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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⑩ - 12인의 성난 사람들

기사승인 2018.11.21  09:4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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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⑩ - 12인의 성난 사람들
 
  
  - 제작 : 1957년, 미국
  - 감독 : 시드니 루멧
  - 배우 : 헨리 폰다, 리 J. 콥스, 마틴 발삼 외
  - 필름 : 흑백
  - 상영시간 : 96분
  - 수상 :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아카데미 영화제 작품, 감독, 각본상 노미네이트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의한 판단의 오류, 편견과 속단에 사로잡혀 진실을 외면하는 현실의 어두운 단면을 배심원제도라는 사법적 장치를 통해 신랄하게 비판한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합리적 의심’이라는 두 가지 화두에 대한 깊은 고민을 보여주는 이 고감도 법률드라마는 검사와 변호사의 흔한 법리 다툼이 아니라 배심원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논리싸움을 그린 독특한 형식의 영화다.
 
한 소년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놓고 배심원 간의 공방을 통해 한 인간을 구원할 것인지, 아니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이 영화는 관객에게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본질,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철저한 저예산 영화다(당시 제작비 34만 달러). 배우들의 출연료 외에는 크게 돈 들어간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영화는 1시간 36분의 러닝타임 내내 밀폐된 배심원실 안에서 사건의 진실을 놓고 설전을 벌이는 열두 사내의 표정과 대사만으로 채워져 있다. 헨리 폰다를 제외한 나머지 출연진 모두는 조연급 연기자들이다. 지나친 화려함이 없기에 영화는 더 사실적이고 짜릿하게 다가온다.
 
‘언제나 편견이 진실을 가린다’
 
18세 미국 소년이 아버지를 칼로 찔러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된다. 일급살인  혐의에 대한 증언 청취와 법 해석 절차를 모두 마친 법원은 소년의 유무죄 결정을 배심원 회의에 넘긴다. 소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12인의 사나이들이 하나둘 배심원실로 모여든다. 법정에서 제시된 증거와 증언을 토대로 12인의 배심원들은 어떤 경우든 만장일치의 결론을 내려야 한다. 유죄로 판명될 경우 소년은 일급살인죄로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다.
 
유난히 무더운 여름. 가뜩이나 비좁은 배심원실로 들어선 남자들은 찜통더위에 고통받는다. 하나밖에 없는 선풍기는 작동되지 않는다. 배심원들은 연신 흐르는 땀을 씻어내며 누가 봐도 유죄가 확실해 보이는 사건을 심리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라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배심원들은 각자의 이름도 모르는 채 형식적인 인사 몇 마디만 나누고 바로 회의에 들어간다. 모든 정황상 소년의 유죄가 확실하다고 생각하는 다수 배심원들은 속히 의견을 모으고 빨리 각자의 사생활로 돌아갈 생각뿐이다. 사전 토론 없이 거수투표가 먼저 이뤄진다. 12명 중 11명의 배심원이 소년의 유죄판결에 찬성한다. 단 8번 배심원(건축가/헨리 폰다)만은 소년의 무죄를 주장한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온다.
 
8번 배심원은 한 인간의 목숨이 걸린 일이므로 좀 더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며 토론을 요구한다. 빈민가에 살며 이민족 출신인 소년의 알리바이를 배심원들은 믿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더 이상의 소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해 보이는 살인사건을 두고 토론하자는 8번 배심원의 행동에 혐오를 드러낸다. 그러나 8번 배심원은 이렇게 말한다. “평생 학대를 받고 살아온 소년입니다. 아홉 살에 엄마가 죽었고, 아버지가 감옥에 간 사이 고아원에 보내졌습니다. 순탄치 못한 삶을 살면서 거칠고 반항적이 되었지요. 왜 그랬을까요. 매일 맞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18년간 고달픈 삶을 살아왔는데 몇 마디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평결은 만장일치로 모아져야 하는 상황. 배심원들은 할 수 없이 한 시간만 토론하는데 동의한다. 8번 배심원은 법정에서 반대심문을 제대로 하지 않은 변호사의 무능력을 제기하고 증인들의 증언에도 의문이 있다고 말한다. 다른 배심원들은 살인사건의 증거물인 잭나이프의 문양을 들어 소년이 진범임을 주장한다. 소년이 고물상에서 구입해 지니고 있던 잭나이프에는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사망자 가슴에 꽂혀 있던 잭나이프의 문양과 너무 똑같아 소년의 무죄를 반박하기가 어려운 상황. 이때 8번 배심원이 호주머니에서 소년의 칼 문양과 똑같은 잭나이프를 꺼내 보인다. 그는 자신도 전당포에서 똑같은 문양의 잭나이프를 살 수 있었다며 누군가 소년의 것과 비슷한 잭나이프를 구해 살인했을 개연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고 말한다.
 
8번 배심원은 투표를 한 번 더 할 것을 제안한다. “이번에는 비밀투표로 하되 나는 빠지겠소.  또다시 11명 모두 유죄라고 한다면 나도 소년의 유죄를 인정하겠소. 그러나 무죄가 단 한 표라도 나오면 우리는 더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전원 동의하에 비밀투표가 진행된다. 위원장(풋볼코치/마틴 발삼)이 개표를 진행한다. 유죄, 유죄, 유죄, 유죄․․․․․․. 소년의 유죄가 거의 확정돼 가는 순간 ‘무죄’라고 쓰인 투표용지가 나온다. 배심원들은 동요한다. 3번 배심원(통신사업자/리 J. 콥스)은 “배신자가 누구냐!”며 극도의 불만을 터뜨린다. 그러자 9번 배심원(은퇴한 노인/조셉 스위니)이 입을 뗀다. “섣불리 결론을 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8번 배심원의 견해에 일리가 있어 그렇게 투표했소.”
 
찬반결과는 10:2로 바뀐 상황. 유죄에 투표한 배심원들은 아파트에서 아버지와 다툼 끝에 뛰쳐나가는 소년을 보았다는 아래층 노인과 살인 장면을 목격했다는 아파트 건너편에 사는 여자의 증언을 들어 소년의 범죄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9번 배심원은 같은 노인의 처지에서 봤을 때 외로운 노인이 주변의 관심을 끌어 보려는 심리로 허위 증언을 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조용하고 소심하고 보잘 것 없는 노인으로 무료한 인생을 보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지도 않죠. 아무도 이 노인을 모릅니다. 75살이 넘은 이후론 충고를 구하는 이도 없습니다. 여러분, 쓸모가 없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입니다. 자기 말을 들어주길 원하죠. 한 번만이라도. 이 사람에겐 중요합니다. 소외된다는 건 정말 견디기 힘듭니다.”
 
다시 재투표가 진행된다. 논의가 진전되면서 5번 배심원(빈민가 출신/잭 크루그먼)과 11번 배심원(이민자 출신 시계기술자/게오르그 보스코비치)이 무죄 쪽으로 선회한다. 이제 결과는 8:4.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의견다툼은 격화되고 급기야 육탄대결 직전까지 이른다. 노인 증언의 신빙성 문제를 따지기 위해 아파트 도면이 등장하고, 8번 배심원은 조목조목 증언의 허점을 지적한다. 현장 검증을 방불케 하는 토론이 끝난 뒤 2번 배심원(은행원/존 피들러)과 6번 배심원(노동자/에드워드 빈스)도 무죄 의견으로 돌아서 6:6 상황이 된다. 유죄를 확신하는 여섯 명 배심원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고 상대를 향한 인신공격이 난무한다.
 
한낮의 무더위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멀리서 천둥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소나기가 퍼붓는다. 어두워진 실내로 비가 들이치자 배심원들은 서둘러 창문을 닫는다. 밀폐된 방안의 더위는 절정을 치닫고 배심원들의 불쾌지수도 동반상승한다. 설전은 계속되고 시간은 어느덧 저녁 6시를 가리킨다.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힌 잭나이프의 칼날 방향에 대한 검증이 시작된다. 키 작은 소년이 위에서 칼을 꽂기는 힘들다는 주장이 나온다. 다시 투표를 거친 끝에 시종 우유부단한 성격을 보이던 12번 배심원(광고업자/로버트 웨버)과 1번 위원장마저 유죄의사를 철회한다. 마침내 형세는 3:9로 역전된다.
 
편견에 사로잡혀 억지 주장만 늘어놓는 10번(차고 소유자/E.D 버글리)과 3번, 증인의 증언을 절대 신뢰하는 4번(증권중개인/E.G 마셜)만이 여전히 소년의 유죄를 고집하는 상태다. 그러나 “사람을 죽이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아이의 천성이 폭력적이라서 살인을 한 것”이라며 일방적으로 소년을 매도하는 10번과 3번 배심원의 태도에는 배심원 모두 싸늘한 반응을 보인다. 8번 배심원은 “언제나 편견이 진실을 가린다. 의심할 여지가 있다면 배심원은 유죄선고를 내릴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이번에는 잠자던 침대 위에서 살인 당시 모습을 목격했다는 아파트 건너편 여인의 증언이 도마에 오른다. 어두운 밤, 시력 안 좋은 그녀가 안경을 벗고 잠을 자던 도중 20m 떨어진 건너편 건물에서 벌어지는 범죄 장면을 또렷이 목격했다는 증언은 신뢰하기 힘들다는 8번 배심원의 해석은 최후의 한 방이 된다. 결국 3번을 제외한 두 사람의 배심원도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 혼자 남은 3번 배심원은 끝까지 고집을 피우며 유죄를 주장한다. 11명의 배심원은 설득력 있는 근거를 대지 못하고 억지만 부리는 그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애지중지 키워왔건만 머리가 큰 뒤로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아들을 가진 3번 배심원. 그는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 세대 아이들을 향한 분노와 증오로 꼬여있는 인물이다. 매정한 아들을 벌주고 싶었던 그는 피의자 소년을 사형대에 세우는 것으로써 자신의 분을 일부나마 삭여보려 했던 것. 그러나 자가당착 논리로 궁지에 빠진 3번 배심원은 결국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무․․․무죄․․․.”라 말하며 백기를 든다. 자신의 지갑 속에 들어 있던 아들의 사진을 발기발기 찢어버리며 그 자리에서 흐느껴 우는 3번 배심원. 그의 결심으로 12명 전원 무죄 결론이 나온 배심원회의는 끝을 맺는다.
 
독특한 형식의 저예산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참 독특한 형식의 저예산 영화다. 비중 있는 여자 연기자는 아예 나오지 않으며 남성 배우들조차 번호로 지칭될 뿐 극 중 이름이 없다(영화 말미에 8번과 9번 배심원이 헤어질 때 통성명을 한다. 이때 두 사람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전부다). 또 피고인 소년은 The boy(소년), 목격자 노인은 Old man(노인), 여자 증인은 The lady across the street(거리 건너편의 여인)로 지칭된다. 배심원실의 책상과 의자, 망가진 선풍기 외 어떤 특별한 세트도 없다. 타이트한 제작비를 고려해 2주간의 리허설을 거친 뒤 단 3주 만에 영화를 완성했다.
 
이 작품이 영화 데뷔작인 시드니 루멧(1924~2011)감독은 TV드라마 연출가 출신이다. 1954년 CBS 텔레비전을 통해 동명드라마를 만들었던 루멧 감독의 재능을 눈여겨 본 헨리 폰다가 각본을 쓴 레지널드 로즈와 함께 공동 투자하여 3년 뒤 스크린 영화로 제작한 것이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다. 시드니 루멧은 이 소규모 영화로 베를린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에 해당하는 황금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아카데미 영화제에서도 작품, 감독, 각본상 후보에 올랐지만 이 상들은 같은 해 제작된 데이비드 린 감독의 ‘콰이 강의 다리’가 모두 가져갔다.
 
시드니 루멧 감독은 화려함보다는 기본기에 충실한 감독이었다. 불필요한 요소를 최소화하여 관객이 오로지 캐릭터의 세계와 관점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그의 취향이 그대로 배어나는 작품이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다. 그는 협소한 공간을 매개로 인물의 성격과 대사,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장면에 따라 카메라 앵글 높이를 달리하는 기법을 구사했다. 영화 1/3 분량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하이앵글로, 그리고 중반부는 미들 샷으로, 후반 1/3은 눈높이보다 낮은 로우앵글로 찍은 것. 이 같은 카메라 움직임은 밀실 같은 배심원 회의실이 가져올 수 있는 단조로움 내지 지루함을 극복하려는 고민에서 나온 아이디어다. 이뿐 아니다. 영화 초반 12명의 배심원 사이를 움직이며 한 명씩 일일이 소개하는 롱테이크 역시 멋지다. 영화를 볼 때 마치 관객 자신이 13번째 배심원이 된 듯 착각에 빠지게 되는 까닭은 이런 연출효과 때문이다.
 
이 영화에는 주연이 따로 없다. 12명 배심원으로 나온 배우 모두가 주연이다. 그간 여러 영화에서 조연으로나 얼굴을 내비치던 배우들이 모처럼 주인공이 되어 펼치는 개성만점 연기대결은 신선해 보인다. 그래도 굳이 주연을 꼽아 보라면 토론의 중심에 서서 반전의 물꼬를 터주는 8번 배심원 헨리 폰다(1905~1982, 사진)를 들 수밖에 없다. 1929년 브로드웨이 무대를 통해 연기의 세계로 들어선 그는 배우인 딸 제인 폰다, 아들 피터 폰다를 거느린 영화인 가문의 아버지다. 대표작 ‘분노의 포도(1940)’를 비롯해 건 파이터 이야기를 다룬 ‘황야의 결투(1946)’, 블록버스터 전쟁영화 ‘사상 최대의 전투(1962)’, 톨스토이의 대서사시 ‘전쟁과 평화(1957)’ 등 여러 장르에서 폭넓은 연기를 보인 그는 미국인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이었다. 숨 거두기 한 해 전에 찍은 ‘황금연못(1981)’으로 늦게나마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아 평생의 한을 풀기도 했다.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다수의 폭력이 저지를 수 있는 사회 모순을 고발했다. 인권과 사형제도에 대한 문제의식도 강렬하다. 확인되지 않은 정보에 눈이 가려져 진실을 외면하는 비정상적 세상, 거리낌 없이 자행되는 인격사살과 마녀사냥, 섣부른 대중의 편견과 속단이 초래할 수 있는 폐해를 또렷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가짜뉴스가 횡행하는 요즘 세상에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반면 문제해결을 위한 진심 어린 토론과 인간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야말로 왜곡된 상황을 바로잡는 씨앗이라는 희망적 메시지도 담고 있다.
 
오프닝 신에서 관객은 웅장하고 높은 법원 건물의 위용에 압도된다. 법은 인간 편이기에 앞서 제도와 권력 쪽에 더 가깝게 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세상의 모든 권위가 인간의 가치 위에 군림해 온 지 오래다. 모두가 ‘예’라고 외칠 때 누군가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사회가 곧 정의로운 사회다. 한 사람의 지혜, 한 사람의 용기, 한 사람의 배려, 한 사람의 따뜻한 가슴이 있을 때 세상은 바뀌는 것이다.
 
 

silverinews 진고개 신사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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