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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야 에세이] 마음에 대하여 81

기사승인 2019.06.11  09: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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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를 찾아서_#37. 본성(本性)과 인간
 
하루를 사는 인생에 있어 내 생각과 마음이 일어나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같이 일어나는 마음을 ‘나’라는 아집, 아상을 떠나 객관적으로 비추어봄으로써 나 자신의 본성(本性)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 차이를 알므로 궁극적인 나 자신의 본질을 알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이같이 함으로써 비로소 나 자신의 근본을 알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내 마음을 ‘돌이켜 비춘다’라는 의미로 회광반조(廻光返照)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성(윤회가 아닌 순수한 의미의 태초를 말함)으로 형성된 내 마음(상)에 따라 잔잔한 호수에 파도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 파도를 잠잠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나’라는 아집된 아상(我相)의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이같이 함으로 호수 속 강 바닥에 있는 내 참나(본성)를 스스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잔잔하게 하지 못하면 결국 자신의 본성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마음공부를 혼자 할 수 없는 이유는 모든 것을 자기 관념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마치 팔은 안으로 굽어지게 되어 있는 것과 같으며 자석의 끌림과 같은 것이므로 이것을 떠나 객관적 사고로 세상을 보고 인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진리적 개념에서의 상(象)이 있으므로 그 이치에 따라 물질 개념으로 육신의 ‘나’라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있으므로 ‘나’라고 하는 상(相)의 마음이 있다고 해야 이치에 맞는 말이 되고 ‘나’라는 것이 죽으면 무의식의 참나 기운만 남게 된다. 이것은 빛과 그림자와 같은 개념으로 따로 분리해서 말할 수 없지만, 따로 분리해야만 모든 말들이 이치에 맞게 정립이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철길의 두 갈래의 이치와 같으며, ‘물질이치’와 ‘진리이치’의 정의(正意)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보이는 물질로 진리의 세계를 대입해서 말하므로 생명체의 본질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상적인 말과 진리이치에 맞는 말이 뭔가를 반드시 정립해야 한다. 따라서 현실에서 정석(定石)이라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윤리·도덕에 따른 기본행동을 인간의 도리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물질의 논리이며, 진리적으로 정법(正法)이라는 것은 ‘이치에 맞는 말이다’라고 해야 맞는 말이 되고, 이것은 비물질의 개념이 된다. 물질이치·진리이치라는 이 개념을 스스로 정립하지 못하면서 진리(眞理)라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어리석음이다. 이 양극단을 아는 것이 깨달음이고 이때 비로소 중도(中道)라는 것이 뭔가를 알게 되며 지혜를 얻어 이치에 맞는 말과 행을 할 수 있는 것이다.
 
 

silverinews 천산야 news1@silverinews.com

<저작권자 © 실버아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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