
심의관: “너라는 표현은 그렇다 치고, ‘늦은 밤 쓸쓸히 창가에 앉아’ 라는 가사도 나오는데, 대체 늦은 시간까지 안자고 뭘 한다는 거요?”
이장희: “……”
 
누가 그랬던가, 세상은 금지곡을 만들고 금지곡은 세상을 만든다고. 정권의 탄압이 거세질수록 민중의 저항은 더 큰 함성이 되어 들불처럼 번졌고, ‘금지곡’의 붉은 낙인은 오히려 우리시대의 노래를 영원한 전설로 남게 하는 보증수표가 됐다. 역사란 참 아이러니하다.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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