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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광고 한 편, 사진 한 장으로 읽는 대중문화 이야기> ⑧ 국민학교

기사승인 2020.09.07  15:4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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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 잘했어요’ 도장이 최고의 상이던 시절

왼쪽 가슴에 콧수건과 이름표를 달고 부모님과 함께 참석한 국민학교 입학식. 까까머리 코흘리개들이 새까맣게 모인 운동장에서 ‘앞으로 나란히’ ‘바로’를 수도 없이 되풀이하면서 짜증을 냈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그 뒤로 강산이 몇 번이 변했는지 가물가물하다.
 
1894년 친일파 내각에 의해 세워진 ‘소학교(小學校)’는 1909년 ‘보통학교(普通學校)’, 다시 ‘소학교(1938년)’를 거쳐 1941년 ‘국민학교(國民學校)’로 명칭이 바뀌었다. 일왕 칙령에 의해 생긴 ‘국민학교’의 ‘국민’은 ‘황국신민’을 줄인 뜻이다. 1996년 김영삼 정부는 역사바로세우기 차원에서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던 ‘국민학교’ 명칭을 ‘초등학교(初等學校)’로 변경했다. 실로 55년 만의 개혁이었다.
 
콩나물시루와 다름없던 교실
 
1960~7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닌 사람은 콩나물시루처럼 바글거렸던 교실과 운동장을 기억하리라. 당시 한 학급당 인원은 70~80명을 넘는 것이 예사였고 심한 경우 100명을 넘기는 경우도 있었다. 1978년 서울 독산국민학교 2학년 5반 학생은 104명으로, 우리나라 최고의 콩나물교실로 기록된 바 있다. 초등 의무교육은 1950년 6월 1일부터 시행됐다. 그러나 교실확보가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취학 연령대에 속한 아동이 한꺼번에 몰려든 데다 출산율 증가, 도시개발, 인구유입 등 여러 변수가 겹쳐 당시의 국민학교는 심한 몸살을 앓을 수밖에 없었다.
 
▲1963년 한 국민학교의 교실풍경.
 
과밀학급을 해소하기 위해 당국은 2부제 또는 3부제 수업을 권장했으나 여전히 책걸상이 모자라 바닥에 엎드려 공부하는 아이들이 있거나 맨 앞자리 아이들은 아예 칠판과 붙어 앉아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고 선생님 얼굴을 빤히 쳐다봐야 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실증축과 학교설립, 산아제한정책 등에 힘입어 과밀학급 문제는 조금씩 해소됐다. 1970년대 학급당 62명이었던 학생 수가 1980년대 51.5명, 1990년대 41.4명, 2010년대 26.6명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학생 감소 폭이 너무 심해 오히려 정상적인 학교운영이 곤란하다는 부작용이 발생하고 있다.
 
갑오개혁 시기이던 1894년 ‘관립 교동소학교’로 개교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이 된 교동초등학교(서울 종로구 경운동)는 126년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이다. 제4대 대통령 윤보선, 소설가 심훈, 동요작가 윤극영, 아동문학가 윤석중, 바둑기사 조남철, 연예인 구봉서와 강수연 등을 배출한 이 학교는 1960~70년대만 해도 5천여 명의 학생이 적을 두고 있었다. 당시 중학교에 가려면 시험을 치러서 합격해야 했는데, 교동초등학교는 경기중학교 등 명문교 합격자를 많이 배출해 인기가 좋았다.
 
그런데 나중에 중학교 입시제도가 폐지되고 4대문 내 인구감소, 저출산 등의 여파로 교동초등학교 학생 수는 매년 감소해 2010년엔 100명 밖에 안되었다. 이듬해 입학생도 9명에 불과했다. 그런가하면 서울 강서구 염강초등학교는 학생 수 감소로 서울시 최초로 올 3월 폐교됐다. 또 80년 전통을 자랑하던 마포구 창천초등학교도 학생 수 감소로 창천중학교와 통합했다. 기존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합쳐지는 것은 서울시에서 창천초등학교가 처음이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자. 콩나물시루를 방불케 했던 학교는 매주 월요일이면 전교생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고 애국조회를 실시했다. 한 명도 빠짐없이 불려나온 아이들은 오와 열을 맞추어 국민의례를 하고 연단에 오른 교장선생의 훈화를 들었다. 그 시간이 무지무지 싫었던 기억이다. ‘에~ 또~, 마지막으로~, 끝으로’를 반복하며 끝날 듯 끝나지 않던 교장선생의 잔소리는 건물옥상에 설치된 구닥다리 스피커의 힘을 빌려 어린 것들의 고막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평소 영양실조로 누렇게 뜬 아이들이 작렬하는 태양 아래서 현기증을 참지 못하고 픽픽 쓰러져도, 제대로 된 파커점퍼 한 벌이 없어 영하의 추위 속에서 아이들이 고사리 손을 비비며 오들오들 떨어도 비정한 애국조회는 멈추질 않았다.
 
육성회비 잘 내라는 당부의 말씀까지 마친 교장선생이 단상을 내려간 뒤 주훈(週訓)발표가 있고 일제의 황국신민체조를 변형한 신세계체조와 교가제창까지 해야 애국조회는 끝이 났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행진곡을 들으며 1~3학년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4~6학년은 각자의 교실로 줄맞춰 퇴장하는 식이어서 운동장은 늘 거대한 매스게임 현장처럼 보였다. 많은 전교생이 한꺼번에 교실로 돌아가려다 뒤엉켜 사고가 일어날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혹 조회가 끝날 때 울려 퍼지던 행진곡에 대한 추억이 있는 분은 요한 스트라우스의 ‘라데츠키 행진곡’이나 영화 ‘콰이 강의 다리’ 주제곡을 들어보시길.
 
요즘은 애국조회 풍경도 많이 바뀌었단다. 학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교내 방송을 통해 실내조회로 대체하는 학교가 늘고 있으며 일부는 아예 조회를 폐지하고 다른 방식으로 공지사항을 전달하는 변화를 꾀하고 있다고 한다. 마치 군부대 점호하듯 아이들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강요했던 일본식 낡은 제도가 수술대에 올랐다는 점은 환영할 일이다.
 
‘장학사 온다’ 한마디에 전교 비상사태
 
장학사(獎學士)는 학교시찰을 통해 교육관련 지도와 감시, 조언을 하는 6급 공무원이다. 통상적으로 교사는 7~6급, 교감은 5급, 교장은 4급이다. 그러나 장학사는 등급을 떠나 마치 현대판 암행어사와 같은 느낌을 주는 존재였다. 학교의 상급기관인 교육청에서 파견 나온 장학사 중에는 마치 감찰기관에서 나온 고위관리처럼 위세를 부리는 이가 많았다. 실제로 각 학교에서는 장학사 파견 소식이 전해지면 뭐라도 꼬투리가 잡힐까 노심초사하며 교사와 학생을 총동원하여 손님맞이 하느라 난리법석을 피우곤 했다.
 
▲나무복도에 기름칠하고 유리창 박박 문지르던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장학사가 오기 전날, 전교생은 운동장으로 몰려나와 땅바닥에 떨어져 있을지도 모를 유리조각, 못, 돌멩이 따위를 이 잡듯이 주웠다. 그리고 왁스, 콩기름을 묻혀 나무복도와 교실바닥을 반질반질해질 때까지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각자 집에서 만들어 온 마른걸레와 신문지를 가지고 창틀에 매달려 파리똥 하나 보이지 않도록 입김을 불어가며 유리창도 닦았다. 장학사 한 명의 출동이 전교생을 환경미화원으로 만들어버리는 세상이었으니 얼마나 권위주의적인 시절이었던가. 장학사는 국민학교 교사를 ‘훈도’라고 칭하던 일제강점기 시절의 ‘시학관(視學官)’제도를 변형한 것이다. 다른 곳도 아닌 교육현장에 이토록 오래도록 일제의 폐습이 남아있다는 것은 한 번쯤 새겨봐야 할 일이다.
 
선생님이 나눠주고 집에 가서 작성해 오라던 ‘가정환경조사서’에 대한 기억도 있다. 그때 설문을 보면 빈부정도를 파악한다며 ‘상/중/하’의 하나에 동그라미를 치는 것에서부터 현재 살고 있는 집이 ‘자가/전세/월세/하숙/자취’인지 물었다. 또 공부방과 책상은 있는지, 신문은 구독하는지도 물었다. 그 중 압권은 집안에 소유하고 있는 물품을 체크하는 항목이었는데, 가지고 있는 것에 0표하라는 설문에는 이런 것들이 있었다. ‘자전거( ) 시계( ) 카메라( ) 라듸오( ) 텔레비죤( ) 전화( ) 전축( ) 피아노( ) 자동차( )’.
 
교문 앞 야바위 아저씨
 
6년 동안 한 지붕 아래서 공부하며 뛰놀던 동무들은 도심 재개발로 인해 대처로 이사 가거나 상급학교로 진학하면서 뿔뿔이 흩어졌지만 국민학교 시절의 추억은 언제 생각해도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떠올리게 한다.
 
음악시간을 앞두고 분단별로 달려가 옮기던 무거운 풍금, 급식으로 제공되던 노란 옥수수 빵, 불우이웃 돕는다고 편지봉투에 담아가던 쌀, 일선장병에게 치약, 비누, 껌, 캐러멜, 담배, 선데이서울 등을 담아 보냈던 위문대(慰問袋)와 위문편지, 지나간 달력종이로 겉을 싸고 ‘국어 1-1’이라 쓰던 새 교과서, 학교 뒷동산에 올라가 해결했던 채변봉투와 한 명씩 불려나가 받아먹던 회충약, 앞면에 만화그림이 그려있고 뒷면에는 구구단과 알파벳이 인쇄돼 있던 책받침. 그걸 가지고 누구 책받침이 더 센지 겨뤄보려고 내려찍다 쫙-쪼개진 내 책받침, ☆표시와 ‘참 잘했어요’ 스탬프를 받았던 숙제검사, 숙제를 하지 않아 선생님께 30Cm 대나무자로 사정없이 손바닥을 맞던 내 짝꿍, 갖고 싶었던 자석달린 이단필통과 24색 왕자파스, 갈탄의 노란연기가 무럭무럭 피어나던 교실난로와 그 위에 쌓아둔 도시락, 연필심 부러뜨리기와 지우개 따먹기, 뒷면에 인형 옷 입히기 공작그림이 그려 있어 여자애들이 좋아했던 공책, 선생님 말씀 안 듣는다고 오리걸음 걸으며 받았던 단체기합, 보물찾기 소풍과 청군 백군 갈려 싸우던 운동회, 표준전과와 동아수련장 등등.
 
▲옛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참 잘했어요’ 도장과 문구.
 
얼마 전 산책 중에 한 초등학교 앞을 지난 적이 있다. 학교 앞에 있는 문방구, 분식집을 보니 옛 추억이 확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구나.’ 라면 상자에 든 노란병아리를 한 마리에 천 원 주고 사가는 아이들 모습이 그렇고, 하굣길에 쫀드기를 사먹는 아이, 조악한 뽑기 기계에 매달려 필사적으로 승부를 보겠다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요즘 애들이 제아무리 발랑 까지고 영악하다 해도 아이들은 아이들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옛날 학교 앞 풍경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요즘은 학습지 교사들이 나와 연예인 사진이 인쇄된 전단을 공책에 끼워 아이들에게 나눠주지만 과거에는 꼬마들 코 묻은 돈을 따먹는 야바위꾼들이 학교주변을 맴돌았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 탓도 있었지만 정말이지 야바위 아저씨들은 집요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소풍을 가면 그곳까지 따라와 아이들 등을 쳤다.
 
그 시절 우리를 희롱했던 야바위게임을 떠올려볼까. 아이들의 코 묻은 돈을 제일 많이 앗아갔던 것은 고무줄게임이었다. 과정은 이렇다. 야바위 아저씨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은근슬쩍 말을 건다. “연습으로 한 번 해보련?” 연습이라는데 뭐가 문제냐. 덥석 덤벼드는 순간 이미 코는 꿰인 거다.
 
이 야바위는 두 가닥 고무줄의 끝을 보여주며 어느 것이 더 긴 것인지(혹은 짧은 것인지) 맞추는 게임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확률 50%인데다 처음 두 개의 고무줄을 섞을 때 대충 어느 쪽이 긴 것인지 알만하도록 허점을 보여주는 데 함정이 있다. 돈 걸지 않고 연습할 때는 백발백중 긴 것을 고르는데, 어찌된 일인지 본 게임에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100% 꽝이다. 하도 안돼서 일부러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쪽 고무줄을 골라도 꽝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 느끼는 순간 하늘은 노래진다. 후회해도 때는 늦었고 소중한 내 돈은 이미 야바위 아저씨 수중에 들어간 뒤다.
 
▲1959년도에 쓰였던 국어 1학년 교과서.
 
또 기억에 남는 야바위는 물방개놀이다. 함석으로 만든 둥근 대야에 물이 담겨있는데 그 안에는 물방개 한 마리가 헤엄치며 논다. 대야 안쪽은 여러 칸막이로 나뉘어 있고 각 칸마다 상품이 걸려있다. 그럴싸한 장난감이 걸린 칸에 돈을 건 뒤 국자로 방개를 떠서 함석 중앙 구멍으로 집어넣는다. 통로를 빠져나온 방개가 이리저리 헤엄치다 자신이 원하는 칸으로 들어가 멈추면 거기에 걸린 상품을 가져가면 된다. 그런데 어찌된 노릇인지 탱크나 비행기 같은 그럴싸한 장난감이 놓인 칸으로는 이놈의 방개가 한사코 들어가길 거부한다. 기껏 들어간다는 곳이 기본 눈깔사탕 한 알 정도 걸린 ‘꽝’ 구역이다. 물방개에게 특수훈련이라도 시켰다는 것인지 기가 막힐 일이다. 어쨌든 이 물방개 야바위 수수께끼는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고 의문으로 남아있다.
 
시퍼런 개복숭아, 떡볶이, 알록달록 색깔 물이 든 비닐주스, 번데기와 소라, 대패로 깎아 나무젓가락에 돌돌 말아 팔던 생강엿, 달콤한 솜사탕, 달고나와 뽑기. 그리고 곁에 찰싹 붙어서 “한 입만~”을 조르던 코흘리개 내 친구와 함께 걷던 학교 앞 길.
 
듣자하니 요즘 초등학생들은 학교 앞 분식집에 외상장부를 달아놓고 간식을 먹는단다. 최근 학교폭력으로 현금을 빼앗기는 사례가 많아져 학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아예 현금을 쥐어주지 않아서 생긴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외상거래는 간식을 제때 챙겨줄 수 없는 맞벌이 엄마들이 학교 앞 분식가게와 협상을 맺어 생각해낸 고육지책의 일환이기도 하다. 물론 결재는 선불이다. 전학, 이사 등의 이유로 돈을 떼이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다. 선지급한 1~2만 원 정도 내에서 자신이 사 먹은 만큼 돈을 까나가는 시스템인데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이 건전한 경제관을 키우기도 전에 외상장부 기록하는 습관부터 배우는 것 같아 왠지 씁쓸해지는 요즘 학교 앞 풍경이다.
 
 
* 고무줄 야바위의 진실 - 돌아버릴 것만 같았지요? 아무리 뽑아도 짧은 것만 나오던 고무줄 야바위. 길고 짧은 고무줄을 그저 비벼대는 것처럼 보였지만 돈을 거는 순간 야바위 아저씨 손 안에서 고무줄은 오른쪽 사진처럼 변해 있던 것을 그때는 감쪽같이 몰랐다. 짧은 고무줄 하나를 꺾어서 위로 틀어쥐고 긴 줄은 고리 아래로 축 늘어뜨려 놓고 안보이게 움켜쥐고 있었으니 제아무리 오른쪽, 왼쪽 번갈아 뽑아 봐도 한 가지 고무줄만 뽑힐 수밖에 없었던 것을.
 
일확천금에 눈이 머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애나 어른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10원 걸고 긴 고무줄 뽑으면 내 20원을 주마.” 야바위 아저씨 꼬임에 깜빡 속아 집에 돌아갈 차비를 몽땅 날려버린 아이는 애가 마른 나머지 그만 집에 가자고 조르는 동생 돈까지 빼앗아 한판 승부를 벌였지만 아뿔싸!
 
하지만 너무 아쉬워 말자. 야바위 아저씨에게 털린 돈은 교실에서는 배울 수 없는 인생의 교훈을 터득하느라 지불한 수업료라고 생각하자. 영혼의 빈 곳간을 채우는 방식에는 노름 말고도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을,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보다 훌륭한 가르침이 또 있겠는가. 이렇듯 한낱 학교 앞 야바위에 대한 추억마저도 한 편의 우화가 되어 우리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세상은 그렇게 재밌는 곳이었으며 그리하여 우리의 어린 날 또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silverinews 박영신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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