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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㉒ - 파리 대왕

기사승인 2019.03.21  09:2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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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㉒ - 파리 대왕
 
 
  - 제작 : 1963년, 영국
  - 감독 : 피터 브룩
  - 배우 : 제임스 오브리, 톰 채핀, 휴 에드워즈 외
  - 필름 : 흑백
  - 상영시간 : 90분
 
 
 
 소설 ‘로빈슨 크루소’나 ‘15소년 표류기’, 영화 ‘캐스트 어웨이(2001)’ ‘라이프 오브 파이(2012)’ 등은 망망대해 표류나 무인도에 버려진 인간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오지에 남게 된 주인공이 역경을 이겨내는 이야기는 인간 내면에 잠들어 있는 모험심을 자극하고, 고난을 극복하는 데서 오는 묘한 카다르시스가 있기에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오늘 소개하는 ‘파리 대왕(Lord Of The Flies)’ 역시 무인도에 표류하는 소년들이 겪는 모험담을 그린 영화다.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악마적 근성을 꼬집어왔던 영국작가 윌리엄 골딩(1911~1993, 1983년 노벨문학상)의 동명소설이 원작인 이 영화는 난관에 봉착한 인간이 위기를 돌파해 가는 단순 모험담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문명과 완전히 동떨어진 사회에 낙오된 소년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야수의 모습으로 바뀌며 철저히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렸기 때문이다.
 
‘파리 대왕’은 전쟁의 회오리에 휩싸인 유럽사회를 상징하는 듯한 작은 무인도에 흘러들어 온 아이들이 구조를 기다리며 생존하는 과정에서 펼치는 불신과 대립, 파멸에 관한 영화다. 특히 인간의 폭력적 근성과 권력의지, 내면에 존재하는 원죄적 본능의식을 고발하는 이야기의 주체가 천진한 소년들이라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다.
 
파격적인 무대연출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과시했던 실험연극의 대가 피터 브룩(1925~ )감독의 영상 또한 매우 사실적이며 잔인할 만큼 거칠지만 풍부한 알레고리와 넘쳐나는 철학적 메시지는 이 영화가 지닌 가장 큰 강점이자 매력이다.
 
무인도에 남겨진 소년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시기. 다수의 영국소년을 태우고 태평양 상공을 날던 비행기가 적국의 공격을 받아 산호섬에 추락한다. 극적으로 살아남은 13살 소년 랄프(제임스 오브리)와 천식을 앓는 뚱보 피기(휴 에드워즈)는 생존자를 찾아 나선다.
 
랄프와 피기는 물속에서 커다란 소라고둥 껍질을 줍는다. 랄프가 소라고둥을 힘차게 불자 그 소리를 듣고 수풀 속에 흩어져 있던 소년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그리고 해안 저편에서 검은색의 합창단 제복을 갖춰 입은 또 다른 무리의 소년들도 나타난다.
 
어른 생존자가 없는 상황에서 소년들은 무리를 이끌 대장을 뽑기로 한다. 합창단을 이끌고 온 잭(톰 채핀)은 자신이 합창 단장이자 학생회장이라며 대장이 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소년들은 민주적인 방식의 투표를 통해 처음 소라고둥을 분 랄프를 대장으로 뽑는다.
 
다음날. 랄프와 잭, 그리고 사이먼(톰 개먼)은 섬 일대를 돌아보기로 한다. 탐험에 나선 소년들은 자신들이 불시착한 곳이 완전히 바다에 둘러싸인 무인도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절망감에 빠진다.
 
랄프는 나름의 규칙을 정해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려 애쓴다. 랄프는 아이들에게 이성을 잃지 말고 지각 있게 행동할 것을 당부한다.
 
랄프와 피기는 자신들의 소재를 외부에 알리기 위해 하루 종일 모닥불을 피워 연기를 날려 보내기로 한다. 랄프를 따르는 아이들은 잠자리를 만들고, 잭의 합창단원은 식량조달을 책임진다. 모닥불은 랄프 팀과 잭 팀이 번갈아 지키기로 한다.
 
칼을 지닌 잭은 끝을 날카롭게 다듬은 나무창으로 팀원들을 무장시킨다. 성냥이 없는 소년들은 피기가 쓰고 있는 안경으로 태양 광선을 모아 불을 지피는 기지를 발휘한다. 소년들은 아직은 동심의 세계에 빠져 물놀이를 하는 등 즐거운 시간도 보낸다.
 
큰 야생돼지가 나타나면서 주위가 소란해진다. 소년들은 나무창으로 돼지를 무차별 공격해 죽인다. 사냥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잭의 팀원은 모닥불을 꺼뜨리고, 때마침 나타난 비행기는 섬의 상공을 지나쳐 버린다. “피에 굶주린 너희 때문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피기의 말에 화가 난 잭은 그의 뺨을 후려친다. 이때 충격으로 피기의 안경알 한쪽이 깨진다.
 
다시 불을 피운 소년들은 사냥한 돼지를 구워 만찬을 즐긴다. 굶주렸던 소년들은 모처럼 포식을 하지만 잭은 피기에게 한 점의 고기도 나눠주지 않는다. 사냥에 성공한 잭의 무리는 더욱 의기양양해지고 살육을 통한 희열감에 도취된다.
 
랄프는 꺼진 모닥불 때문에 흐트러진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회의를 소집한다. 랄프는 섬에서 벗어나려면  불을 관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기지만 잭은 생명 연장을 위해서는 사냥에 더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회의 도중 한 소년이 섬에서 괴물을 보았다는 말을 하여 갑자기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든다. 뜻밖의 소리를 듣게 된 소년들은 모두 공황상태에 빠진다.
 
괴물의 존재 여부를 두고 소년들의 의견은 갈라진다. 잭은 랄프를 겁쟁이라 몰아붙이며 괴물사냥에 나서려 한다. 랄프는 일방적으로 행동하려는 잭에게 규칙을 지키라고 말하지만 잭은 랄프의 말을 무시한다.
 
일단 괴물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랄프와 잭, 잭의 심복 로저(로저 엘윈)는 지금껏 가보지 않은 섬의 끝까지 수색하기로 한다. 섬의 높은 곳까지 기어오른 셋은 그곳에서 이상한 물체를 목격한 뒤 하얗게 질려 비명을 지르며 한걸음에 내려온다.
 
사실 소년들이 본 것은 괴물이 아니라 비행기 사고 당시 죽은 조종사의 시신이었다. 그러나 겁에 질린 나머지 소년들은 괴물의 정체를 제대로 확인하기 전에 내빼듯 도망와 버린 것이다. 그날 이후 괴물의 존재는 진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괴물이 있다고 믿게 된 랄프는 몸을 숨기려 하지만 잭은 괴물을 잡겠다고 나선다. 야생돼지를 사냥한 잭은 죽은 돼지의 머리를 막대에 꽂아 괴물에게 제물로 바친다.
 
한편 내성적이지만 희생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사이먼은 괴물의 실존에 의구심을 갖고 홀로 산에 오른다. 도중에 사이먼은 막대에 꽂혀있는 돼지 머리와 거기에 새까맣게 달라붙어 있는 파리 떼를 목격한다. 돼지머리를 바라보며 잠시 환각상태를 경험한 사이먼은 용기를 내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리고 마침내 괴물의 실체를 확인한다.
 
랄프와 피기를 비롯해 사냥을 하지 못하는 소년들은 잭의 패거리가 나눠주는 음식을 얻어먹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한다. 잭은 “소라고둥 따윈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너희에게 음식도 주고 괴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며 큰소리친다. 그 말에 랄프를 따르던 소년들은 하나둘 잭의 수하로 넘어가고 랄프 주위에는 피기와 나이 어린 소년 몇몇만 남는다.
 
어두운 밤. 해변의 소년들은 얼굴에 분칠을 하고 광란의 축제를 벌인다. 요란한 몸짓과 소리를 지르며 모닥불 주변을 도는 소년들의 행동은 식인종의 사육제를 방불케 한다. 그때 진실을 알리기 위해 사이먼이 달려온다. 그러나 괴물에 대한 공포심에 빠져있던 소년들은 어둠 속에 등장한 사이먼을 괴물로 오인하여 무차별적으로 공격한다. 사이먼은 진실을 말할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절명하고 만다.
 
어느덧 야수로 변해버린 잭의 일당은 이제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들을 붙잡아 매질을 하기도 한다. 매 맞고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들을 보며 미소를 흘리는 잭. 그는 이제 절대왕국의 통치자처럼 군림한다. 고기를 굽기 위해 불이 필요한 잭 일당은 피기의 안경마저 강탈한다.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 피기는 안경을 되찾기 위해 랄프와 함께 잭의 본부로 향한다. 랄프는 소라고둥을 불어 회의를 소집하려 하지만 오히려 아이들은 야유를 보낸다. 잭은 “여기는 내 땅이니 들어오지 말라.”고 명령한다.
 
위험천만한 벼랑 위에서 랄프와 잭의 몸싸움이 벌어진다. 두 소년이 서로 뒤엉켜 사투를 벌이자 아래서 싸움을 지켜보던 피기는 소년들을 향해 “규칙과 화합, 피와 야만 둘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하겠냐.”고 소리친다. 그러자 위에 있던 로저가 바위를 굴려버린다. 돌에 맞은 피기는 벼랑 아래 바다로 떨어져 숨진다.
 
흥분한 소년들은 이제 랄프 마저 죽이려 한다. 인간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필사적으로 도망가는 랄프와 그를 쫓는 소년들. 잭은 아예 숲에 불을 질러 랄프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간다. 자욱한 연기에 휩싸인 랄프는 함성을 지르며 쫓아오는 잭의 무리로부터 벗어나려 혼신을 다해 도망친다. 그러나 숨이 턱에 차오르고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진 랄프는 그대로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려 안간힘을 쓰는 그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는다.
 
랄프를 막아선 인물의 정체는 다름 아닌 해군 구조대원. 인근 해역을 수색하던 군인들이 마침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 섬에 상륙한 것이었다.
 
어른들의 출현으로 한바탕 소동은 끝이 난다. 살기가 가득했던 소년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서며 예전의 순수했던 표정을 되찾는다. 오직 한 사람, 죽음의 일보 직전 기적적으로 살아난 랄프는 엄청난 공포에 휩싸인 채 바들거리며 굵은 눈물을 흘린다.
 
공포 앞에 붕괴되는 인간성
 
소년들의 무인도 표류기는 구조대의 출현으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집단 최면에 걸린 듯 철저히 야수 본능을 드러낸 소년들의 행동은 다시 돌아봐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다.
 
무인도에 유리된 소년들은 애초에는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공동체를 구성하고 의사결정 과정을 거친다. 그들은 공정한 방식으로 대표자를 뽑고 생존을 위한 임무 분담을 하는 등 지극히 이성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들의 중심에는 이성과 상식을 가진 랄프가 존재한다. 그가 지닌 소라고둥은 민주적 질서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랄프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은 합창 단원의 우두머리 잭이다. 그는 권력욕이 있으며 상당히 현실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소년이다. 그가 지닌 칼은 권력을 상징하며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다. 잭은 아이들을 야만의 세계에 빠뜨려 인간성을 파괴하는 원흉이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을 먹여 살리는 인물이다.
 
이성과 절차의 상징인 소라고둥을 가진 랄프와 생존을 위한 살상도구를 쥔 잭은 상대의 세계관을 인정하지 못하고 사사건건 대립한다. 결과적으로 랄프는 세력다툼에서 패배함으로써 실패한 이상주의자로 남게 된다.
 
처음에 소년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깔깔거리며 물장난을 할 정도로 순진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영화 중반 정체불명의 ‘괴물’에 대한 공포심이 생겨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괴물에 대한 막연한 공포는 소년들의 내면에 잠복해 있던 악마적 본능을 끄집어내는 동인이 된다.
 
공포 앞에서 이전의 민주적인 질서는 허물어지고 아이들은 패를 갈라 대치한다. 힘을 가진 집단이 그렇지 못한 집단을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권력을 손에 넣은 쪽은 살인도 서슴지 않는 과격 집단으로 변모한다. 한번 엄습한 공포는 또 다른 공포를 낳고, 끊임없는 희생을 요구하게 된다. 랄프의 세계는 붕괴하고, 잭의 절대왕국이 건설되면서 평화롭던 해변은 일순간 무간지옥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정작 ‘괴물’은 누구였을까
 
정지된 사진을 한 장씩 보여주며 넘어가는 오프닝은 매우 인상적이다. 소년합창단의 아름다운 화음이 들리는 가운데 잔디 위에서 평화롭게 크리켓 게임을 즐기는 장면이 나온다. 이어 핵무기를 의미하는 미사일이 등장하고 하늘을 가득 메운 공습기와 태평양 상공을 건너는 여객기가 나타난다. 불안스레 들려오던 북소리가 심장을 강타하듯 격정적으로 타오르는 순간, 먹구름 드리운 상공 아래 불시착한 여객기의 사진이 보인다.
 
오프닝에 쓰인 스틸사진들은 마치 다큐멘터리의 필름처럼 감정을 고조시킨다. 거친 흑백사진을 이어붙인 몽타주가 주는 극도의 긴장감, 청각을 교란하는 타악기의 조합은 관객의 몰입을 최상 단계로 끌어올린다. 1990년 해리 훅 감독의 동명 컬러 리메이크 필름보다 이 영화가 더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런 장점들 때문이다.
 
영화에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원작소설에는 환각 상태에 빠진 사이먼이 파리 대왕의 분신인 죽은 돼지머리와 내면의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나온다. 본능적인 형태의 악마를 의미하는 파리 대왕은 사이먼에게 “넌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라는 것을”이라고 말한다. 이 대화로 말미암아 소년들이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괴물은 외부의 누군가가 아니라 소년들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임을 인지할 수 있게 한다.
 
어른들의 전쟁노름으로 무인도에 갇혔던 소년들은 다시 어른들에 의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문명사회로 돌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영화의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보아야 할까. 이점에 대한 해석은 엇갈린다.
 
소년들의 광기는 낯선 환경에서 생겨난 것이기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면 잃었던 순수성을 되찾을 것이라며 희망을 말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원작자 윌리엄 골딩처럼 ‘악’은 환경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여기에서도 서로 다른 세계관이 충돌한다.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silverinews 진고개 신사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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