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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52) - 서편제

기사승인 2020.01.21  10: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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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100년, 인생100년 (52) - 서편제
 
 
  - 제작: 1993년, 한국
  - 감독: 임권택
  - 배우: 김명곤, 오정해, 김규철 외
  - 필름: 컬러
  - 상영시간: 112분
  - 수상: 상하이 영화제 감독·여우주연상 외
 
 
 1960년대를 지나오며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들어서며 TV보급과 할리우드의 공습이라는 외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침체일로를 걷는다. 1974년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이 46만 명, 1977년 김호선 감독의 ‘겨울 여자’가 5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잠시 숨통이 트인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도 잠깐. 한국영화는 속칭 ‘호스티스영화’ 아류작을 양산하는 등 근시안적 태도로 안주하려다 긴 불황의 터널을 걷게 된다.
 
군부독재정권 시절에는 에로영화가 판을 치면서 국산영화의 질적 저하는 더욱 심해졌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늪에 빠진 한국영화에 심폐소생술을 가한 작품이 출현하니 곧 임권택 필생의 역작 ‘서편제(西便制)다.
 
‘장군의 아들(1990)’로 67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아 역대 최고의 흥행기록을 갈아치운 바 있는 임권택 감독은 장사가 안될 거라는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평소 자신이 만들어보고 싶었던 판소리영화에 소신 있게 도전한다. 결과는 대성공. 임권택은 방화사상 최초로 100만 관객 돌파라는 금자탑을 쌓으며 그의 이력에 화려한 발자취를 남긴다.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소리꾼 남매의 한과 이별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서편제’는 수묵화처럼 아름다운 남도의 사계절을 담은 절정의 화면과 눈시울을 젖게 하는 애절한 가락, 진한 여운의 향토성 짙은 스토리텔링을 선보이며 한국영화사의 위대한 ‘마스터피스’로 남게 된다.
 
‘산다는 것은 한(恨)을 쌓는 일’
 
전남 보성의 소릿재 고개. 십여 년 전 헤어진 누이 송화(오정해)의 흔적을 좇고 있는 동호(김규철)가 주막 안으로 들어선다. 동호는 그곳에서 과거 송화에게 소리를 배웠다는 한 여인을 만난다. 동호는 그녀로부터 유봉(김명곤)이 죽은 뒤 송화가 3년 상을 마치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말을 듣는다. 여인은 송화가 눈이 멀어 장님이 된 사실도 말해주며 그녀의 의붓아비 유봉이 딸의 목소리에 한을 심어주려고 고의로 그렇게 만들었다는 소문도 귀띔한다.
 
송화에 대한 더 이상의 단서를 찾지 못한 동호는 주막 여인의 판소리 한 대목을 청해 들으며 잠시 의붓아비 유봉과 송화에 대한 추억 속으로 빠져든다.
 
전쟁 직후, 명창 이동성의 수제자였던 유봉은 스승의 애첩을 건드린 죄로 파문당한다. 그 뒤 유봉은 팔도를 떠돌며 소리 품을 팔아 살아간다. 그런 유봉에게는 송화라는 계집아이가 하나 딸려 있는데, 유봉은 부모 잃은 그 아이를 소리꾼으로 키우려고 수양딸로 삼아 데리고 다닌다.
 
보성 읍내에 소리 품을 팔러 온 유봉은 그 마을의 과부 금산댁(신새길)과 눈이 맞아 몸을 섞는다. 동호라는 아들을 두고 있는 금산댁은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피해 유봉과 함께 먼 곳으로 도망가 살림을 차린다. 그러나 금산댁은 유봉의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이후 유봉은 동호마저 거두어 키우게 되고 송화와 동호는 친 오누이처럼 사이좋게 자란다.
 
유봉은 송화와 동호를 앉혀 놓고 소리를 가르친다. 송화는 유봉의 혹독한 소리공부를 그런대로 받아들이지만 애초 소리에 소질이 없는 동호는 야단맞기 일쑤다. 그래서 유봉은 동호에게 북을 두드리는 고수 공부를 가르친다. 
 
어느 날, 아이들의 소리 귀를 뚫어주려고 창극공연 구경을 나온 유봉은 장터에서 오랜 친구 낙산거사(안병경)를 만난다. 낙산거사는 장터를 옮겨 다니며 혁필화(한자에 그림을 결합한 그림. 가죽 붓으로 그린다)를 그려 먹고 사는 인물. 둘은 서양문물 때문에 판소리 설 땅이 없어졌다고 한탄하며 대폿잔을 기울인다.
 
몇 년이 흘렀을까. 어엿한 청년과 처녀가 된 동호와 송화는 유봉과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며 소리를 판다. 시절이 변했지만 양반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한량들은 유봉과 소리꾼 남매를 상놈 취급하며 함부로 대한다. 송화는 손님이 주는 술을 억지로 받아 마시고 술도 따른다. 그것에 화가 치민 유봉은 송화의 뺨을 때리고 이를 말리던 동호도 같이 혼이 난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거여! 천대받는 소리 해봐야 앞날이 뻔한디. 언제까지 저 사람 따라 다닐거여!” 평소 유봉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동호가 송화에게 불만을 쏟아낸다.
“그래도 나는 소리가 좋아. 소리를 하면 만사를 다 잊고 행복하거든.”
“그렇게 번 돈 저 사람이 술 먹고 다 써버리는데도?”
“아버지도 불쌍하신 분이여.”
“아버지는 무신…… 아무것도 아니지.”
자신의 어미가 죽은 것도 유봉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동호는 어릴 적부터 반감을 품고 살아왔지만 송화는 유봉을 불쌍한 사람이라며 감싸준다.
 
유봉과 송화 남매는 약장수와 한패가 되어 장터에서 소리를 한다. 그날도 유봉은 동호의 북 장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북을 발로 걷어차고 야단을 친다. 그때 신식 악극단 행렬이 도착하고 구경꾼들은 모두 그리로 몰려간다. 약장수 패와도 찢어져 갈 곳이 없는 유봉과 오누이는 어느 폐가에 몸을 맡기고 그곳에서 소리공부를 하며 나날을 보낸다.
 
옥중가를 가르치는 유봉. 그는 한 맺힌 소리를 뽑아내지 못한다며 송화를 다그친다. 동호는 “허구한 날 죽으로 끼니를 때우는데 소리가 나올 리 있냐.”며 뼈있는 소리를 한다. 그래도 유봉이 계속 다그치자 송화는 있는 힘을 모두 쥐어짜며 소리를 내지르려 애쓴다. 그런 모습이 안타까운 동호는 세상이 변했다며 더는 소리에 매달리지 말라고 역정을 낸다. 그 말에 흥분한 유봉은 동호와 엉겨 붙어 싸우고, 결국 동호는 짐을 싸들고 객지로 떠나온다.
 
동호는 서울에서 한약방 직원으로 취직해 돈을 벌며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는다. 그러나 누이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홀로 떠나온 죄책감에 괴로운 동호는 틈만 나면 약재 수집을 핑계로 전라도 땅에 내려와 송화의 흔적을 찾는다.
 
소리 잘하고 얼굴 반반하여 뭇 사내들이 희롱했을 뿐 눈이 멀어 가정은 이루지 못했다거나, 항상 남동생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등 동호는 송화와 관련한 소식을 간간이 주워듣지만 그녀의 자취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낙심한 동호는 그만하고 발길을 돌리려다 우연히 낙산거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몇 해 전 송화를 만났었다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호가 떠난 뒤 송화는 상실감에 식음을 전폐하고 소리 또한 작파한다. 그녀는 매일 당산나무 아래서 동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반면 유봉은 송화에게 소리를 다시 시키려고 갖은 애를 쓴다. 그는 쇠약해진 송화를 위해 한약을 달여 먹이면서 과도한 양의 부자(附子)를 섞는다. 말 못할 한을 가슴에 심어줘야 진정한 소리꾼이 된다는 속설을 굳게 믿는 유봉이 송화의 눈을 멀게 만든 것이다.
 
해도, 달도, 어스름 황혼도,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 송화는 오직 득음만을 위해 소리 공부에 매달린다. 송화는 유봉이 인도하는 줄을 붙잡고 지팡이에 의지한 채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몇 번의 봄여름과 가을 겨울을 더 보낸다.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백발이 성성해진 유봉은 송화와 함께 전쟁 통에 주인이 사라지고 없는 소릿재의 허물어져 가는 빈집에 당도한다.
 
앞 못 보는 딸과 늙고 병든 아비는 엄동설한 속에 먹고 살길이 막막하기만 하다. 시래기죽으로 근근이 연명하는 와중에도 유봉은 여태껏 한 맺힌 목소리를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송화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입을 뗀다.
“서편 소리는 사람의 가슴을 칼로 저미는 것처럼 한이 사무쳐야 하는데 네 소리는 예쁘기만 하지 한이 없어. 사람의 한이라는 것은 한평생 살아가면서 가슴 속에 첩첩이 쌓여서 응어리지는 게다. 살아가는 일이 한을 쌓는 일이고, 한을 쌓는 일이 살아가는 일이 된단 말이여. 조실부모하고 눈까지 잃은 너는 어찌 한이 쌓인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단 말이냐.”
 
눈 쌓인 소릿재 고갯마루에서 허공을 향해 소리를 내지르며 목을 푸는 송화. 피를 토해내듯 절규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골짜기를 타고 메아리친다. 그날 저녁. 소리 품을 팔아왔다며 유봉이 닭 한 마리를 삶아 내온다. 뱃속에 든 것도 없이 소리만 질러대는 딸이 안타까워 유봉이 마련한 그 귀한 음식은 사실 아랫마을에서 훔쳐온 닭으로 만든 것. 그러나 유봉은 도둑질이 들통나 닭 주인에게 호된 매타작을 당한다.
 
드디어 송화는 목소리에 자신의 한을 제법 실어내는 경지에 이른다. 그제야 유봉은 자신이 송화의 눈을 멀게 했음을 고백한다. 유봉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고 묻자, 송화는 고개를 끄덕인다.
“나를 원수로 생각했다면 네 소리에 원한이 맺혔을 텐데 그런 흔적은 없더구나. 이제부터는 네 속에 응어리진 한에 파묻히지 말고 그 한을 넘어서는 소리를 혀라.” 송화를 향한 유봉의 부탁은 그의 유언이 되고 만다.
 
유봉 모녀의 행방을 알게 된 낙산거사는 소릿재로 향하지만 이미 유봉은 죽었고 송화도 이태 전 그곳을 떠난 뒤였다. 그 후 더는 송화의 소식을 모르다가 몇 해 뒤 보성읍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주막을 지나던 낙산거사는 귀에 익은 소리를 듣게 되는데, 그것이 송화의 소리임을 알아차린 그는 극적으로 송화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낙산거사에게 들은 바대로 동호는 보성 어디쯤 송화가 있었다는 주막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곳에도 송화의 흔적은 지워지고 없었다. 더 수소문한 끝에 동호는 남도 한쪽 끝에 있는 허름한 주막을 찾아간다. 동호는 천가(최종원)라는 주인 남자에게 소리하는 아낙의 소문을 듣고 왔다며 그녀의 소리를 듣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녀는 다름 아닌 송화였다.
 
자신의 소리를 청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불려온 송화. 그런 송화를 말없이 바라보는 동호. 소리를 좇아 남도를 안 돌아다닌 곳이 없는 위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동호는 “소리만 있어주면 이대로 앉아 밤이라도 새겠다.”고 말한다. 북을 잡아본 지 오래라 어떨지 모르겠다며 북채를 드는 동호. 송화는 남자의 북장단에 맞춰 심청가를 부르기 시작한다.
 
지난 세월의 한이 뚝뚝 묻어나는 송화의 목소리에 감복한 동호의 북장단은 연신 추임새를 붙이며 따라간다. 송화의 창과 동호의 북은 서로를 어르고 달래며 날이 저물도록 멈출 줄 모른다. 송화의 한 맺힌 소리가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동호의 북도 격정의 장단으로 화답한다. 소리와 장단이 합일되어 무아지경에 도달하기를 몇 차례. 거친 두 사람의 호흡이 잦아들며 심청가 한 대목은 끝이 난다. 그 순간 땀과 눈물로 흠뻑 젖은 송화와 동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희열과 슬픔의 감정이 교차한다.
 
다음날. 동호는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주막을 나선다. 천가는 한길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호를 바라보며 송화에게 묻는다.
“저 사람이 자네가 늘 기다리던 동생인가?”
“네. 제 소리가 저 사람의 북장단을 만났을 때 대번에 동생인지 알아챘지요. 옛날 제 아비 솜씨 그대로였어요.”
“어쩐지 심상치 않더라니. 헌디, 그렇게도 기다리던 사람끼리 왜 서로 모른 척하고 헤어진단 말인가?”
“한을 다치고 싶지 않아서였지요.“
“무신 한이 그렇게도 깊이 맺혔간디 풀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헤어진단 말이오.”
“우린 간밤에 한을 풀어냈어요.”
“어떻게?”
“지 소리하고 동생의 북으로요.”
“어쩐지. 임자소리가 예전하고 썩 다르다고 했더니만······.”
 
동호가 서울로 가버린 뒤, 송화도 지난 3년간 몸을 의탁했던 그곳을 떠나기로 한다. “다시 홀아비로 돌아가는구먼.” 천가는 쓴 입맛을 다시며 아쉬움을 드러낸다. 어린 계집아이 하나를 길라잡이 삼아 정처 없는 길을 나서는 송화. 한 맺힌 소리를 뒤로하고 강둑 위를 걸어가는 그녀의 머리 위로 흰 눈이 펑펑 쏟아져 내린다.
 
한국 최초 100만 관객의 금자탑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경험도 없이 시장바닥에서 군화장사를 하다 영화판에 뛰어든 임권택은 1962년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감독에 데뷔한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스스로 고백했듯 저질영화 일색이었다. 거의가 먹고 살기 위해 마구 찍어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국인의 삶과 의식세계를 그려낸 ‘잡초(1973)’ ‘족보(1978)’ ‘깃발 없는 기수(1979)’ ‘만다라(1981)’등 일련의 작품을 기점으로 임권택의 영화는 반전을 맞게 된다.
 
이후 ‘씨받이’로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강수연), ‘아다다’로 몬트리올 영화제 여우주연상(신혜수),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강수연)을 받으며 세계가 주목하는 감독으로 발돋움한 임권택은 한국적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서편제’의 성공을 계기로 흥행과 예술성 모두를 인정받는 거장으로 확고히 자리 잡는다.
 
1993년 4월 10일 서울 단성사에서 단관 개봉한 서편제의 흥행은 장장 196일이나 이어진다. 국산영화의 6개월 넘는 장기상영은 초유의 일. 당시 단성사가 ‘서편제’ 하나로 불러들인 관객은 84만 6천 명이다. 그때 단성사 객석이 1,117석. 1일 5회 상영하고 완전 매진됐을 때 5,585명이 관람할 수 있으니까 그 같은 기록은 5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전회 매진이 되어야 달성 가능한 것이었다. 이후 명동 코리아극장, 강남 씨네하우스로 확대 개봉된 ‘서편제’는 서울에서만 103만 5천 명의 관객을 불러들였다.
 
이중 플래시백(동호와 낙산거사의 회고)이라는 독특한 서사구조와 한층 성숙해진 문학적 완성도를 보여준 ‘서편제’이지만 ‘소리’를 공부한 김명곤과 오정해가 없었다면 과연 영화가 성공을 거두었을지는 의문이다. 인간문화재 박초월에게 판소리를 사사한 재야의 소리꾼이자 연극배우인 김명곤과 명창 김소희에게 서편제를 전수받은 오정해(당시 21세)는 한이 서린 소리꾼 부녀로 나와 믿기 힘든 열연을 보여주었다. 훗날 문화부장관으로 변신하는 등 재주와 능력이 출중했던 김명곤은 이 영화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동호 역의 김규철은 비음악인 출신 연극인이지만 약 2개월의 훈련 끝에 고수 연기를 무난히 해냈다. ‘작은 거인’ 김수철의 OST도 영화 성공에 빼놓을 수 없는 공신이다. 그의 자작곡 ‘천년학’과 ‘소리길’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짙은 슬픔을 자아내며 극의 몰입을 한층 높여준다.
 
‘서편제’는 남도의 사계를 담은 서정미 만점의 영상과 1950~60년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화면들로 깊은 감동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동호와 송화의 당산나무 아래 이별장면(송화의 만류를 뿌리치고 붉은 황톳길을 달려가는 동호의 뒷모습. 참 슬프다),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언덕길을 내려오는 유봉과 오누이(5분 40초에 달하는 롱테이크. 경이적이다), 오랜 이별 뒤 무언의 해후를 하며 절정의 소리를 완성하는 마지막 씬은 압도적이다.
 
지나온 세월을 이야기하는 대신에 혼신을 다한 소리와 북장단으로 눈물의 교감을 나누는 오누이. 서로를 알면서도 말을 아끼는 오누이의 소리와 장단은 긴장과 절정의 강을 건너 화해와 용서에 도달한다. 땀과 눈물의 완창(完唱), 그 속에서 피어나는 예술혼과 남매의 한 맺힌 절규는 최고의 클라이맥스로써 한 치의 부족함이 없다.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만남이지만 서로의 가슴에 간직한 한을 지켜주려 이별을 선택하는 오누이의 절절한 엔딩도 눈물을 훔치게 한다. 그놈의 한(恨)이란 게 대관절 무엇이관데.
 
 

silverinews 진고개 신사 news1@silver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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