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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⑮ - 마부

기사승인 2019.01.11  10: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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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⑮ - 마부
 
 
  - 제작 : 1961년, 한국
  - 감독 : 강대진
  - 배우 : 김승호, 황정순, 신영균, 엄앵란, 김희갑, 윤인자 외
  - 필름 : 흑백
  - 상영시간 : 98분
  - 수상 : 제11회 베를린 영화제 특별 은곰상
 
 
 
 정초(正初)다. 새로운 다짐으로 한 해를 맞이하려는 이때,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가족드라마 한 편 을 감상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에 빼어든 영화가 ‘마부(馬夫)’다.
 
강대진 감독의 ‘마부’는 1960년대 한국영화의 한 경향을 이뤘던 소위 ‘서민적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이미 서구사회를 강타했던 ‘네오리얼리즘’의 화면을 연상시키는 사실적 미장센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제11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특별 은곰상을 받았다. 이는 우리영화가 세계영화제에서 수상한 최초의 기록이다.
 
‘마부’는 하루가 다르게 현대화로 치닫는 세상에 살지만 여전히 전근대적인 정체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가족 해체의 위기에 몰린 하층 노동자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도시 서민들의 거칠고 가파른 삶을 여과 없이 드러낸 생명력이 넘치는 화면, 가난했던 시절의 서울 거리풍경과 달동네의 슬픔이 묻어나는 일상을 눈물과 유머라는 두 가지 코드로 옭아맨 연출 감각은 언제 봐도 감탄스러울 정도다.
 
끝이 안 보이는 고단한 삶
 
홀아비 하춘삼(김승호)의 직업은 말 마차에 짐을 실어 운반하는 마부. 마주(馬主) 밑에서 받는 몇 푼 안 되는 수입으로 변두리 달동네 판잣집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그에게는 자식이 넷 딸려있다. 시집을 갔지만 쫓겨 오기 일쑤인 벙어리 큰딸 옥례(조미령), 헛바람이 들어 신분을 속이고 사내들을 만나러 다니는 작은 딸 옥희(엄앵란), 허구한 날 도둑질과 싸움질만 하는 막내아들 대업(김진)은 춘삼의 삶을 늘 그늘지게 만든다. 그나마 춘삼은 고시공부에 매달린 맏아들 수업(신영균)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힘든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어느 날. 춘삼은 집으로 쫓겨 온 큰딸 옥례를 보고 불같이 화를 낸다. 옥례의 매 맞은 흔적을 발견한 춘삼은 사위(최성호)를 찾아가 화풀이를 하고 “죽어도 여기서 죽으라.”며 딸에게 소리친다. 벙어리 딸의 불행한 삶을 볼 때마다 가슴이 더 아픈 춘삼은 딸의 손에 몇 푼의 돈을 쥐어주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린다.
 
다방에서 차를 나르던 작은딸 옥희는 일을 때려치우고 친구 미자(최지혜)를 만나 팔자를 고쳐볼 궁리를 한다. 옥희는 하이힐에 양장을 차려입고 남자들을 유혹하러 나간다. 잘나가는 집구석의 아들 병국(장혁)을 소개받은 옥희는 자신을 사업가 아버지, 항공회사에 다니는 오빠를 둔 명문대 출신이라 속이고 교제를 한다.
 
춘삼은 마주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수원댁(황정순)에 감정이 이끌리고, 수원댁 역시 춘삼에게 호의를 보인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김영감(김희갑)이 끼어든다. 김영감은 수원댁에게 금전세례를 퍼부으며 꼬여댄다. 극장구경을 가기로 했다가 바람을 맞은 김영감은 춘삼과 수원댁의 로맨스를 목격하고 쓴 입맛만 다신다.
 
한편 옥례는 남편 첩의 밥까지 지어다 바치는 신세로 전락한다. 병신이라는 구박 속에 의지할 곳 없는 그녀는 눈물로 서러운 나날을 보낸다. 계속되는 남편의 구박 속에 버선발로 뛰쳐나온 옥례는 엄마의 무덤을 찾아 서러운 눈물을 쏟아낸다. 수업이 고시를 치르는 날, 다시 쫓겨 온 딸을 본 춘삼은 너무 속이 상해 “차라리 나가 죽으라.”고 호통친다. 그날 저녁. 옥례는 한강에 투신해 자살한다. 딸의 시신을 본 춘삼은 자신이 딸을 죽였다며 오열한다. 딸의 시신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춘삼과 가족들은 옥례가 깨끗이 빨아 곱게 개어놓은 식구들의 옷을 보고 다시 한번 눈물바다를 이룬다.
 
3개월이 흐른 뒤. 고시에서 세 번의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는 수업은 하루하루가 불안하다. 합격자 발표 때까지 일할 자리를 알아보려고 애쓰지만 여의치 않다. 그러던 중, 마차를 끌고 비탈길을 내려오던 춘삼은 사납게 달려오는 지프차에 놀라 말이 도망가는 바람에 다리를 크게 다친다. 지프는 알고 보니 마주 황사장(주선태)이 타고 있던 차량. 황사장은 다친 춘삼을 위로하기는커녕 자신의 차가 망가진 것에 화를 내며 춘삼의 해고를 암시한다.
 
병문안을 온 수원댁은 황사장이 춘삼의 말을 팔아버리려 한다는 소식을 전한다. 춘삼은 비감한 심정에 빠지고, 황사장의 경우없는 태도에 분개한 수업은 황사장과 그의 첩(윤인자)을 찾아가 따진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픈 동안 자신이 말을 끌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한다. 황사장과 첩은 “판검사 되실 분이 말을 끄시겠냐.”며 조롱한다. 힘없이 돌아가는 수업을 수원댁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 사이, 김영감은 춘삼에게 빌려준 4만환의 빚 대신 말을 끌어간다. 수업은 둘도 없는 친구이자 김영감의 아들인 창수(황해)를 찾아가 사정을 말하고 그에게 돈을 빌려 일단 말을 되찾아 온다. 그리고 마주에게 말을 돌려주기 위해 길을 나선 춘삼과 수업은 동료 마부들의 위로를 받으며 작별인사를 나눈다. 정들었던 말과 헤어지는 춘삼은 아쉬움에 쉽사리 발걸음을 돌리지 못한다. 숨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수원댁의 가슴도 타들어만 간다.
 
춘삼은 “내일부터 지게라도 지겠다.”는 수업의 말에 오히려 걱정 말라며 아들을 위로한다. 늦은 밤, 선술집에 들러 대포 몇 잔으로 쓰린 속을 달래고 돌아가는 춘삼과 수업. 기울어져 가는 판자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두 사람은 힘찬 말 울음소리에 깜짝 놀란다. 마구간에 매어 있는 말을 본 춘삼과 수업은 영문을 몰라 의아해 한다. 그리고 수업은 수원댁이 춘삼의 말을 사들여 몰래 돌려준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다.
 
창수의 알선으로 제과공장에 취직한 옥희는 정신을 차리고 성실하게 새 인생을 살아간다. 늘 말썽이던 막내도 이제는 마음을 다잡고 공부에 전념한다. 수업은 몸이 성치 않은 춘삼 대신 마차를 끌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모처럼 집안은 풍파 없는 시간을 보낸다. 그러는 사이 수업의 합격자 발표 날이 다가온다.
 
공고문이 나붙은 중앙청(광화문) 광장. 마차를 끌며 발표를 보러 간 수업은 명단에 또렷이 적힌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확인한다. 그때 뒤에서 수업을 부르는 춘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합격 사실을 확인한 두 부자는 길 위에 쓰러져 감격의 포옹을 나눈다. 눈물 속에 서로를 격려하는 두 부자. 이때 수원댁이 찾아오고, 옥희와 대업도 달려와 기쁨을 함께 나눈다. 수업은 수원댁을 향해 “오늘부터 저희들의 어머니가 되어주세요.”라고 말한다. 춘삼과 아들딸, 그리고 수원댁은 서로서로 팔짱을 끼고 의지하여 걷는다. 저 멀리 사라지는 가족을 축복이라도 하듯 하늘에서는 흰 눈이 펑펑 쏟아진다.
 
눈물과 웃음이 주는 카다르시스
 
언제 사라질지 모를 일자리와 자식들의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살얼음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버지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끝에 해피엔딩을 맞는다.
 
물론 시련 속에서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겉도는 가족 구성원의 모습이 길게 이어지는 것은 관객을 안타깝게 한다. 가진 자들의 고약한 갑질 횡포를 지켜보는 것 역시 몹시 불편하다. 그러나 슬픔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게 만드는 것은 이 영화가 지닌 또 다른 강점이다. 자식들 눈을 피해 수원댁과 데이트를 즐기던 춘삼이 의외의 상황을 만나 허둥대는 모습이나, 수원댁을 꼬여보려고 갖은 공을 들이지만 헛물만 켜는 김영감의 캐릭터는 관객을 울리다말고 배꼽 잡게 하는 요소다. 눈물 속의 웃음. 그 뒤에 나타나는 훈훈한 감동. 이런 카다르시스를 경험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한국영화 황금기의 배우들
 
전쟁이 끝난 1950년대 중반이후 질적 양적 팽창을 거듭하던 국내 영화계는 1960년대 들어 수많은 영화사와 프로덕션이 군웅할거 하는 양상을 보인다. TV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오락거리가 부족한 사람들은 영화관으로 모여들었다. 1968년 한 해에 제작된 방화만 212편에 달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황금기였다.
 
당시 활약한 배우 중 리더 격인 사람이 김승호(1918~1968, 본명 김해수) 아닐까 싶다. ‘마부’에서 자기희생적 부성애의 정점을 보여준 그는 ‘한국의 아버지’를 상징하는 배우였다. 한없이 푸근하고 너그러우며 구수한 서민의 풍모를 깊게 드리운 그의 연기는 많은 이의 공감을 불렀다. 종로 주먹 김두한 소개로 동양극단에 들어가 배우의 길을 걸은 이후 ‘박서방’ ‘로맨스 빠빠’ ‘시집가는 날’ ‘로맨스 그레이’를 비롯한 많은 영화에 출연했다. 아시아영화제 남우주연상을 3회나 차지하는 등 화려한 이력도 써내려 갔다. 하지만 60년대 중반 이후 전쟁 · 액션 · 청춘영화 붐이 조성되어 홈드라마 인기가 시들해지자 그의 활동반경도 줄어들었다. 이후 제작자로 변신하지만 연이은 흥행실패로 가산을 탕진했다. 전셋집에서 궁핍한 말년을 보내던 그는 아침에 세수를 하다 쓰러져 운명했다. 그의 나이 50세 때 일이다.
 
황정순(1925~2014)은 ‘국민 어머니’라는 대명사가 딱 어울리는 ‘한국영화의 대모’다. 400여 편 가까운 영화에 출연한 그녀는 자애로운 어머니 역할을 많이 맡았다. 1967년 ‘팔도강산’에서 전국에 흩어진 자식들을 찾아가는 어머니를 연기한 것을 계기로 인고와 자애로 상징되는 전통의 어머니상과 헌신적 아내의 이미지를 굳혔다. 그런 그녀이지만 정작 자신은 결혼 후에도 친자식을 낳아보지 못한 불운한 여인이었다. 80억 원 가량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지만 의붓자식과 조카손녀 간의 상속다툼 속에 반은 버려진 상태의 열악한 환경에서 반려견과 더불어 고독한 말년을 보내다 89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1960년대 우리 배우들의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했다. ‘마부’에도 김승호와 황정순 외에 신영균, 황해, 엄앵란, 최지희, 조미령 등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대거 모습을 보인다. 그 중에서도 수원댁을 흠모하는 김영감 역의 김희갑, 마주 황사장의 성질 더러운 첩 윤인자는 한번쯤 언급해야 할 배우다.
 
한때 코미디언 구봉서와 더불어 '막둥이와 합죽이‘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했던 김희갑(1923~1993)은 영화배우, 코미디언, 가수 등 만능 엔터테이너의 길을 걸은 ‘우리시대의 광대’다. 스크린에서는 우스꽝스럽고 실속 없는 인물로 자주 나온 그이지만 일본 메이지대학을 중퇴하고 해방 후에는 신문기자 생활을 한 엘리트다. 1967년 국책영화로 제작된 ‘팔도강산’의 주연을 맡아 대박을 터뜨리며 일약 국민의 스타로 등극했다. 그는 코미디언보다는 성격배우로 분류하는 것이 더 온당할 정도로 수백편의 영화에서 개성 짙은 배역을 맡아 열연했다.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 임화수 앞에서 깐깐한 성격을 감추지 못하다 갈비뼈가 3대나 부러지는 린치를 당한 사건은 세월을 거슬러 회자되고 있다. 실향민인 그는 TV 가요무대 프로그램에 나와 ‘불효자는 웁니다’를 자주 부르곤 했다. 부모님과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던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윤인자(1922~2012). 한국 영화사에서 그녀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면서 뚜렷한 이미지와 카리스마를 심어놓은 여배우도 없을 것이다. 13세 때 사리원 권번의 기생으로, 20세 되던 해엔 국일관 기생으로 활동한 그녀는 이 시대 최후의 관기(官妓)로도 불린다. 1943년 데뷔한 그녀는 1953년 ‘운명의 손’에서 상대 남자배우 이항과 한국영화 최초의 키스신을 찍은 배우다. 또 1956년 ‘전후파’라는 작품에서는 알몸 목욕 장면을 찍어 최초의 누드연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성에 관한 한 매우 엄혹했던 그 시절, 그녀는 다른 여배우들과 달리 개방적이고 활달한 캐릭터로 늘 금기의 벽을 허무는 자리에 서 있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이승만 정권은 맥아더 장군의 특사이자 해군사령관으로 임명된 마이클 루시 대령의 환심을 얻기 위해 윤인자에게 차마 하기 어려운 부탁을 한다. 국가의 부탁을 받은 윤인자는 약 1년 6개월 동안 루시의 현지처(現地妻)가 되어 그의 마음을 달래는 역할을 하게 되고 그녀의 살신성인 덕분에 한국 해군은 상당한 지원과 혜택을 누리게 된다. ‘양공주’ ‘관기’라는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 그녀야말로 진정한 애국자가 아닐까. ‘신라의 달밤’ 가수 현인과 동거를 했고, ‘선창’을 부른 가수 고운봉과 재혼을 했던 그녀는 한때는 비구니 승려가 되어 출가했다. 이후 환속하여 1989년 임권택의 ‘아제아제 바라아제’에 큰스님 역할로 나와 대종상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결코 예사롭지 않은 삶을 살아온 윤인자. 그녀는 언제나 전인미답의 길을 걸은 ‘배우 이상의 배우’였다.
 
그때가 그립다
 
‘마부’는 볼거리가 많은 영화다. 특히 나이든 세대라면 영화 속에 비춰진 1960년대 서울 거리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리라. 산동네 판잣집과 가마니를 두른 헛간, 거리를 누비는 삼륜차와 우마차, 입주 식모, 점포의 구식 간판들, 선채로 술과 안주를 먹던 선술집 등등 추억을 돌이키게 만드는 장면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춘삼과 수원댁이 극장구경(그때는 영화 관람을 꼭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을 하는 장면도 색다르다. 요즘 복합상영관과는 판이하게 다른 극장 외관과 내부 풍경이 정겹다. 가난했지만 사람냄새가 살아있던 시절의 이야기. 우린 그것을 ‘향수’라 부르고 그리워한다.
  

silverinews 진고개 신사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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