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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⑳ - 태양은 가득히

기사승인 2019.03.01  11: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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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⑳ - 태양은 가득히
 
 
  - 제작 : 1960년, 프랑스·이탈리아
  - 감독 : 르네 끌레망
  - 배우 : 알랭 들롱, 모리스 로네, 마리 라포레 외
  - 필름 : 컬러
  - 상영시간 : 118분
 
 
 
 작열하는 태양 아래 춤추는 나폴리의 쪽빛 물결, 흰 돛을 달고 그 위를 가로지르는 한 척의 요트. 낭만이 넘치는 지중해의 이국적 풍광은 보는 이의 넋을 빼앗지만 그 수면 아래 빗나간 욕망이 부른 끔찍하고 은밀한 진실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수면 아래 감춰진 욕망의 그림자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는 한 젊은이가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저지른 완전범죄가 드라마틱하게 붕괴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 스릴 만점의 심리 드라마이다.
 
페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베스트셀러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The Talented Mr. Ripley)’를 각색한 ‘태양은 가득히’는 미국 소설가의 작품을, 프랑스 감독과 연기자들이, 이탈리아를 주 무대로 만들어 낸 영화다. 흙수저로 태어난 한 젊은이가 금수저로 태어나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친구를 살해한 뒤 범죄를 감쪽같이 은폐하는 과정과 예기치 못한 변수의 등장으로 몰락하는 순간을 치밀하게 묘사한 걸작이다.
 
무엇보다 세계 최고의 미남 배우로 불린 원조 ‘옴므파탈’ 알랭 들롱의 젊은 시절 눈부신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아깝지 않다. 보는 이를 질식시킬 만큼 뛰어난 외모, 그 뒤에 감춰진 또 다른 악마의 모습까지 다 보여준 알랭 들롱의 연기는 ‘리플리 증후군’이란 신조어를 낳으며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당시 스물다섯 풋풋한 나이의 알랭 들롱은 비뚤어진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굴절된 한 청춘의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일약 세기의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요트 위 세 남녀의 위험한 항해
 
필립 그린리프(모리스 로네)와 톰 리플리(알랭 들롱)는 고교 동창 사이. 필립은 그림공부를 위해 로마에 유학 중이다. 그런 필립을 샌프란시스코로 불러들이기 위해 필립의 부모는 톰에게 아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면 5천 달러를 주겠다는 제의를 한다.
 
가난한 집안의 출신 톰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로마로 향한다. 5년 만에 재회한 톰과 필립은 표면적으로는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부잣집 아들 필립은 겉으론 친한 척하면서도 톰을 하인 부리듯 마구 대한다. 필립의 친구 프레디(빌리 킨스) 역시 톰을 그저 그런 인간으로 여겨 무시한다.
 
애인 마르주(마리 라포레)와의 이별이 싫어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필립은 마르주, 톰과 함께 요트여행을 떠난다. 장난기 많은 필립은 톰의 면전에서 보란 듯이 마르주와 정사(情事)를 벌이는 등 막무가내로 행동한다.
 
필립은 마르주가 톰에게 동정적인 모습을 보일수록 톰을 더 괴롭힌다. 면전에서 알짱거리는 톰이 보기 싫어진 필립은 요트에 딸린 구명보트로 톰을 몰아내 버린다. 요트와 연결된 로프가 풀리면서 톰은 바다에 표류하게 되고 강한 햇볕에 심한 화상을 입는다. 필립은 뒤늦게 요트를 돌려 구명보트를 찾아낸다. 톰은 간신히 구조되지만 육신의 고통뿐 아니라 자존심에도 큰 상처를 입는다. 그 일로 톰은 필립에게 앙심을 품게 된다.
 
배 위에서의 불편한 동거는 계속 이어진다. 마르주는 안타까운 나머지 톰에게 목적지에 도착하면 얼른 돌아갈 것을 권한다. 반면 톰은 필립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일을 꾸민다. 필립의 주머니에 여자 귀걸이를 몰래 숨겨 놓음으로써 마르주와의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의도다. 톰의 계획대로 두 남녀는 크게 싸우게 되고, 마르주는 요트가 가까운 항구에 도착하자 그대로 내려버린다.
 
톰과 필립을 태운 요트의 항해는 계속된다. 둘만 남게 되자 필립은 자신이 톰을 모욕했을 때의 기분을 물으며 “나를 죽이고 싶었지?”라며 유도심문 한다. 톰은 기다렸다는 듯 “너를 죽이고 내가 네 행세를 할 것”이라고 답한다. 귀걸이 사건에 대한 추궁에도 톰은 스스럼없이 자신이 꾸민 짓임을 밝힌다.
 
필립은 톰을 떼어놓기 위해 카드놀이를 제안한다. 자신을 이기면 5천 달러를 줄 테니 그것으로 내 곁에서 떨어지라는 얘기다. 카드 게임이 벌어지고 필립은 일부러 져준다. 그러나 이미 증오가 극에 달한 톰은 숨겨둔 나이프를 꺼내 필립의 가슴을 찔러버린다.
 
필립이 살해당하는 순간 거친 풍랑이 몰아친다. 톰은 파도와 사투 끝에 필립의 시신을 무거운 닻과 함께 방수포로 감싼 뒤 와이어로 단단히 묶어 바다에 던져버린다.
 
뭍으로 돌아온 톰은 마르주에게 필립이 화가 많이 나서 돌아오지 않기로 했으니 그리 알라고 전한다. 그리고 톰은 본격적으로 신분을 위장하고 필립 행세에 나선다. 진작부터 뛰어났던 손재주를 활용하여 사인과 여권까지 위조한 톰은 은행에서 필립의 수표를 발행받는다.
 
톰은 필립의 목소리까지 흉내 내어 마르주에게 전화를 건다. 마치 필립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다. 필립의 인생을 가로채 살고 있던 톰에게 어느 날 프레디가 찾아온다. 평소 톰을 깔보던 프레디는 우연치 않게 톰이 필립 행세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톰은 도자기로 프레디의 머리를 내리쳐 살해한다. 의도치 않은 두 번째 살인이 저질러진 것이다.
 
톰은 프레디의 시신을 한적한 곳의 우물에 유기하고 마치 필립이 프레디를 살해한 것처럼 꾸민다. 톰은 필립의 행방에 대한 거짓 정보를 경찰에 흘리고, 경찰은 이유 없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필립을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지목한다.
 
톰은 필립의 이름으로 미국의 부모에게 유서를 써서 부치기까지 한다. 내용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살한다는 것. 뒤이어 마르주에게 전 재산을 물려준다는 가짜 유언장도 만든다. 톰은 필립의 은행 잔고를 깡그리 찾아 유언장과 함께 필립의 침실에 놓아둠으로써 누가 보아도 필립이 주변을 정리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믿게 만든다.
 
경찰은 톰에 대한 의심도 품어보지만 그가 조작한 알리바이와 태연한 행동, 필립의 유서 등에 현혹되어 진실 추적에 실패한다. 결국 경찰의 수사는 필립이 프레디를 죽인 후 죄책감에 자살한 것으로 잠정 마무리된다. 톰의 살인행각 또한 완전범죄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는 사이 톰은 마르주를 자신의 여자로 만든다.
 
연인 관계로 발전한 톰과 마르주는 바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완전범죄로 모든 것을 손에 넣게 된 톰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 지중해의 푸른 물결과 쏟아지는 햇볕 아래서 두 사람이 망중한을 즐기던 그때, 요트를 처분하기 위해 나폴리를 방문한 필립의 아버지가 선착장에 도착한다. 마르주는 필립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고 홀로 남은 톰은 해변 카페의 흔들의자에 누워 차가운 음료를 즐기며 인생 최고의 기분을 만끽한다.
 
극적인 반전, 그리고 파멸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착장에 정박해 있던 필립의 요트가 크레인에 이끌려 서서히 뭍으로 올라온다. 선체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는 순간, 정체불명의 물체가 선체 후미 스크루 케이블에 감겨 끌려 나온다. 물체 밖으로 삐져나온 것은 심하게 부패된 사람의 손. 직감적으로 그것이 필립의 시신임을 알아차린 마르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시신을 유기할 당시, 시체를 묶은 와이어가 미처 가라앉지 못하고 스크루 프로펠러에 감겨버린 사실을 톰은 깨닫지 못했다. 그 때문에 필립의 시신은 해저에 가라앉지 못하고 항구까지 끌려오게 된 것. 한순간의 방심이 톰의 완전범죄를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사건의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난 그때, 경찰은 톰을 체포하기 위해 해변 카페에 나타난다. 경찰은 카페 주인을 통해 톰을 유인한다. 사랑하는 여인 마르주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비치파라솔 아래에서 달콤한 행복감에 취해 있던 톰은 “전화가 와 있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선착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는 채 형사들이 잠복해 있는 카페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톰. 그의 머리 위로 지중해의 눈부신 태양은 쏟아지듯 하얗게 부서진다.
 
스릴만점의 치밀한 구성과 전개
 
치밀한 구성과 라스트의 절묘한 반전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태양은 가득히’는 전쟁고아의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그린 ‘금지된 장난(1952)’의 감독 르네 끌레망(1913~1995)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다.
 
영화는 잉크를 풀어놓은 듯 짙푸른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음모와 살인, 거짓과 위선이 넘실대는 망상의 바다를 표류하다 끝내 파멸의 항구에 도착하는 한 젊은이의 위험한 초상을 담고 있다.
 
원작 소설은 주인공 톰 리플리의 완전범죄로 결말을 맺지만 르네 끌레망은 극적인 반전 장치를 통해 전혀 생각지 못한 결론을 이끌어냄으로써 원작과는 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리플리는 가난한 출신 배경으로 일정한 직업 없이 방황하는 ‘하류인생’의 상징이다. 그는 가진 것은 없지만 누구보다 소유욕이 강하고 매우 치밀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누구나 질투할 만큼 잘생긴 외모를 타고 태어났으나 그 아름다운 마스크 뒤에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냉혈한의 모습이 도사리고 있다. 그는 자신의 어긋난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않는 소시오패스다. 오히려 자신의 목적이 달성된 이후에는 엄청난 승리감에 도취되어 지상의 행복을 만끽한다.
 
그와 대척점에 서 있는 친구 필립은 부유한 집 안에서 태어나 온갖 호사를 누리며 누가 봐도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지만 상대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 지나친 말투와 행동이 문제가 되어 리플리에게 비참한 죽임을 당한다.
 
이 영화가 발표된 후 비정상적 인격 장애를 가리키는 ‘리플리 증후군’이라는 정신의학 용어가 생겨났다. ‘리플리 증후군’이란 현실의 꿈을 실현할 수 없는 사람이, 허황된 거짓말과 행동을 일삼다가 종국에는 그 거짓된 말과 행동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게 되는 망상적 장애를 일컫는다.
 

천사의 얼굴을 가진 악마를 연기한 알랭 들롱(1935~ )은 출신배경의 벽에 가로막혀 방황하는 청춘의 굴절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잔인한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깎아놓은 듯 수려한 알랭 들롱의 외모에 매료된 관객은 그의 범죄 사실이 탄로 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끝까지 가슴 졸이며 영화를 보게 된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해 보이는 그의 깊은 눈빛이 연민과 공감을 유발하는 묘한 매력을 지닌 까닭이다. 그 때문에 관객은 실체와 이미지를 혼동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네 살 때 부모의 이혼, 계부와의 갈등, 가톨릭 기숙학교에서의 퇴학, 정육점에서 일하며 보낸 어린 시절, 베트남 파병 당시 무단이탈과 1년여의 감방생활, 웨이터와 세일즈맨 등을 거친 전력에서 보듯 그는 영화 속 리플리와 다를 바 없는 밑바닥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맡은 역할을 더 실감나게 연기할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잘 생긴 외모 덕에 영화배우가 되어 만인의 사랑을 받는 스타가 되었지만 알랭 들롱의 비루한 과거는 그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평생의 이력이 되었다.
 
허무와 좌절을 삼킨 그 바다
 
코발트블루 지중해에 새긴 청춘 알랭 들롱의 위험한 도박은 짧은 봄날의 꿈처럼 허무하게 침몰했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믿었던 그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되는 톰 리플리. 우디 알렌(미국, 영화감독)의 말처럼 톰 리플리에게 있어 ’인생은 비참하거나 끔찍하거나 둘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다.
 
짙푸른 지중해의 수면 위로 퍼져나가는 니노 로타의 주제곡은 멜랑콜리하다. 그것은 마치 톰 리플리의 부서진 영혼을 위로하는 한편의 만가(輓歌)인 양 몹시 허허롭고 쓸쓸하게 들린다. 감동의 깊이를 더하는 데 있어 이보다 매력적인 도구가 또 있을까.
 
 

silverinews 진고개 신사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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