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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⑨ 소주

기사승인 2020.09.21  11: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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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쓰디쓴 맛이 전하는 인생의 희로애락

늦은 겨울밤. 낡은 천막 틈으로 새어나오는 군참새 냄새에 홀린 듯 사내는 포장마차로 들어섰다. 막소주를 사발 가득 부어 한 입에 털어 넣은 사내는 쓰린 속을 달래려는 듯 뜨거운 어묵 국물을 목구멍 깊이 삼켰다. 밖에는 흰 눈이 펑펑 내리고··· 좁은 마차 안을 희미하게 밝히던 카바이드 불빛은 천막을 파고든 찬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린다. 통금 사이렌에 놀란 것일까. 갑자기 들려오는 먼 데 개 짖는 소리는 객지를 떠도는 고독한 사내의 처진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한다.
 
막걸리와 더불어 오랜 세월 국민의 벗이 되어 온 ‘소주’. 소주는 누군가에게는 노동의 고통을 덜어주는 힘이었으며 누군가에게는 쓰라린 추억의 아픔을 잊게 하는 묘약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달콤한 축배였지만 누군가에게는 쓰디쓴 고배였으며, 세상의 고통과 시름을 덜어주는 영물인 동시에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독이 되기도 했던 소주. 소주마냥 한국인의 삶에 깊이 녹아들어 고락을 함께한 술은 없었다.
 
▲그립고 아련한 옛날 포장마차.
 
‘소주 한잔 할까’‒ 이처럼 우리네 감정을 깊고 넓게 담아내는 말이 또 있을까. 기쁠 때 한잔, 슬플 때 한잔, 화나서 한잔, 허전해서 한잔, 울적해서 한잔, 그리워서 또 한잔. ‘소주 한잔’이란 말 속에는 한국인의 애환과 따뜻한 정서가 오롯이 담겨 있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만 때론 울분과 격정에 빠지게 하는 소주. 시간여행자의 이번 목적지는 그 ‘한잔’이 빚어내는 요지경의 세상이다.
 
한국인과 가장 친숙한 술
 
소주의 기원은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페르시아와 몽골을 거쳐 13세기쯤 우리에게 소주 양조법이 전래됐다고 알려진다. 과거에는 ‘증류식(蒸溜式)’ 소주라 해서, 쌀 등 곡물로 담근 밑술에 소줏고리를 얹어 끓인 뒤 그때 발생한 기체를 모아(증류) 술로 사용했다. 증류식 소주는 일체의 첨가물이 들어있지 않아 맛과 향이 우수했으며 독한 만큼 마신 후 뒤탈도 적었다. 안동소주나 문배주 같은 전통 술이 대표적인 증류주다.
 
뛰어난 맛과 향, 부드러운 목 넘김이 장점인 전통 증류 소주는 고급술 대접을 받았다. 100% 쌀로 빚는 데다 단 한 차례의 증류과정만 거치므로 많은 양을 만들어내기 어려웠다. 너무 귀해서 조선시대 때는 연회에나 사용될 정도였다. 서민들은 그저 거친 탁주로나 쓴 입맛을 달래야 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19년 6월, 평양에 최초의 희석식 소주공장 ‘조선주조’가 들어서면서 소주는 서민의 술로 재탄생하게 된다.
 
‘희석식(稀釋式)’소주란 감자, 고구마 등의 전분을 발효시키고 이를 여러 차례 증류하여 주정을 얻은 뒤 물과 감미료를 섞어 만든 술이다. 부연 설명하면 이렇다. 고구마 등을 발효시켜 연속 증류하면 95%의 고순도 에탄올이 생성된다. 여기에 물을 섞어 약 17~25%의 알코올이 되게 농도를 조절한 것이 곧 희석식 소주다. 이때 알코올의 역한 냄새를 순화시키고자 올리고당, 자일리톨, 아스파탐, 스테비오사이드 등의 첨가물을 넣는다. 질 낮은 전분원료, 물, 각종 첨가물질 탓에 희석식 소주는 원재료 고유의 맛과 향을 잃어 깊고 그윽한 풍미를 보여주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또 단맛을 내는 증류 소주와 달리 쓴맛이 강하다. 과음 시에는 심한 숙취를 동반하기도 한다. 마트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참이슬’ ‘처음처럼’이 대표적인 희석식 소주다.
 
싼값에 대량의 소주를 생산할 수 있는 공정이 보급되면서 조선 땅의 소주시장은 불처럼 번져갔다. 1919년 10월, 남한지역 최초의 희석식 소주공장 ‘조일양조장’이 인천에 세워졌고 1924년에는 ‘진로소주’로 유명한 ‘진천양조’가 평안남도 용강군에 설립됐다. 이 무렵 조선에는 1,300개 넘는 소주공장이 난립했다. 그러나 일제말기, 수세에 몰린 일본이 에탄올을 전쟁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모든 소주 공장의 알코올을 징발하는 바람에 희석식 소주공장들은 줄줄이 문을 닫기도 했다.
 
주류산업은 광복과 전쟁 그리고 휴전을 거친 뒤 부활하기 시작했다. 막걸리야 너무 친근한 토속주였지만 그래도 시장의 대세는 소주였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서민의 쓰린 속과 고단한 삶을 달래는데 독한 소주만큼 좋은 것이 무에 있었으랴. 당시 소주 도수는 35도였다. 목구멍을 태우듯 화끈한 그것이 짜르르 식도를 타고 창자 깊숙이 내려갈 때 국민들은 다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재건의 삽을 들었다.
 
1965년 1월, 박정희 정권은 쌀로 술 빚는 것을 금지하는 ‘양곡관리법’을 발표했다. 어려운 경제 환경에 귀중한 식량자원인 쌀로 술을 만들어 먹는다는 것은 국민정서상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실상은 저임금의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경제개발에 투입할 저임금 노동력을 유지하려면 쌀값을 낮게 묶어둬야 했다. 때문에 저곡가를 지탱해야 했던 박정희는 쌀로는 일체의 술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이 조치로 쌀을 주원료로 삼던 전통 증류주들은 하루아침에 설 땅을 잃었다. 쌀 막걸리마저 사라진 세상의 주인공은 타피오카, 감자, 고구마 등 값싼 재료로 만든 싸구려 희석식 소주였다. 바야흐로 소주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후 양곡관리법은 30년 넘게 유지되다 1995년 해제됐다.
 
진로 vs 삼학
 
6.25 직후 월남한 ‘진천양조’는 부산에 둥지를 틀었다가 환도를 계기로 1954년 상경해 영등포에 공장을 짓고 진로브랜드를 되살렸다. 그리고 1955년 심벌을 두꺼비로 바꿨으며 1966년에 회사명을 ‘진로주조’로 변경했다.
 
▲원숭이 심벌의 진로 상표(왼쪽)와 두꺼비로 바뀐 상표.
 
최고의 매출을 자랑하며 국민의 술로 인정받은 진로는 1959년, 국내 최초로 CM송을 제작해 한국 광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애니메이션을 곁들인 이 CM송은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진로의 판매실적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추억의 그 노래 한번 음미해보자.
 
야야야 야야야 차차차/야야야 야야야야 차차차/너도 진로 나도 진로/야야야 야야야야 차차차/향기가 코끝에 풍기면 혀끝이 짜르르하네/술술 진로소주 한 잔이 파라다이스/희망찬 우리들의 보너스/진로 한잔이면 걱정도 없어/진로 한잔하면/(어허~기분이 좋아요) 진로 파라다이스.
 
‘진로 차차차 송’으로 알려진 이 노래가 얼마나 인기였는지, 소주가 뭔지도 모르는 동네 꼬마들까지 죄다 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다녔다. 진로는 이 광고 덕에 판매량이 25배나 증가하는 기염을 토했고 이후 승승장구, 매년 수십만 상자씩 출고량을 늘려나갔다. 이후 진로는 한국 소주를 대표하는 1등 브랜드로 성장한다. 그러나 1세대 창업주의 작고 이후 가업을 물려받은 2세 오너의 방만한 경영 때문에 회사를 말아먹고 2005년 맥주회사 하이트에 인수됐다. 하이트는 진로의 과거 명성을 계승 유지하기 위해 회사명을 ‘하이트진로’로 바꾸었으며 진로의 연혁도 그대로 따르고 있다.
 
96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두꺼비 ‘진로소주’는 누가 뭐래도 반박이 불가한 한국 최고의 소주였지만 진로가 애초부터 업계의 지존으로 군림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1967년 무렵까지 국내 소주시장을 지배한 것은 전남 목포를 연고지로 둔 ‘삼학소주’였다. 1947년 ‘목포양조주식회사’로 출범한 삼학소주는 1960년대 후반까지는 납세실적이 진로의 2배에 달할 만큼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다. 얼마나 인기가 좋았는지 삼학 상표를 위조한 가짜 소주가 전국에 나돌아 몸살을 앓을 정도였다.
 
극작가 겸 연극연출가 차범석의 부친인 차남진,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투신한 작가 김우진의 형 김철진, 가수 남진의 부친인 김문옥이 공동 창업주였으며 훗날 남진의 이모부인 김상두 씨가 기업을 인수해 ‘삼학양조’로 상호를 변경하며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이 무렵 삼학은 월 3백만 병의 생산능력을 과시하며 전국 시장점유율 1위의 아성을 지켜나갔다.
 
그렇게 잘 나가던 삼학이 ‘납세증지 위조사건’으로 하루아침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71년 11월, 제보를 접수한 당국은 삼학의 김상두 사장 집을 수색해 30여만 장의 위조증지를 찾아냈다. 당시 2홉들이 삼학소주 1병 가격이 75원이었으니까, 대략 소주 2천만 원어치에 해당하는 가짜 증지를 적발한 셈이다. 국세청은 주류회사의 탈세방지를 위해 술병에 납세증지를 일일이 부착했었는데, 탈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삼학 경영진이 몰래 가짜 증지를 만들어 시중에 유통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3억2천만 원을 추징당한 삼학은 1973년 부도 처리됐다. 훗날 이 사건을 두고 삼학이 목포출신 정치인 김대중의 대선자금을 후원한 일로 박정희에게 정치 보복을 당한 것 아니냐는 뒷담화가 무성했으나 이는 사실무근이다.
 
유력 경쟁자 삼학이 공중분해 되면서 진로의 독주를 막을 기업은 없었지만 1970년대 초까지 전국에는 2백여 개 넘는 소주공장이 남아 피 말리는 생존경쟁을 벌였다. ‘신풍’(청도)’ ‘옥로(대구)’ ‘원앙(상주)’ ‘와룡(인천)’ ‘조해(군산)’ ‘쌍선(전주)’ ‘신선(포항)’ ‘금곡(안동)’ ‘선화(강경)’ ‘송월(이리)’ ‘설매(부산)’ 등 셀 수 없이 많은 소주회사가 전국에 산재해 있었고 서울에서만 ‘금마’ ‘신선’ ‘불로’ ‘태평’ ‘천양’ ‘한강’ ‘오아시스’ ‘007’ ‘달나라’ 등 70여 종의 소주가 출시됐다. 이들은 각자 살길을 찾느라 살을 깎는 판촉전을 펼치고 있었다.
 
1966년 서울 ‘천양주조’는 1등 20명에게 구공탄 1,000장씩을 주는 등 총 상금 333만 원의 경품을 걸었다. 같은 해 부산의 ‘대광주조’는 간판 상품인 ‘다이야 소주’ 판촉을 위해 특등 상품으로 1캐럿 다이아몬드반지를 내놓았다. 1년 뒤 마산의 ‘무학양조’도 경품을 시행했는데, 이때는 TV와 황소가 상품으로 나왔다. ‘무학양조’는 또 삼륜차와 오토바이를 경품으로 내놓은 적이 있으며 부산의 ‘대응주조’는 아예 트럭을 경품으로 내걸기도 했다.
 
▲1971년 진로 경품행사 광고. 탤런트 노주현이 행운의 병뚜껑을 들어 보이고 했다.
경품의 백미는 1971년 진로가 창립 47주년을 맞아 실시한 ‘행운의 두꺼비’ 경품이었다. 소주 병마개 속에 인쇄된 두꺼비 그림을 찾는 행사였는데 코로나 승용차 3대, 금성 냉장고, 금성TV 등이 경품으로 주어져 응모자들을 설레게 했다. 진로의 화끈한 경품공세에 자극을 받았는지 금복주와 삼학도 며칠 뒤 똑같이 승용차 3대를 걸고 경품전쟁에 뛰어들었다. 경품은 시대의 생활상을 반영한다. 진로가 창립 30주년 경품 때 내건 상품이 재봉틀, 손목시계, 뽀뿌린(포플린)옷감이었던 것을 떠올리면 시대가 많이 변한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소주, 전국구 시대를 열다
 
소주회사 간 과열경쟁에다 일부 업체의 시장독점이 문제라고 판단한 정부는 1976년, 지방의 소주 업체 육성을 위해 1개 시·도에 1개의 소주 업체만 허가하는 ‘자도주(自道酒)’ 정책을 시행했다. 이 정책으로 그동안 전국에 산재한 군소 업체들은 말끔히 정리되었고 전국적으로 10여 개의 기업만 살아남았다. 1970년대 이후 우리 소주시장을 풍미한 ‘진로(수도권)’ ‘경월(강원)’ ‘선양(충남)’ ‘대양(충북)’ ‘보배(전북)’ ‘보해(전남)’ ‘금복주(경북)’ ‘대선(부산)’ ‘무학(경남)’ ‘한일(제주)’이 그들이다. 이들 업체는 ‘자도주’ 우선원칙에 따라 ‘진로’가 수도권 이외 타 권역을 침범할 수 없게 되자 안정적으로 매출을 끌어올리며 사세를 확장했다. 그러나 ‘자도주’ 정책은 시장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헌재의 결정에 따라 1996년 폐지됐다. 이후 소주 업계는 전국구를 배경으로 무한 경쟁에 돌입하게 됐다.
 
현재 소주시장은 ‘진로’의 혈통을 계승한 ‘하이트진로’의 ‘참이슬’과 ‘롯데주류’가 생산하는 ‘처음처럼’의 2파전으로 좁혀진 상태다. 지역소주 ‘잎새주(보해)’ ‘맛있는 참(금복주)’ ‘좋은데이(무학)’ 등이 나름 신선한 브랜드 네임을 앞세워 선전하고 있지만 ‘참이슬’과 ‘처음처럼’의 패권다툼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1920년대에 알코올 도수 35도로 시작한 소주는 해방 이후 희석식으로 제조방식이 바뀌면서 30도를 계속 유지하다 1973년에 25도로 리뉴얼됐다. 이후 30여 년 가까이 소주는 25도인 것이 불문율처럼 여겨졌으나 1998년 23도짜리 ‘참이슬’이 등장하면서 ‘저도주(低度酒)’ 경쟁에 불이 붙었다. 업계는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소주 도수를 낮췄다지만 매출증가와 원가절감을 노린 얕은 수작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일부 고 알코올 마니아를 제외하면 저도주에 대한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인 편이다. 업계는 도수 낮은 술을 계속 출시해 지금은 16.9도짜리 소주까지 팔리고 있다.
 
허름한 목로주점의 주모가 내놓은 김치쪼가리, 포장마차 닭똥집, 짱깨집 짬뽕국물, 새벽시장의 뜨끈한 순댓국, 자취방의 새우깡, 회사 앞 단골식당 삼겹살 등 그 어떤 안주와도 궁합이 맞는 소주는 과거에는 잔술이나 반병 술로도 팔렸다. 병따개가 귀했던 때는 왕관모양 병뚜껑을 이빨로 따다가 어금니를 부러뜨리는 이들이 있었고, 뱃속에 기름기라곤 없는데 30도나 되는 쓴 소주를 마구 들이켠 사람들은 전봇대 아래나 늦은 밤 버스 안에서 토악질을 해대기 일쑤였다. 그러자 소주 맛을 순하게 해주고 구토를 막아준다는 믿음에 위장약 ‘멕소롱(동아제약)’을 소주에 타 먹는 것이 유행한 적이 있다. 소주에 멕소롱을 타면 연한 초록빛을 띄는 것이 페퍼민트 칵테일 비스무리한 맛을 냈다.
 
‘롯데칠성’은 아예 소주에 타서 마시면 양주 맛을 내며 숙취도 줄여준다는 음료를 내놓았다. 이 첨가음료의 이름이 ‘타’였다. ‘타’가 출시된 1974년 도시근로자 월평균 수입은 약 5만 4천원 수준이었다. 소주 1병 100원, 맥주 220원, 거북선 담배 1갑 200원이었는데 살롱에서 양주 한 병 먹으려면 2만 원은 있어야 했다. ‘타’는 언감생심, 양주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서민을 위한 칵테일음료였지만 돌이켜보면 마음 짠한 시대의 산물이었다.
 
타인의 소주 한잔에는 환희와 열정이 가득하지만 당신의 소주잔에는 유독 회한과 절망, 깊은 시름과 그리움만 담겨 있다고 생각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차피 세상은 불공평하고 한잔 술에 울고 웃는 것이 인생 아닌가. 사는 게 힘들다고 느껴지면 오늘 하루는 맘껏 취해보고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하는 것은 어떨까. 노르웨이 속담에 ‘인생은 짧지만 술잔을 비울 시간은 아직도 충분하다’는 말이 있다. 다음엔 웃으며 ‘짠~’을 외치게 될지 누가 알랴. 오늘은 열심히 달려온 당신을 위해 건배하자.
 
#에필로그: 아버지의 소주 ---------------------------------------
 
아버지는 새벽닭이 울고 먼동이 트면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문지방을 나섰다. 아버지가 향한 곳은 단골 구멍가게. 인기척을 느낀 주인영감은 벌써 됫병소주 마개를 열고 엽차 잔 가득 술을 따라 아버지에게 건넸다. 벌컥벌컥 소주를 들이켠 아버지는 찐계란 소쿠리 옆 종지에 담긴 굵은소금 몇 알갱이를 입안에 툭 털어놓고는 가게 문을 나섰다. 술값은 당연히 외상이었다.
 
내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나 다름없었다. 젊은 나이에 상처한 아버지는 술에 빠져 인생을 포기하듯 살았다. 새벽에 술을 시작하면 자정이 되어야 끝이 났다. 술주정도 심했다. 툭하면 밥상을 엎었고, 말 안 듣는다고 어린 자식을 매질했다. 그때는 아버지가 너무 미워서 찬장 안에 있는 소주병을 몰래 갖다 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또 맞았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되던 해,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아버지는 동네 상회에 소주 값을 빚으로 남기고 세상과 하직했다. 지독한 결핍의 인생을 살다가 지금의 나보다도 젊은 나이에 먼 곳으로 떠난 사람. 이제는 아버지 무덤에 소주를 부어드릴 뿐, 정작 아버지와는 술 한잔 같이 할 수 없다. 술 때문에 나쁜 기억이 더 많지만 그래도 문득문득 그리워지는 아버지. 오늘은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한 편의 시로 대신한다.
 
<소주병>
 
술병은 잔에다
자기를 계속 따라주면서
술을 비워간다
 
빈병은 아무렇게나 버려져
길거리나
쓰레기장에서 굴러다닌다
 
바람이 세게 불던 날 밤 나는
문밖에서
아버지가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나가보니
마루 끝에 쪼그려 앉은
빈 소주병이었다
 
(시인 공광규, 2004. 실천문학사)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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